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훈의 시사본부] 김원봉 유족 "삼촌은 이념떠나 '독립'만 생각한 분"

KBS 2019. 4. 11.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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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산 김원봉, 임시정부 마지막 군무부장(국방부 장관) 맡으시고 해방 후 귀국
- 일제에 한번도 잡힌 적 없는 분이 친일경찰 노덕술에게 체포되어 온갖 수모 당해
- 김원봉 월북 이유? 여운형·김구 암살에 위협 느꼈고, 친일파 득세에 갈 곳 없어졌어
- 정작 북한에서도 ‘장개석과 연결된 국제간첩’ 누명 씌워 옥중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
- 유족들 지속적인 고문·취조 당했어... ‘빨갱이’ 딱지로 사시 패스해도 임용취소당해
- 나 역시 고아원서 6년간 자라기도... 어릴 적에는 삼촌(김원봉) 굉장히 원망스러웠어
- 남의 땅(중국)에서 독립운동하려면 국민당·공산당 가리지 않고 도움 받았어야...
- 당시 상황 모르는 ‘빨갱이 프레임’ 억울해... 약산과 의열단 정신 기리는 한해 됐으면

■ 프로그램명 : 오태훈의 시사본부
■ 코너명 :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획 인터뷰
■ 방송시간 : 4월 11일(목요일) 12:20~14:00 KBS 1라디오
■ 출연자 : 김태영 씨(약산 김원봉 외조카)


▷ 오태훈 : 항일 무장 투쟁의 선봉에 선 독립 운동가 또 일부에서는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한 사회주의자로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약산 김원봉 선생에 대한 평가가 최근 다양하게 나오고 있는데요. 또 김원봉 선생에 대해서 서훈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논쟁이 치열한 상황입니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맞아서 저희가 어렵게 연결을 했습니다. 김원봉 선생의 조카 김태영 씨 연결해서 말씀을 좀 나눠보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 김태영 : 예, 안녕하세요? 김태영입니다.

▷ 오태훈 : 어머니께서 김원봉 선생의 막냇동생이셨다면서요?

▶ 김태영 : 예, 맞습니다.

▷ 오태훈 : 그러면 외조카시네요?

▶ 김태영 : 예, 외조카입니다.

▷ 오태훈 : 외삼촌인 김원봉 선생의 행적을 꽤 오랫동안 김태영 씨께서 조사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중국에도 여러 번 다녀오셨다고 들었는데 좀 소개해 주시죠.

▶ 김태영 : 예, 제가 20대 중반에 미국을 오게 됐는데... 그런데 그 전부터 10대 말부터 관련된 책이 별로 많지는 않았어요, 그 당시에. 그런데 많이 읽었고 관심을 좀 많이 두게 됐어요. 그러고 난 뒤에 미국 와서 생활이 좀 향상이 되고 안정적으로 되다 보니까 그후부터 중국을 많이 다녔죠.

▷ 오태훈 : 김원봉 선생이 1990년대까지만 해도 많은 분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분이셨습니다. 최근에 와서야 새롭게 조명이 되고 있는 독립 운동가신데요. 김원봉 선생께서 의열단을 조직하셨잖아요.

▶ 김태영 : 3.1혁명이죠. 3.1혁명이 일어났을 때는 조선의 백성들이 비폭력으로 3.1혁명을 하셨죠. 그런데 그 비폭력으로 하다 보니까 일제가 무참히 총칼로 학살을 하는 겁니다. 약산이 21살의 젊은이였는데 이래서는 우리가 절대 해방을 이룰 수가 없다. 그래서 조직한 단체가 의열단입니다. 의열단이 지향하는 목표는 파괴, 암살 좀 폭력적인 행동을 한다, 이렇게 얘기를 할 수 있죠.

▷ 오태훈 : 의열단에서 무장 투쟁을 말씀해 주셨는데 제가 좀 보충으로 말씀드리면 1935년에 민족혁명당 조직하셨고 또 이후에 중국 국민당과도 손을 잡고 항일 무장 투쟁 계속 벌여주셨습니다. 오늘이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되는 날인데 김원봉 선생님이 임시정부에서도 요직을 맡아서 활동하신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말씀해 주시죠.

