산불 피해 비켜간 속초 보광사 가봤더니
[오마이뉴스 글·사진:정덕수, 편집:김지현]
[기사 보강 : 7일 오후 3시 36분]
지난 4일 오후 11시 32분, 미시령로 인근의 한 아파트 단지 근처에서 주변 상황을 취재할 때 속초시청은 "금일 19:17분 산불발생 속초의료원, 보광사 일대 주민들은 중앙초교로 즉시 대피바랍니다"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아이고, 저기 보광사 불 타는가 보네, 저 정도면 보광사 다 탔어! 저기 보광사 맞다! 맞어!"라는 한 여성의 외침이 들렸다.
▲ 타오르는 산불 누가 보더라도 송림이 아닌 그 너머 건물 같은 게 탄다고 생각할 광경이다. 이 화염이 치솟은 지점을 가리키려 보광사가 탄다고 했다. |
ⓒ 정덕수 |
익숙하지 않은 길이라 그저 본능적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지도라도 봤으면 제대로 갈 수 있었을 텐데, 보광사를 지척에 둔 지점에서 엉뚱하게 산 하나를 사이에 둔 불당골부터 들리게 됐다. 다시 영랑호반길 47번지 일대를 둘러본 뒤 '더 이상 속초에서는 크게 불이 번지지 않겠다'라는 판단이 섰다. 잠시 앉아 휴식을 취하고 현장을 빠져나왔다.
방진 마스크 하나만 챙겼다면, 그리고 뭔가 집에서 나올 때 잃어버린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헤드랜턴을 빠트렸다. '1300루멘 손전등과 헤드랜턴이 집에 있으면 뭐하나 이럴 때 필요한 걸 깜빡하다니.' 하지만, 그 시각에 택시밖에 없는 교통편이 야속하다.
시각은 이미 5일 오전 3시가 훌쩍 넘었다. 그길로 현장에서 최대한 먼 곳으로 이동해 숙소를 잡고 <오마이뉴스>에 기사부터 한 꼭지 보냈다.
숙소에서 속초시청과 고성교육지원청으로부터 받은 문자메시지는 단 2개, 그러니까 각 하나씩이다. 하나는 5일 오전 4시 40분 "속초시 미시령로 주변 산불 확산 중에 있음, 인근 주민들께서는 대피만전 및 아침 차량이동을 자제바랍니다"였고, 다른 하나는 오전 6시 58분에 "2019년 4월 5일(금) 산불로 고성지역의 모든 학교는 휴업함을 알려드립니다"였다.
이 두 메시지로 나는 '산불의 진행은 더 이상 없다, 이미 불길이 휩쓴 지역에서 얼마간 불은 유지되겠지만 날이 밝아 장비가 보강되면 어렵지 않게 진화되겠다'는 판단이 맞았다는 게 확인됐다. 이 메시지 아니었다면 기사 하나만 송고하고 서둘러 현장으로 달려갈 뻔했다. 메시지를 확인하고 기사 하나를 더 서둘러 보냈다.
평화로운 세상에서 다시 현장으로
기사 두 꼭지를 보내고 시각을 확인하니 5일 오전 8시 30분, 나갈까 생각했으나 다음 기사로 사용할 사진을 정리하며 오전 9시 30분이 되기를 기다렸다. 새벽에 서울에서 현장을 취재하기 위해 속초로 왔다는 이희훈 <오마이뉴스> 사진팀 기자와 통화를 했다.
그에게 "지리도 서툴러 일단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3시간, 휴식을 위한 배려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시간. 하지만 더 지체할 수 없기 때문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전화를 받은 이희훈 기자는 "지금 고성에서 촬영하고 있다"라고 한다.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눈 뒤, 소음이 섞여 제대로 알아듣기 어려운 상태가 됐다. 그는 "정덕수 기자님은 이 지역에 계시니 잘 아시겠죠? 고성산불… 행정복지센터…"라고 말했다. 행정복지센터가 뭐지 생각했다. 이후 나는 "고성군 토성면에서 발생한 산불이니까 토성면 주민센터를 찾아가시면 될 거 같다"라고 답했다. 이 기자는 "그런 것 같다, 전 거기로 가봐야 할 것 같다"라고 말했다.
