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들 아버지는 뭐했나' 손혜원 "나경원 의원한테 한 말"
[YTN 라디오 ‘이동형의 뉴스 정면승부’]
■ 방송 : FM 94.5 (18:10~20:00)
■ 방송일 : 2019년 4월 9일 (화요일)
■ 대담 : 손혜원 무소속 의원, 전우용 역사학자
‘니들 아버지는 뭐했나’ 손혜원 “나경원 의원한테 한 말”
◇ 앵커 이동형(이하 이동형)> 저희 프로그램에서도 여러 차례 얘기한 바 있습니다만, 약산 김원봉 같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에 대한 재평가 문제.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한 올해, 우리사회의 뜨거운 논쟁거리죠. 보수 진영은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 운동을 폭넓게 인정하고 포상하는 데 분명한 반대 입장이고요. 이 문제의 연장선에서 손혜원 의원 부친의 독립유공자 선정을 두고도 야당은 계속해서 문제 삼고 있습니다. 특혜를 받았다, 남파 간첩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실정이죠. 오늘 3부에서는 이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뤄보고자 합니다. 무소속 손혜원 의원, 역사학자 전우용 교수 모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 손혜원 무소속 의원(이하 손혜원)> 네, 안녕하십니까.
◆ 전우용 역사학자(이하 전우용)> 안녕하세요.
◇ 이동형> 오늘 두 분을 함께 모신 것은 광복 후 좌익 활동 경력이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서훈 문제, 이 이야기를 해볼 텐데요. 그전에 오늘이 4월 9일이니까 이틀 남았습니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역사학자가 보기에 이 100주년,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 전우용> 굉장히 큰 의미가 있죠. 식민지 민족들이 1차 대전 종전 이후에 모두 독립을 기대했겠습니다만, 가장 먼저 정의와 인도를 내세워 종전을 선언하고, 국가 건립을 선언한 날이기 때문에 이것은 세계사적으로 제국주의 체제의 종말에 대한 예고탄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는 점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 이동형> 그런데 우리 사회가 언제부터인가 논란이 있습니다. 1948년이 건국절이 아니냐 이런 논란이죠. 어떻게 보세요?
◆ 전우용> 헌법 정신을 부정하는 거죠.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습니다. 제헌헌법 당시에 이렇게 썼어요.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이렇게 써 있기 때문에요. 그리고 그 헌법의 전문은 5공 헌법을 빼고는 여태까지, 유신헌법조차도 그 이야기를 반복해왔어요. 그것은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헌법 위반이죠.
◇ 이동형> 이승만 정권에서도 관보 1호로 1919년을 정부 수립일로 봤으니까요. 더 이상 할 필요가 없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본격적으로 우리 얘기에 들어가서요. 광복 50주년이 되던 1952년 김영삼 정권 때 이동휘 선생의 서훈을 시작으로 사회주의 사상가들의 포상이 점차 확대돼서 요즘에 이 문제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 같은데요. 최근 약산 선생 문제 때문에 포상 기준에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한 사람은 주면 안 되는 것 아니냐, 이 논란 때문에 시끄러웠는데요. 지금 손혜원 부친 논란으로 이게 번진 감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런데 일단 의원님 아버님께서는 독립운동을 한 공적은 인정이 되는 거죠?
◆ 손혜원> 그 공적이라는 것이 수형 기록으로 하는 것 아닙니까? 저희 아버지가 40년과 41년 사이에 1년 6개월을 서대문 형무소에 살았다는 것은 기록으로 나오고, 그것으로 기반해서 그동안은 신청을 하셨던 것이고요. 지금은 우리 아버지 독립운동의 기록이나 내용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와서 참 어이가 없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독립운동 서훈을 6번 동안 못 받은 이유는 아버지의 해방 이후의 행적이 불명하다는 얘기가 나와요. 거절 사유를 보면요. 그 4번은 아버지 살아계실 때 했는데, 옆에서 큰오빠가 도왔더라고요. 돌아가신 후에도 2번이나 큰오빠가 했다고 하고요. 제가 2017년 4월에 됐고, 6월부터 국회의원이 됐지만, 2017년 8월 15일에 대통령이 취임하고 나서 한 100일 조금 안 됐을 때 8.15 경축사에 하신 얘기가 있습니다. 그때 저는 그 앞에 앉아있는데, 대통령 하시는 얘기를 듣고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울었어요. 왜 울었냐 하면 국가를 위해서 헌신하신 분들을 끝까지 발굴해내겠다는 얘기를 하세요. 그리고 그분들의 피와 땀이 이룬 대한민국에서 그분들을 따뜻하게 감싸겠다, 보훈의 체계를 바꾸겠다. 그 얘기를 했기 때문에 그때 제 생각에 혹시 아버지가 다시 서훈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될까, 하는 생각을 했고, 그때부터 제가 알아보기 시작했죠.
