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조선일보

日, 주한대사관 신축 4년 끌다 돌연 취소

이동휘 기자 입력 2019.04.10. 03:00 수정 2019.04.10. 14:1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o i

번역할 언어 선택
글자 크기 조절 레이어
건축 허가 받은 후 착공 연기하다 "본국 최종 승인 안났다"며 취소
공관 앞 소녀상 등 불만 표출인 듯

일본 정부가 2013년부터 추진해 온 주한(駐韓) 일본대사관 신축을 사실상 포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은 1976년 지은 서울 종로구 중학동 대사관을 2016년 철거했다. 그 자리에 지상 6층, 지하 3층짜리 새 건물을 지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본지 취재 결과, 새 일본대사관 건축 허가는 지난달 취소됐다. 대사관 측이 착공 연장 신청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축을 추진한 지 6년, 2015년 서울 종로구청으로부터 건축 허가를 받은 지 4년 만이다. 종로구청 관계자는 "지난 2월 말 협의 때 일본대사관 측에서 '본국에서 최종 승인이 나지 않아 (건축) 허가 취소를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종로구청은 지난달 4일 일본대사관에 '건축 허가 취소'를 최종 통보했다.

(왼쪽 사진)대사관 부지 앞 소녀상 - 주한 일본대사관 부지 건너편에 있는 '위안부 소녀상'. (오른쪽 사진)텅 비어있는 서울 한복판 주한 日대사관 부지 - 지난 5일 인근 건물에서 내려다본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부지. 철제 펜스로 둘러싸인 땅이 텅 비어 있다. 일본 정부는 2015년 이 자리에 있던 기존 대사관 건물을 철거하고 새 대사관을 지을 계획이었지만 최근까지 공사가 진행되지 않았고 건축 허가는 취소됐다. /오종찬 기자

건축법상 건축 허가를 받으면 1년 안에 공사를 시작해야 한다. 다만 사정이 있으면 착공을 연기할 수 있다.

종로구청은 지난해 일본대사관에 "공사를 시작해 달라"는 공문을 수차례 보냈다. 종로구청은 "착공 연기 사유가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지만, 일본대사관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지난 2월 협의 때 일본 측이 건축 허가를 포기했다는 것이다. 이 땅(2382㎡)은 일본 정부 소유이기 때문에 일본 측이 다시 건축 허가를 신청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도 허가 절차를 마무리하는 데 1년 이상 걸린다. 대사관 부지는 현재 펜스를 두른 채 잡초만 자란 상태로 방치돼 있다.

외교가에서는 일본대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 처리에 관해 한·일 양측이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양국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는 상황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했다. 일본 외무성은 본지의 확인 요청에 "대사관 신설 공사에 대해서는 여러 사정을 감안해 앞으로 검토, 조정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일본 정부가 새 대사관을 짓겠다는 입장을 종로구청에 공식 전달한 것은 2013년 7월이다. 1976년부터 쓰던 지상 5층, 지하 1층짜리 대사관 건물이 비좁았기 때문이다. 대사관 신축·증축은 양국이 동시에 추진하는 경우가 많다. 앞서 일본 도쿄의 주일(駐日) 한국대사관도 2013년 새 대사관 건물을 지어 입주했다.

일본 정부는 새 일본대사관을 2019년, 늦어도 2020년까지 완공할 계획이었다. 새 대사관 건물(1만1116㎡)은 연면적 기준으로 기존 대사관(3604㎡)의 3배 규모다. 대사관 직원들은 철거 공사를 위해 2015년 7월 근처 빌딩에 마련된 임시 대사관으로 이사했다. 2016년 1월 건설 현장에서 조선시대 유물이 나와 그해 4월 유물 발굴과 철거를 마무리했다. 하지만 새 대사관 착공은 미뤄졌다.

일본대사관 측은 대사관 건물 착공이 미뤄지는 이유나 신축 계획을 포기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일본 외무성은 본지 문의에 "(건축) 허가 취소 등에 대해서는 사실관계를 포함해 논평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일본대사관이 5년째 상업 빌딩에 세들어 살고, 새 대사관 신축이 사실상 중단된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는 게 전직 외교관,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일본 정부는 임시 대사관 사무실 임차료와 관리비로 매달 3억원, 연간 36억원 이상을 내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사관 신축이 1년 미뤄질 때마다 수십억원의 손해를 보게 되는 셈이다. 건축 허가가 취소되면서 심의비 등 행정 비용도 날렸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 정부 소유인 시세 1500억원짜리 대사관 부지도 놀리고 있다.

한 일본 전문가는 "해외에 있는 일본 정부의 주요 공관이 몇 년째 빌딩에 세들어 산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출입자 통제, 보안 등에서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있어 통상 큰 외교공관은 상업 빌딩에 더부살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중국·일본·러시아 등 한반도 주변 4강(强) 국가 중 현재 자체 대사관 건물이 없는 국가도 일본이 유일하다.

이 때문에 "한·일 관계가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직후 상황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당시 일본대사관은 현재의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 자리에 있던 반도호텔 5층에 세들어 있었다.

외교가에서는 악화된 한·일 관계가 새 대사관 신축에 영향을 줬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주장하며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집회를 열어온 '정의기억연대'는 2011년 12월 일본대사관 앞에 '위안부 소녀상'을 설치했다. 일본 정부는 "각국 정부는 외국 공관의 안녕과 품위를 유지할 책임이 있다"는 '빈 협약'을 근거로 한국 정부에 소녀상을 철거하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소녀상이 들어선 이후에도 2016년 초까지는 대사관 신축이 추진됐다. 한·일 양국 정부는 2015년 12월 일본이 정부 예산으로 재단을 세워 위안부 피해자를 위한 치유 사업을 하고, 한국은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문제를 적절하게 해결한다는 내용의 '한·일 위안부 합의'를 발표했다.

정권 교체에 따라 상황은 달라졌다. 야당 대표 시절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해 "10억엔에 혼(魂)을 팔았다"고 비판했던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취임하고, 2018년 11월 21일 정부는 한·일 합의로 설립됐던 '화해·치유재단'을 해산했다. 이보다 20여일 전에는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일본 기업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대법원이 피해자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일본 정부는 "이 문제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 의해서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며 반발했다.

시민단체들이 2017년부터 일본대사관 앞에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설치하려고 하는 것도 일본 정부가 현재 위치에 대사관 신축을 하는 데 부담을 느끼는 이유라는 분석도 나온다. 한 일본 외교 소식통은 "일본 외무성이나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 입장에선 서울 일본대사관 앞에 위안부 소녀상과 강제징용 노동자상이 서 있는 장면을 두고 보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포토&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