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눕터뷰]'배 목수를 아시나요?', 3대째 속초서 배 만드는 최윤성 씨

장진영 2019. 4. 7.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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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속초의 자연이 만든 방파제 청초호에는 60여년이 넘는 시간 동안 칠성조선소가 자리하고 있다. 실향민 최칠봉 씨(73년 작고)가 1952년에 세웠다. 6·25 전쟁 당시 부산까지 피란을 갔던 최 씨는 고향 가는 길목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있고 싶어 속초에 터를 잡았다. 청초호 일부를 메꿔 그 위에 조선소를 세우고 목선을 만들었다. 당시 ‘속초’ 하면 ‘오징어’가 먼저 떠오를 정도로 수산업이 호황이었다. 속초에서 잡힌 명태, 도루묵, 꽁치 등도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속초에만 12개의 조선소가 있었을 정도로 조선업이 흥했던 시절이었다. “동네 개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고 할 정도였다.

최윤성 대표가 직접 만든 배, 공구들과 함께 조선소 앞마당에 누웠다. 오른쪽 위는 카누 'Grebe16', 왼쪽은 완성전 상태의 써프보드. 아래 위치한 공구들은 오른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클램프, 대패, 글, 직각자, 드릴, 망치,톱, 끌. 장진영 기자
이후 그의 아들 최승호(65) 씨가 운영을 이어나갔다. 90년대 초반에 합성 소재 FRP가 보급되면서 목선은 사양산업이 됐다. 칠성조선소는 철선 제작과 수리조선소로 명맥을 이어나갔다.
1952년에 세워진 칠성조선소는 지난해 문화공간으로 변신했다. 사무동으로 쓰던 건물은 휴게공간으로, 협력사 협성기계가 있던 자리에는 전시공간으로 쓰인다. 장진영 기자
칠성조선소는 청초호를 메꿔 지어졌다. 아래 보이는것은 배가 들어오고 나가던 '철까치'. 배를 세워두고 수리하던 장소였다. 장진영 기자
제재소가 있던 자리는 나무 놀이터가 되었다. 장진영 기자

현재 칠성조선소는 손자 최윤성(37) 씨가 물려받아 운영 중이다. 어느덧 3대째다. 윤성씨는 작가의 길을 걷다가 운명처럼 다시 돌아왔다. “여섯살 때부터 이곳에서 살았어요. 집도 조선소 안에 있었죠” 배의 모습을 항상 보고 살았어도 자신이 배를 만드는 사람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배는 생업이잖아요. 위험하고 돈도 잘 못 벌고. 즐거운 환경이 아니었죠”
최윤성 대표가 칠성조선소에서 평생을 배 목수로 일한 전용원 목수와 함께 재현한 목선. 실제 크기의 1/2 스케일로 제작되었다. 장진영 기자

그는 서울로 상경해 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했다. “작가가 되고 싶었어요. '내가 뭘 해야 하지?'라는 고민이 많았죠. 기억에 대한 작업을 주로 했는데 나무 쓰레기들을 주워와 배를 만들기도 했어요. 이상하게 배에 대해 작업을 하게 되더라고요.” 작업이 진행될수록 그의 결심은 굳어져만 갔다.
칠성조선소내에 있던 협력사 협성기계는 내부 공간을 그대로 두고 전시공간이 되었다. 장진영 기자
최 대표가 미국에서 공부하며 처음으로 만든 배. [사진 최윤성]

“배 목수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길로 미국으로 건너가 메인주에 위치한 랜딩보츠빌딩스쿨에서 본격적으로 목선을 배우기 시작했다. “목선, 디자인, 복합소재에 대해 배웠어요. 배의 디자인부터 직접 만들어 판매까지 하는 과정이었죠.” 학교에 다니면서 그의 결심은 더 단단해졌다. “3년 동안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배를 만들었어요. 한번은 손가락에 엄청나게 큰 가시가 박혀서 혼자 낑낑대며 가시를 빼내는데 막 웃음이 나는 거예요. 고통스러웠지만 한편으론 이제 제 자신이 왠지 진짜로 배 만드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아서요. 그때 깨달았어요. 이 뿌듯함을 평생 느끼며 살고 싶다고요”
칠성조선소를 운영하던 가족이 살던 주택은 지금은 카페가 되었다. 장진영 기자

