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임신하자 잠적한 남자 무죄, 혼자 낙태한 여자는 유죄

박사라 2019. 4. 10.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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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로에 선 낙태죄] 5년 간 판결 모아보니

20대 여성 안모씨는 지난 2012년 뱃속의 태아를 낙태한 죄로 재판에 넘겨졌다. 그를 고소한 건 남자친구인 이모(30)씨였다. 검찰 조사 결과 드러난 사정은 이랬다. 두 사람은 결혼을 약속하고 같이 살다 사이가 틀어졌다. 안씨는 “이씨가 경제 활동도 하지 않고 급기야 폭력까지 휘둘러 아이를 키울 수 없었다”고 진술했다. 두 사람은 ‘아이는 동의하에 병원 가서 유산한다’는 내용의 각서까지 작성했고, 다음날 안씨는 병원에서 낙태 수술을 받았다.

'POLICING PREGNANCY: WHO SHOULD BE A MOTHER?' 컨퍼런스 포스터 이미지. 사진은 기사 사례와 관련이 없음.

이후 이씨는 돌연 태도를 바꿔 안씨를 낙태죄로 고소했다. 그는 수술 사흘 뒤 낙태 동의를 철회한다는 내용 증명을 보내며 “자신은 낙태에 반대했었다”고 주장했다. 검찰은 결혼 자금 문제로 다툼이 생기자 이씨가 낙태 사실을 악용했다고 보고, 이씨를 낙태 방조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하지만 안씨만 벌금 200만원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이씨가 낙태 이전에 동의를 철회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며 이씨에 대해선 무죄를 선고했다. 수술 전 보호자 동의란에 안씨 아버지가 사인한 점과 이씨가 수술 직후 고소한 점 등을 이유로 들었다. 검찰 측은 “여성이 폭력을 피해 급하게 집을 나오느라 아버지 사인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며 항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우리 형법은 낙태한 여성(269조)과 이를 도운 의사(270조·낙태촉탁) 모두를 처벌토록 했다. 낙태를 방조하거나 교사한 남성도 처벌 대상이다. 실제로는 어떻게 처벌이 이뤄지고 있을까. 중앙일보가 최근 5년(2014~2018) 간 선고된 낙태죄 관련 공개 판결문 71개(39건)를 분석한 결과 남녀가 나란히 법정에 선 경우는 드물었다. 상당수의 여성은 남성과 이혼하거나 결별해 홀로 낙태를 감행했다가 처벌받았다. 2017년 남편과 이혼해 홀로 아이를 키울 처지가 되자 낙태한 오모씨는 벌금 100만원을, 같은 이유로 아이를 낙태한 이모씨는 선고유예를 선고받았다.


보복으로 시작해 한쪽만 처벌받는 낙태죄
그래픽=심정보 shim.jeongbo@joongang.co.kr

남성이 보복 목적으로 여성을 고소한 사례도 있었다. 장모(20)씨는 2016년 교제하던 여자친구와 헤어지자 그를 낙태죄로 고발했다. 결국 여자친구는 선고유예형을, 장씨도 낙태 공범으로 징역 10월(사기죄와 결합)을 선고받고 전과자가 됐다. 재판에서 장씨는 “일해서 번 돈을 낙태 비용으로 날리자 화가 나 고발했다”고 진술했다. 수술한 의사에게 합의금 명목으로 600만원을 뜯어내 재판부가 “자해공갈단이냐”며 그를 꾸짖기도 했다.

낙태를 도운 남성 8명도 처벌받았으나 그 수는 여성(14명)에 비해 적었다. 남성은 명시적으로 낙태에 동의했다는 게 입증되어야 처벌이 가능해, 보호자란에 사인하지 않으면 책임을 피해갈 여지가 생긴다. 피고인 64명 중 낙태를 도운 의사와 조무사 등(36명)이 가장 처벌을 많이 받았고, 낙태한 여성이 그 다음이었다. 여성에게 낙태를 강요한 남성의 가족(3명)도 처벌을 받았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아이 아버지가 임신 사실을 알고 잠적하면 혼자 낙태한 여성만 처벌받는 구조”라며 “임신과 출산은 남녀 당사자 모두의 문제인데 현행 낙태죄는 여성의 몸만 규제 대상으로 하고 있어 상대방은 빠져나갈 구멍이 많다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죄질 가볍지 않지만 실형은…" 재판부도 고민
낙태죄가 이미 사문화(死文化) 됐다는 비판도 나온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지난 5년간 낙태죄로 기소된 사람은 평균 13명에 불과했다. 검찰에 입건되는 건수 자체가 2016년 이후부터 100건 이하로 뚝 떨어졌기 때문이다. 연간 이뤄지는 낙태 추정 건수가 5만 건(2017년 기준)에 이르는 데 비하면 대다수는 법망을 피해간다는 의미다. 이한본 변호사(민변 여성인권위원회 부위원장)는 “낙태죄는 단속으로 적발되지 않기 때문에 현실에서 법원까지 오는 사례는 대부분 남성이 보복하거나 병원이 보복 고발 당하는 경우 두 가지”라며 “태아의 생명을 보호한다는 낙태죄의 입법 취지와는 상관없이 보복에 의한 처벌이 이뤄지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그래픽=심정보 shim.jeongbo@joongang.co.kr

검찰이 기소해도 재판에서 실형을 받는 사례는 사실상 거의 전무했다. 지난 5년간 낙태와 관련해 법정에 선 피고인들 64명은 대부분 선고유예(32명)나 집행유예(21명)를 받았고, 일부는 벌금형(8명)을 받았다. 실형은 사기죄나 성매매 알선 등 다른 범죄와 결합해 징역형이 나온 경우(2명)를 제외하고는 없었다. 대부분의 판결문에 들어간 “낙태의 죄질이 결코 가볍다고 할 수 없지만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 또한 결코 가볍게 볼 수는 없어 양형을 참작할 필요가 있다”는 문구는 낙태를 단죄하기 어려운 재판부의 고민을 보여준다.


8개월된 태아도…"음성적일수록 무분별하게 이뤄져"
강간 등 특수한 경우라도 임신 중기(24주 이내)에만 낙태를 허용하는 모자보건법 규정도 실제로는 지켜지지 않았다. 2015년 이혼을 이유로 임신 8개월째인 태아(32주)를 낙태한 산모와 남편, 의사는 모두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낙태 도중 산모가 다치거나 사망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의사 이모씨는 임신 23주차인 10대 소녀에 대해 낙태 수술을 하다 쇼크사에 이르게 했지만 2016년 1월 집행유예 형이 확정됐다. 피해자가 먼저 낙태를 요청했으므로 의사로선 어쩔 수 없었다는 이유였다. 낙태 수술 중 수액을 과다 투여해 산모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의사 이모씨도 유족과 합의했다는 이유로 집행유예 형을 받았다.

한상희 교수는 “낙태가 음성적으로 무분별하게 이뤄지는 상황에서 산모는 고비용·고위험의 수술을 감수하는 부담을 지게 된다”며“차라리 국가가 의료 보험으로 일정 부분 낙태를 지원하며 관리 감독할 필요성도 있다”고 밝혔다. 이런 상황에서 오는 11일 낙태죄에 대한 위헌 여부를 결정하게 된 헌법재판소의 고민은 더욱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한본 변호사는 “태아의 생명 보호 의무는 여성만이 아닌 국가가 함께 지어야 할 의무”라며 “헌재에서 태아가 과연 생명이 맞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부터, 이를 형벌로 다스릴 수 있는지까지 깊게 고민해 위헌 여부를 결정해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사라ㆍ이수정 기자 park.sar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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