▲ 벚꽃 핀 영랑호 맑은 식목일 오전, 이 풍경만으로는 지난밤의 악몽 같은 순간을 어찌 알까. |
ⓒ 정덕수 |
▲ 출동한 경찰병력 최대한 가깝게 풍경을 당겼다. 내가 갈 수 없으니 풍경을 당길 수밖에, 그 기막히게 아름답게 보이는 풍경 속엔 잔불정리를 위해 나온 경찰들이 막 도착하고 있었다. |
ⓒ 정덕수 |
바람이 언제 그렇게 불었나 싶다. 어쩌다 벚꽃이 일순 일렁일 정도다. 연기가 내뿜는 매캐한 냄새만 아니었다면, 청명한 식목일일 텐데... 난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을 이어가는 이들 사이로 밤새 불에 탄 현장으로 향했다. 아니, 지난 밤 공포에 몇 번이고 몸을 움츠렸던 현장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었다.
역사는 짧아도 아름다운 풍경 속의 절
보광사(普光寺)는 강원도 속초시 동명동 579-2번지 영랑호 옆에 있다. 1937년 정화택이 세운 곳으로 역사가 그리 길지 않은 절이다. 그러나 80년을 이제 막 넘긴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탐방객이 제법 찾는 이유가 있다. 바로 앞에 영랑호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고, 주변을 빙 둘러 사철 푸른 송림이 에워싸 아늑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보광사라는 이름은 부처의 제자 53불 가운데 수제자인 '보광불존(普光佛尊)을 금강산 유점사에서 모셨다 해 붙였다고 한다.
아무려나 절집은 절집다워야 발길이 향하고, 중이 중노릇 제대로 해야 격을 좀 높여 '스님'이라는 입말이 거슬리지 않는다. 특별히 절집을 찾아다닌 적도 없고, 종교를 적어야 할 때면 추후도 망설임 없이 '무교'라 적는 입장에서 보광사도 그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절집답다고 인정해서도, 고명한 스님이 있어 관심 가진 건 아니란 얘기다.
▲ 불에 탄 숲 이 숲으로는 지난 밤 치솟은 화염은 말이 안 된다. 분명 큰 화염을 가리키려 보광사가 탄다고 했다. |
ⓒ 정덕수 |
중앙초등학교를 지나 영랑호로 내려서자 산불이 휩쓴 현장에 들어섰다는 게 실감이 났다. 호숫가에 잘 가꿨던 향나무는 뼈대만 앙상하고, 소나무도 잎 하나 없이 새까맣게 탄 상태로 서 있다. 벚꽃은 불에 익어 누렇게 뜬 채로 오그라들었고, 꽃망울이 맺혔던 철쭉도 이젠 꽃단장 하긴 영 글렀다.
영랑호수를 빙 둘러 물위로 모두 그슬린 상태다. 맞은편엔 잔불진화를 위해 출동한 경찰버스가 여러 대가 서 있다. 아직은 이 상황을 모르고 찾은 이라면 어떤 일이 있었는지 눈치 못 챌 정도로 나무들은 온전해 보인다. 5월을 넘기며 소나무들은 제 빛을 잃어버린다. 활엽수는 밑둥치를 그슬려도 어지간하면 살아나는데 소나무는 밑둥치만 그슬려도 생명이 다한다.
보광사 요사체 뒤를 둘러싼 솔밭은 도로에서 볼 때 그 속에 절집이 있을까 싶을 정도다. 그 숲도 까맣게 바닥을 그슬렸고, 제법 많은 나무는 당장 먹물을 뚝뚝 흘리기라도 할 듯 그슬리다 못해 새까맣다.