◇ 이동형> 뒤에 하신 얘기는 다시 한 번 이야기하기도 하고요. 일단 공적은 서대문 형무소 수형 기록, 재판에서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실제로 복역한 기간은 2년 3개월이었죠. 지금 자유한국당에서 손혜원 부친의 서훈에 대해서 반대하는 이유는 결국은 사회주의 운동한 것 아니냐, 나중에는 간첩 활동도 했다, 이런 주장이거든요? 전 교수는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전우용> 일단 한국군에 방첩대가 만들어진 게 1949년 10월이에요. 정부가 수립되고, 군이 창건되고, 그러고 나서야 간첩이 잡는 일이 시작돼요. 달리 말하면 그전에는 간첩을 보내는 일도 없어요. 그러니까 남파 간첩이라고 하는 얘기를 제가 얼핏 들었는데, 1948년 8월 15일 이전에 남파 간첩이 있었는지, 또 실제로 우리가 49년 10월에 만들었기 때문에 그때쯤 되면 있었다고 얘기할 수 있겠지만, 그 이전의 행적을 가지고 남파 간첩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부적절한 것을 넘어서서 간첩이라는 단어가 적국을 위해서 이쪽에 들어와서 정보를 수집하고 전달하는 그런 사람들을 말하는 것 아닙니까? 첫째로 간첩이라고 하면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인식을 해왔냐면, 무조건 잡아야 하는 사람, 신고해야 하는 사람, 죽여야 하는 사람, 그 가족까지도 처벌해야 하는 사람, 한국 사회에서 보면 가장 심한 욕이었어요. 이제까지요. 다들 알고 계시잖아요?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쓰려면 적절하고 충분한 증거가 있어야죠. 방첩대 기록이든, 우리 쪽에서 간첩 활동을 인지했다고 하는 미군정 문서든, 뭔가 근거를 가지고 이야기해야 하는데, 그냥 어떤 사람에게 남파 간첩이다, 또는 간첩이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 자체는 일단 시기적으로도 맞지 않고, 개념 자체가 공격적인 용어를 쓰고 있다는 거죠.
◆ 손혜원> 우리 식구들은 어땠겠어요. 육남매가 이때까지 살아왔는데 연좌제도 한 번 없었어요. 그런데 별안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20년도 지난 뒤에 3월 15일에 나경원 의원이 손혜원 부친의 경우 해방 이후에 남파된 공작원이라고 얘기를 해요. 그리고 똑같은 날 남파된 공작활동을 한 것으로 보고서에 써있다고 하는데, 나경원 의원은 반드시 자기 발언에 대해서 법적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 이동형> 사실 확인 없이 이야기했다, 이런 말씀이고요.
◆ 손혜원> 모르죠. 어디서 확인했는지.
◇ 이동형> 일단은 이것은 확실한 것 같아요. 손혜원 부친께서 사회주의 활동을 한 것은 사실이고, 그리고 몽양 선생의 비서로 있었던 것도 사실인 것 같고, 그래서 그동안 서훈이 안 된 것은 좌익 활동을 했기 때문에 서훈이 안 된 것이지, 간첩 활동을 해서 서훈이 안 된 것은 아니잖아요? 그런 것이죠?
◆ 손혜원> 그것도 해방 이후의 행적이 불명하다, 이 단어 하나로 6번을 거절했거든요.
◇ 이동형> 그런데 좌익 활동을 하셨는데, 지금 손혜원 의원 가족들 주장에 의하면, 나중에 전향을 했다, 그리고 경찰을 도와줬다, 관련된 경찰들이 증언을 한 거죠. 그래서 이것은 문제없다는 건데, 나중에 전향하고 안 하고를 떠나서 전 선생님. 제가 생각할 때는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이념을 가진 것은 어떻게 하면 독립운동을 효과적으로 할 것인가, 이것에 따라서 민족주의자도 되고, 사회주의 계열도 되고, 무정부주의자도 되고 했던 것 같은데, 시간이 60년, 70년, 80년 지나 가지고 당시에는 사회주의 경력이 있으니까 국가 서훈 대상은 안 된다고 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 그 점이 의문스러워요.
