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 성류굴에서 화랑 승려 등이 '다녀간다'며 남긴 낙서 발견됐다
[경향신문]
“798년(원성왕 14년) 8월 25일 범렴 스님, 왔다간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은 자신의 자취를 남기고 싶어하는 본능은 어찌 할 수 없는 모양이다. 경북 울진 성류굴에서 삼국~통일신라~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나 성류굴을 방문했음’을 알리는 각석 명문이 30여개 발견됐다.
문화재청은 지난 3월21일 천연기념물(제155호)인 성류굴 내부 종합정비계획 수립을 위해 굴(주굴 470m)에 들어간 울진군 관계자들은 입구에서 230m 안쪽에 있는 여러개의 종유석과 암벽 등에 새겨진 명문을 확인했다고 11일 밝혔다. 동굴 안에서 명문이 발견된 사례는 국내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울진군의 첫 발견 이후 문화재청 등 관계 전문가들이 세차례 추가 조사를 나가 다양한 시기, 다양한 관직과 이름의 명문을 찾아냈다. 우선 종유석 등에는 ‘정원 14년(貞元 十四年)’이라고 새겨진 명문 3개를 포함해 구체적인 시기를 알 수 있는 명문 여러 개와 ‘임랑(林郞)’, ‘소(우·牛)’ 등 다수의 화랑 이름들이 새겨져 있었다.
또 ‘신유년(辛酉年)’과 ‘경진년(庚辰年)’명 등 간지(干支), 통일신라 시대 관직명인 ‘병부사(兵府史)’, 화랑 이름인 ‘공랑(共郞)’, 승려 이름 ‘범렴(梵廉)’, 조선 시대 울진 현령인 ‘이복연(李復淵)’ 등이 보였다.
이중 ‘신유년’명과 ‘경진년’과 같은 간지 연대 명문은 국보 제147호 ‘울산 천전리 각석’에 새겨진 ‘을사년(서기 525년·신라)’명과 비슷한 시대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외에도 통일신라시대인 서기 798년에 새긴 ‘정원 14년(貞元 十四年)’ 명과 조선시대 관직 및 이름 등이 발견됨에 따라 성류굴에서는 삼국~통일신라에 이어 조선시대까지 사람들이 오래도록 글자들을 새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명문은 석주, 석순, 암벽 등에 오목새김(음각) 되어 있었다. 글자 크기는 다양하며, 대부분 해서체(楷書體·자형이 똑바른 한자 서체)로 쓰였으나, 행서(行書, 약간 흘려 쓴 한자 서체)도 일부 가미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정확한 방문 시기와 방문자가 표시됐다는 것이 학술적인 가치를 더한다.
‘정원십사년 무인팔월이십오일 범렴행(貞元十四年 戊寅八月卄五日 梵廉行·정원 14년 8월 25일 범렴이 왔다 간다)’ 등에서 보이는 ‘정원’은 중국 당나라 9대 황제 덕종의 연호(정원·785~805)이다. 따라서 동굴 방문 시기는 ‘정원 14년’, 즉 서기 798년(신라 원성왕 14년)이다. 또 화랑 이름인 ‘공랑(共郞)’, 승려 이름 ‘범렴(梵廉)’ 등 방문자가 새겨졌다. 이로 미루어 성류굴은 화랑이나 승려 등이 찾아오는 유명한 명승지였으며, 수련장소로도 활용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또하나 발견된 명문에서 보이는 ‘장천(長川)’은 고려 말 문인 학자인 이곡(1298~1351)의 기행문인 <동유기>에서 처음 보이는 용어이다. 그동안에는 ‘긴 하천’으로 해석해 왔었는데, 이번 성류굴에서 ‘장천(長川)’명이 발견되면서, 울진에 있는 하천인 ‘왕피천’의 옛 이름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이 발견된 다양한 명문들이 신라의 화랑제도와 신라 정치 및 사회사 연구 등을 위한 중요한 사료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면서 “각석 명문의 실측과 탁본, 기록화 작업 등 전반적인 학술조사와 함께, 동굴 내 다른 각석 명문에 대한 연차별 정밀 학술 조사와 연구를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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