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민망한 산불 대응 자화자찬..야간용 헬기부터 구비하라

2019. 4. 8.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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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불 나면 반짝 관심 갖다가 위험 잊어
'야간 속수무책' 상황 바꿀 방법 찾아야

큰 산불은 주로 강원도에서 난다. 대개 극도로 건조하고 바람이 센 봄철에 발생한다. 양양과 간성 사이에서 부는 국지적 강풍 ‘양간지풍(讓杆之風)’이 불씨를 키워 사방으로 날린다. 2005년 양양 산불은 낙산사를 태웠고, 2000년 동해안 산불은 서울 여의도 면적의 열 배 크기 산림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둘 다 지난 4일에 발생해 하루 반 동안 이어진 고성·강릉·속초 산불과 마찬가지로 모두 4월 초에 일어났다.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한, 속수무책 상황을 피할 수 있는 재난이라는 이야기다.

2000년, 2005년, 그리고 이번 산불에서 공통으로 나타난 현상이 있다. 야간에는 사실상 진화 작업이 중단된다는 점이다. 소방 인력이 대규모로 투입되지만, 불길이 도로나 민가로 번지는 것을 막는 역할 정도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소방청이 보유한 살수차로는 국지적 대응만 가능해 실질적 진화 작업은 엄두를 내지 못한다. 바람이 잦아들기를 기도하다 날이 밝은 뒤에야 헬기를 동원한 본격 진화 작업에 들어간다. 14년 전, 19년 전에도 똑같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심야에 “가용 가능한 모든 인력과 장비를 투입하라”고 긴급 지시를 내렸는데, 현장에서는 공허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장비가 없기 때문이다. 미국 등에서 사용하는, 야간에 투입할 수 있는 대형 소방용 헬기가 없다. 산불용 진화차도 없다. 지난해 처음으로 야간에 띄울 수 있는 소방 헬기가 한 대 구비됐다. 그런데 이 헬기는 크기가 작아 강풍이 불 때는 비행하기 힘들다. 강원소방본부가 지난해 국회에 바람이 센 날도 야간에 투입할 수 있는 대형 헬기를 사게 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예산 배정을 받지 못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250억원짜리 야간 투입 가능 헬기 도입은 무산됐다.

산악지대에 특화된 진화차도 돈 문제에 막혔다. 독일산인 이 차량은 대당 약 10억원으로 3000ℓ짜리 물탱크를 갖추고 있다. 한국처럼 산이 많은 곳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장비인데도 전국에 한 대도 없다. 강원소방본부가 두 대를 사려 했는데, 국회에서 예산 처리가 미뤄져 한 대도 장만하지 못했다. 하늘에서 투척해 산불을 끄는 ‘소화탄’이 개발돼 지난해 3월에 시연까지 진행됐지만, ‘실전’ 투입이 준비되지는 않았다. 됐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야간에 사용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산불은 대개 강풍이 부는 날 발생하는데, 그런 날 밤에 소화탄을 싣고 나를 수 있는 헬기가 없기 때문이다.

최문순 강원도지사는 5일 방송 인터뷰에서 “산불이 나면 즉시 가서 진압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었는데, 헬리콥터를 하나 사 달라, 이걸 계속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강원도청은 중앙정부나 국회 탓을 하기에 앞서 지방 예산을 활용하는 적극성을 보이기 바란다. 중앙정부는 특별재난지역 지정, 추경 배정 등의 후속 대책에 호들갑을 떨지 말고 수십조원의 퍼주기식 예산 중 일부를 떼 야간 소방 헬기 등의 필수 장비 구입에 투입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다행히도 산불이 하루 반 만에 꺼지자 여권은 청와대와 총리실의 기민한 대응을 자랑했고, 자유한국당은 황교안 대표의 현장 방문을 칭찬했다. 필요한 대응책을 진지하게 말하는 정치인과 관료는 찾기 힘들다. 소 잃고 외양간도 안 고치는 이런 현실이 계속 이어진다면 화마는 언제든 우리 삶의 터전을 다시 위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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