◆ 전우용> 꼭 이런 것과 비슷해요. 김유신하고 계백이 서로 싸웠는데, 어떻게 아이들 위인전에 두 사람 다 나올 수 있느냐, 이런 발상이랑 굉장히 흡사하거든요. 독립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독립을 위해 운동한 것이고, 거기에는 좌우 이념이라고 하는 것이 6.25적 분단과 6.25 전쟁과 상호 적대관계를 거친 지금 시점에서 보는 대립하고는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에 독립운동 활동을 한 것 자체를 좌익 계열에서 활동했다고 해서 부정하는 것이 과연 타당하느냐는 질문을 할 수가 있죠. 다만 남북이 분단되어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예컨대 약산에 대한 논란이 있는 것에 대해서 저는 일부 이해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분단 이후에도 남쪽에 남아서, 그와 관련해서 뚜렷한 증거를 가지고 북한의 간첩이었다든가, 이런 증거가 없이 평범하게 살아온 분들에 대해서까지 그런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 이동형> 지금 손용우 선생의 행적을 보면, 1940년 서울에서 일본이 패전할 것이라고 선전 활동을 하고, 동아일보, 조선일보 폐간의 부당성을 성토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다가 체포돼 1년 6개월 선고 받고, 2년 이상 복역을 하게 된 건데요. 당시 시대적 상황을 비춰봤을 때 이런 활동은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전우용> 1936년에 일본에서 2.26 쿠데타가 나고 뒤이어서 조선사상범 보호관찰령이 나면서 사실은 공개적인 독립운동이 전혀 불가능해져요. 아시다시피 38년 수양 동우회 사건, 42년 조선어학회 사건처럼 친목 활동이나 학술 활동조차도 감옥에 갈 정도로 심하게 탄압을 받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독립운동은 주로 학생들에 의해서 일본의 패전을 선전하고, 일본 통치의 부당성, 천황제 지배의 부당성을 폭로하는 형태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여기서 손용우 선생의 독립운동 행적이라고 하는 것은 1940년대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방식이었어요. 가장 일반적이었고요. 그리고 아시다시피 손병희 선생이 3·1운동을 주도한 죄목으로 받은 형량이 3년이에요. 실제로 1년 8개월 복역했고요. 그런데 이 활동으로 1년 6개월의 형을 내리거든요. 얼마나 이런 활동들이 당시 일본 총독부 당국에서, 또 일본 식민통치 집단이 얼마나 신경 써서 대했던 운동 방식인지 알 수 있는 것이죠.
◆ 손혜원> 불과 17살이었어요.
◇ 이동형> 이때 손용우 선생이 17살이었습니까?
◆ 손혜원> 39년에 들어가셨는데. 그런데 여기서 자유한국당이나 이런 분들이 얘기하는 게 47년도에 여운형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아버지가 아주 신혼 때인데,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마포나루에서 배를 타고 북에 올라갔다 오겠다. 그때는 그러면 이게 자유롭게 왔다 갔는지 저는 그게 궁금한데요. 그러고 가셨는데, 한 2주 반 정도 있다가 돌아오셨대요. 그것을 가지고 뭐라고 이야기 하냐면, 교육을 받고 남파됐다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저는 47년도에 드나들었던 북한과 남한의 관계가 어땠는지가 궁금해요.
◆ 전우용> 48년에 남북 분단 정권이 선다는 것이 확실해지는 상황이고요. 46년, 47년까지는 그 문제가 감으로만 잡혀 있던 상황이라서 사실 남북 양쪽에서 많이 오갔을 거예요. 그러니까 북한에서도 많은 청년들이 내려와서 서북청년단도 만들지 않았습니까? 남쪽에서도 일부가 북한에 올라갔다가. 올라갔는데, 46년부터 미군정 기록에 그런 게 굉장히 많이 나와요. 경성제대 학생들이라든가, 경성대학교 학생들이라든가, 연희전문 학생들이라든가, 올라가서 실상을 보고 아니다 싶어서 도로 내려온 사람들이 대부분이거든요. 2주, 3주, 심지어 한두 달씩 내려온 사람들은 대개 일단 그 당시 상황에서는 이동의 자유가 완전히 차단되어 있지 않았던 상황이니까요. 이건 아니다 싶어서 내려온 사람들이 워낙 많기 때문에 그것은 개연성에서 보자면 그런 일종인 것이죠. 누가, 어디서 그런 교육을 시킬 수 있느냐. 그건 가능성이 없는 얘기죠.
◇ 이동형> 공적 포상 바뀐 심사 기준을 보면요. 손혜원 의원의 부친이 북한 정부 수립에 관여하지 않았다만 인정된다면 전혀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요. 다만 자유한국당의 또 다른 의혹 제기는 이런 것 같아요. 손혜원 의원이 보훈처를 직접 방문해서 압력을 가했다.