선부전·요사체 모두 온전히 보존
"보광사가…"
▲ 보광사 보광사를 사람들의 발길이 끌리게 했던 멋진 송림이 화망[ 모두 탔다. 과연 몇 그루나 남아 그 풍경을 그리게 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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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광사 대웅전 그 높이 화염을 뿜어 올린 건 무엇인가? 보광사 대웅전은 온전히 남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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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광사 선부전 보광사 선부전도 온전하다. 바닥의 잔디가 모두 불에 그슬렸는데 불에 취약한 육송으로 지은 절집이 그 불길을 견뎌낸 건 온전히 소방관들의 노력 덕 아니곤 달리 답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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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광사 요사체 소방차 한 대가 대웅전 하나를 온전히 지켜낼 수 있을까? 어림없는 일이다. 얼마나 많은 소방차가 동원되고 인력을 투입했을지 이 요사체는 물론, 대웅전 뒤 솔밭 속 삼성각까지 지켜진 걸로 알 수 있다. |
ⓒ 정덕수 |
▲ 소사나무 바닥의 잔디가 다 그슬리는 화염 속에서 저절로 소사나무가 살아남았을까? 이 나무 한 그루 지키기 위해 보광사는 소방관들에게 어떻게 했을까? |
ⓒ 정덕수 |
우선 대웅전으로 다가섰다. 어디 그슬린 곳은 없나 살폈다. 온전하다. 기단석 아래 잔디가 모두 까맣게 탔는데, 주변 산을 빙 둘러 솔밭이 참혹하게 불길에 탔는데, 이렇게 온전하다니.
혹자는 이렇게 말할 법하다. '보광사는 2019년 4월 4일 밤 강원도산불이 났을 때 주변 솔밭이 다 타버렸어도 부처님의 가피로 이렇게 온전히 지켜졌어'라고 말이다(화재 이후 언론보도에 따르면 산불 직후 보광사 직원들이 강원도 문화재자료 '속초 보광사 현왕도'를 안전한 곳으로 옮긴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이 절의 스님과 신도들도 화재 진압에 동참했다).
하지만 이 절집을 온전히 지켜낸 건 누가 뭐래도 묵묵히 책임을 다한 소방관들이다. 이 진실은 곳곳에서 확인됐다. 선부전은 물론이고 요사체도 온전히 보존됐다. 심지어 대웅전 뒤 솔숲 안 삼성각까지 온전했다. 주변이 모두 탔음에도 말이다(7일 속초시청은 기자와의 통화에서도 "당시 소방 인력과 장비가 투입됐다"라며 "보광사가 숲 가운데 있어 주변 숲에 소방공무원들이 방어선을 치고 진화 작업을 했다"라고 설명했다).
어느 불심 깊은 신도가 보시를 했는지 모르지만 분재로 가꿨을 소사나무 한 그루가 잔디밭에 심어져 여린 잎을 냈는데, 주변 잔디가 불길에 그슬렸음에도 온전히 살아 있었다. 일시적으로 그렇게 보일 수 있겠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니었다. 연초록의 이파리들이 햇살을 받아 윤기까지 났다.
▲ 불에 탄 가건물 보광사에서 불에 탄 건 가건물들뿐이다. 샌드위치패널로 지은 가건물은 신도들에게 시주미나 초와 향을 팔던 용도였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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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불진화반 불에 탄 보광사 숲으로 잔불진화반원들이 들어가고 있다. 적어도 이들에게 장갑 한 켤레, 미세먼지를 차단할 마스크 하나씩이라도 전해줄 도량은 지녔기를 바라면 큰 욕심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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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피해도 있었다. 샌드위치패널로 지은 가건물과 파이프에 비닐 덮어 창고로 사용했음직한 가건물은 완전히 탔다.
보광사는 이 정도의 피해를 입었을 뿐이다. 이곳을 더 둘러볼 일은 없겠다 생각했다. 조금 전 젊은 공무원으로 보이는 이들이 물통과 괭이와 삽 등 연장을 챙겨 잔불정리를 위해 올라간 솔숲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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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비슷한 기사가 정덕수의 블로그 ‘한사의 문화마을’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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