공부를 마치고 지난 2013년 속초로 돌아와 아버지의 일을 돕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제게 조선소는 놀이터였어요. 배를 육지로 끌어올리는 모습을 보며 자란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이곳에서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한 것들을 경험하며 자랐죠. 집에서 문만 열면 배 만드는 모습이 보였어요. 냄새도 선명하게 기억나고요. 칠성조선소가 아니었다면 배 만드는 걸 시작도 안 했을 거에요”

최윤성 대표가 전용원 배 목수와 함께 만든 목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조선소 운영은 어려운 일이었다. “과거의 영광에 의존해 조선소를 운영하긴 힘들었어요. 예전처럼 꽝꽝거리며 배를 만드는 망치질 소리가 가득하지 않았죠” 주로 만들던 작업선이나 소형 페리의 수요가 점점 줄어들어 갔다. 그는 칠성조선소 안에 카약과 카누를 주로 만드는 ‘와이크래프트보츠’를 런칭했다. “당시 우리나라 수상 레저 스포츠 중에서 그나마 고급 시장이 활발한 분야가 카누와 카약이었어요. 맞춤형 배를 만들었죠” 배 길이와 무게를 줄여 일반인들의 진입 문턱을 낮추게끔 시도했다. 그는 아내에게도 배 만드는 기술을 가르쳤다. 부부가 함께 ‘Nuh Wa Na’라는 이름의 콤포지트(복합소재) 보트를 만들기도 했다.
최윤성 대표와 아내 백은정씨. 장진영 기자

아내와 함께 만든 콤포지트 보트 ‘Nuh Wa Na’. [사진 최윤성]
그러나 그의 배는 잘 팔리지 않았다. “개인 배를 갖는다는 건 시기상조인 거 같아요. 판로도 쉽지 않고요” 부모님은 조선소를 정리하자고 했지만, 그는 지키고 싶었다. “배 만드는 일을 계속하려면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만 했어요” 칠성조선소는 지난해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칠성조선소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다. 옛 건물의 정취를 살리면서 새로운 공간이 들어섰다. 사무실은 기록 전시관으로, 가족들이 살던 집은 식음료를 즐기는 카페로 변신했다. 나무를 자르고 켜던 제재소는 나무 놀이터가 됐다.
최 대표의 꿈은 "아들과 함께 배를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장진영 기자
와이크래프트에서 만드는 맞춤형 개인배. 위쪽이 카누, 아래쪽이 카약. [사진 최윤성]

조선소에 대한 기록 작업도 시작했다. “지금의 속초는 멋진 가게들과 관광객들로 북적대죠. 그런데 곳곳에 과거의 흔적이 남아있어요. ‘조선소’와 ‘배 목수’가 그것이죠. 이 두 가지는 속초가 관광지가 아닌 수산업의 도시였음을 알려줍니다” 오래된 항해일지와 선박 도면 등을 모았다. 도면 중에는 나무 합판 위에 그려진 것도 있었다. 그리고 배 목수들을 찾아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구부러진 나무를 찾아다니고, 금강송같이 옹이 있는 걸 안 깨뜨린 채 틀어 붙여 배를 만들고, 목선 틈새에 창호지를 넣어 젖어 있으면 돈을 받지 않았다는 배 목수들의 이야기를 기록했어요” 그 결과 칠성조선소에서 평생을 일한 양태인, 전용원 목수의 기록을 담은 책 ‘나는 속초의 배 목수입니다’를 출간하기도 했다.
칠성조선소에서 만든 목선 위 선원들의 모습. 촬영시기는 1960년대로 추정된다. [사진 최윤성'
1980년대 목선을 만들고 있는 모습. [사진 최윤성]

그는 꿈은 아들과 함께 배를 만드는 것이다. “8살 된 아들과 가끔 영랑호에 가서 카누를 타요. 배를 놀이로써 즐겼으면 해요. 크지 않은 아담한 배를 아들과 함께 만들고 싶어요. 다행히 배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사진·글·동영상 장진영 기자 artjang@joongang.co.kr

■ 눕터뷰

「 '누워서 하는 인터뷰'의 줄임말로, 인물과 그가 소유한 장비 등을 함께 보여주는 새로운 형식의 인터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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