◆ 손혜원> 간 적은 없고요. 제가 대통령이 했던 보훈의 기준이 완화된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궁금했죠. 자료들을 계속 만들어놓고 보훈처를 가봤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우리 비서가 연락을 했겠죠. 그랬더니 보훈처장께서 자주 국회를 오시니까 국회에 오시는 날 들리겠습니다, 라고 해서 한 번 오신 거예요. 그때 혹시 보훈처에 대통령이 하셨던 말씀들이 지금은 어떻게 준비가 되고 있습니까, 했더니 이런 저런 용역들을 주면서 하고 있습니다, 이게 끝입니다.
◇ 이동형> 그 자체를 특혜라고 하는 것 같은데요?
◆ 손혜원> 제가 특혜라면 몰래 숨어서 했지, 거기서 노출되게, 국회에서 공식적으로 왔을 때 했겠습니까? 억지죠.
◇ 이동형> 이 사건이 조금 안타까운 게 만일 손혜원의 아버지가 아니었어도 논란이 됐을까. 이런 생각은 들거든요? 독립운동한 사실은 명백한데, 그 딸이, 지금은 아니지만, 여당 국회의원이니까 문제가 된다. 이것도 독립운동 자체를 정쟁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드는데요. 교수님은 어떻게 보세요?
◆ 전우용> 계속 이 문제는 과거사 자체가 현재의 이념문제로, 정치적 이슈로 부각된 건데요. 사실 2004년에도 여운형 선생 대한민국장 추서할 때 그런 논란이 있었거든요. 지금도 15년 전의 일인데, 보면 그런 이야기들은 잘 안 나와요. 이를테면 누가 친일파 후손이라서 안 된다는 얘기는 안 하는데, 독립유공자 추서하면 안 된다는 얘기는 간혹 나오고, 이런 문제들이 있었거든요. 우리가 관점을 바꿔서 봐야 할 것 같아요. 독립유공자는 독립유공자 포상을 제대로 안 하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친일파에 대한 단절을 제대로 안 했던 것과 같은 맥락에 있거든요. 같은 맥락에 닿아 있기 때문에 이 문제들에 대해서는 누가 독립유공자의 자격이 있느냐, 이런 문제를 따지려면 친일파 문제에 대해서도 과거 친일, 반민족 행위자 문제에 대해서도 제대로 따져볼 필요가 있지 않겠나 싶습니다.
◇ 이동형> 과거에는 유족들이 자신의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공적을 스스로 찾으러 다녔잖아요? 기록도 뒤져보고 해서 심사 요청을 했는데, 대통령이 정부가 적극적으로 찾아보겠다고 이야기한 뒤에 보훈처가 적극적으로 찾아봅니까?
◆ 전우용> 최근에 굉장히 많은 자료들이 발굴되고, 공개가 됐었죠. 수형기록이라든가, 이런 것이 발굴됐고요. 그 점에 대해서 정부가, 보훈처뿐만 아니라 국가기록원, 국사편찬위원회, 각 관련 기관에서 열심히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발굴이 되겠죠.
◇ 이동형> 아까 나경원 의원 잠깐 이야기했는데, 나경원 의원을 비롯한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계속해서 이 문제 가지고 논란을 삼고 있기 때문에 손혜원 의원이 SNS에 글을 발끈하면서 남긴 것 같아요.
◆ 손혜원> 아버지 관련해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이 얘기는 저하고 관련된 것, 그 목포도 억울하게 투기와 차명의 의혹을 받고 집권남용의 의혹을 받고 있는데, 그것은 제가 검찰 조사와 SBS를 고소했기 때문에 밝혀내면 되는데요. 아버지에 관련해서 아버지가 독립운동했던 것, 맞는 거고요. 그리고 아버지가 북한 정부 수립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을 뻔히 다 알고 있으면서 지금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은 정쟁을 넘어서 인간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 얘기를 썼는데요. 다섯 가지 주제를 말했잖아요. 왜 저를 미워하는지 다섯 가지 이유. 저는 이분들이 제가 무슨 큰 힘이나 있는 것 같이 잘못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를 흔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지, 저를 자꾸 집중적으로 공격하는데, 저는 그런 것이 두렵지는 않습니다. 제가 싸워나가면 되는데, 아버지 관련된 것은 이분들이 법적 책임을 질 만한 그런 일들은 제가 일단은 나서려고 합니다.
◇ 이동형> 당신들 아버지는 그때 뭐하셨나, 이 이야기는 어떤 것을 지칭해서 한 거죠?
◆ 손혜원> 나경원 의원한테 한 거예요.
◇ 이동형> 알겠습니다. 손혜원 의원 부친과 비슷한 여건이나 처지의 놓여있어서 서훈을 받지 못한 분들이 아직 굉장히 많을 것 같거든요?
◆ 전우용> 저도 심사 과정에 들어가 본 적은 없는데요. 주변에서 얘기를 들어보면 그동안은 꽤 이런 문제 때문에 신청을 했다가 기각된 사례들이 많았다고 해요. 워낙 사고적 판단을 한 거죠. 당대에 그분이 얼마나, 어떤 열정으로 나라를 위해서 독립운동을 했는가를 평가해야 하는데, 그 이후에 또 좌익이라는 기준도 굉장히 애매모호해요. 조선공산당원도 아니었고, 예컨대 조금 더 중도적인 입장에서 반북한적이거나, 비북한적 정권 입장에서 활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남로당과 연관되어 있다거나 민주주의 민족전선과 연관되어 있다거나. 게다가 또 그렇게 연관됐던 사람들은 해방 이후, 한국 전쟁 전후로 해서 국민보도 연맹사건으로 대부분 전력 때문에 학살당하거나 또 국내에는 안 남아있거나 월북했거나 납북됐거나 하는 실정이거든요. 국내에는 거의 없어요. 몇 분 안 남아 있을 텐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가 독립유공자로서 제대로 처우를 못 해주고 있는 점. 이것은 함께 반성해야 할 점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 손혜원> 조금 억울한 것은 저희 아버지 같은 경우는 수형 기록이 있잖아요. 그런데 좌익 경력을 가지고 안 된 건데, 반대의 분이 있어요. 굉장히 훌륭한 공적이 있고, 업적이 있는 것은 분명한데, 수형 기록이 없는 분들이 억울하게 안 된 분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이런 여러 가지 사례가 있습니다. 발굴한다고 하셨으니까 끝까지 발굴해주시기를 기대합니다.
◇ 이동형> 사회주의 사상이나 이념을 가지고 독립운동을 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계실 텐데, 그분들이 지금 지하에서 100년이 지나 후손들이 이런 것을 가지고 논쟁하는 것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 전우용> 일단 우리가 북한 체제에 대해서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잖아요?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미리 통일을 해도 괜찮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해요. 실제로 북한에서 서훈을 받았다면 이분은 빼야죠. 이거는 빼야 하는데, 예컨대 약산 선생 같은 경우에는 북한에서 숙청당해서 아무 서훈도 못 받고 존경의 대상이 아니잖아요.
◇ 이동형>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는 상태죠.
◆ 전우용> 그런 분을 여기 우리조차도 버려버린다면, 그런 독립운동가들은 어디서 하소연을 하겠습니까? 유족이 여기 남아있는 것도 아니겠지만. 그런 문제들이 있어서 이제 우리가 이른바 통일의 주역이다, 우리가 중심이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조금 더 넓게 과거사에 대해서도 봐야 할 것 같습니다.
◇ 이동형> 이것은 어떻습니까? 약산 선생에 서훈을 주게 되면, 김일성도 줘야 하는 것 아니냐, 김일성도 어쨌든 항일 투쟁한 경력이 있으니까요.
◆ 전우용> 지금 제가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북한 정권으로부터 배제된 사람들, 북한 혁명열사릉이라든가, 북한에서 애국 열사로 추앙받지 못하고 버려진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요. 이런 분들에 대해서는 우리라도 챙겨야 하지 않겠느냐, 이런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거죠. 김일성과 김원봉의 문제는 전혀 다른 각도의 문제죠.
◇ 이동형> 알겠습니다. 제가 우문을 드려봤습니다. 손혜원 의원님, 어쨌든 지금 이런 논란에 대해서 손혜원 의원을 지지하는 사람도 있고, 여전히 반대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아요. 청취자들도 나뉠 것 같은데, 그분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한 마디 하시죠.
◆ 손혜원> 저는 SBS 오보 사태에 대해서 정말 제 인생에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할 수가 있을까, 참 어이가 없고요. 그러나 제가 꿋꿋하게, 제가 결백하기 때문에 싸워가고 있습니다. 제가 결백을 곧 밝힐 겁니다. 검찰 조사가 빨리 진행됐으면 좋겠고요. 그리고 꿋꿋하게 제가 준비하고 있고, 잘 싸우고 있으니까 끝까지 제 임기 동안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이동형> 두 분 말씀 오늘 고맙습니다. 잘 들었습니다.
◆ 손혜원> 네, 고맙습니다.
◆ 전우용>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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