▶ 김태영 : 지금으로 얘기를 하자면 진보와 보수의 통합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진보와 보수의 통합을 이루어서 임정에 있는 광복군에 합류를 해라. 그래서 김구와 김원봉은 합의 하에 임정에서 통합이 되는 거죠. 그후에 임시정부 군무부장, 지금으로 말하면 국방부 장관이 되는 거죠. 그래서 귀국을 하시게 됩니다. 그게 마지막에 임시정부에서 맡은 직책이었죠.

▷ 오태훈 : 또 해방 이후에 친일 경찰 노덕술에게 수모를 당한 일들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 김태영 : 실제로 그 당시는 미 군정하 였다는 거 아닙니까? 사실 반민특위에 의해서 대체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친일파들이 국가기관에 다시 재등록이 되는 겁니다. (노덕술은) 최고의 악명 높은 고문기술자죠? 독립군들을 색출해서 잡아내는 일을 한 민족반역자죠, 노덕술이. 결국은 노덕술에게 체포가 됩니다. 체포돼서 뺨도 맞고 여러 가지 수모를 겪었죠. 독립 운동을 하실 적에도 일제에 한 번도 체포된 일이 없는 분인데 결국은 해방된 조국에 와서 체포가 되죠. 그런 굉장한 수모를 겪은 거죠.

▷ 오태훈 : 일제도 벌벌 떨게 만든 항일 무장 투사인데, 해방 이후에 우리나라에 와서 친일 경찰에게 수모를 당했다는 게 참 믿기 힘든 상황인데 그 이후에 월북을 하게 되지 않으십니까?

▶ 김태영 : 예, 그런데 (월북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 당시에 친일파들이 이승만의 비호 하에 그랬죠. 많은 우리나라 독립 운동가들을 암살을 시킵니다. 가장 김원봉에게 충격적인 일이 여운형 선생님이 암살당하죠. 그 후에 김구 선생님도 암살당하시고 그랬죠. 지속적으로 암살의 위험이 있고 이러다 보니까, 그러고 온통 적군인 친일파들의 세상이 되었으니까 결국은 갈 곳이 없는 거죠. 제 어머니가 서울로 유학을 간다고 어머니가 마침 그 자리에 계셨는데, (약산이) 떠나시기 전에 어머니한테 “너희들은 절대로 약산의 동생이라 그러지 말아라.” 그러고 난 후에 차를 타고 뒷문으로 해서 가시고 바로 군경이 집을 덮쳤다 그래요, 바깥에서도 총소리가 나고... 그래서 어머니하고 막내 외삼촌하고는 조그만 경찰서에 붙들려 갔죠. 가서 취조도 당하고 그랬죠.

▷ 오태훈 : 그러면 어머니께서는 그 이후로 약산 선생을 뵙지는 못하신 건가요, 그러면?

▶ 김태영 : 예, 형제분들 거의 다 약산을 못 뵀어요, 그 후로는.

▷ 오태훈 : 아, 그러시군요. 그렇게 해서 북으로 가신 듯합니다, 당시에. 그런데 그 이후에 북에서도 결국은 숙청을 당하셨는데 혹시 그 숙청의 이유도 알고 계시는지요?

▶ 김태영 : 제가 중국에서도 좀 들은 말이 있고 그때 많은 분들이 독립 운동하셨던 분들이 김일성 정권에 반해서... 김일성 정권에 문제가 있다, 이래서 중국으로 많이 넘어오셨어요, 그 당시에. 그런 분들 후손도 뵙고 이랬는데 약산 김원봉의 부하였던 김학철 선생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수용소에 갇혀 계시다가 음독자살을 하셨다. (당시 갇힌) 죄명이 뭐냐 그러면 장제스하고 연결된 국제 간첩이다. 그래서 북한을 탈출하려고 몇 번 그랬던 모양입니다. 그거는 뭐 김일성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까 그 말도 일리가 있긴 하겠죠. 몇 번이나 북한을 탈출하려고 그러다가 그러지 못하고 결국은 체포가 돼서 수용소로 갔다가 음독자살을 하셨다, 혀를 깨물고 돌아가셨다, 여러 설이 있습니다.

▷ 오태훈 : 해방이 됐지만 남한에서는 친일파들에게 쫓기고 고문 당하고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으셨고 북으로 가서는 또 김일성과 생각이 다르거나 반대했다는 이유로 숙청까지 당하셨고 참 왜 이렇게 됐을까라는 생각이 드는데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해서 독립 운동가 김원봉 선생의 조카 김태영 씨와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지금 김태영 선생께서 미국에 계시기 때문에 전화 상태가 썩 지금 고르지 못합니다. 청취자 여러분들께 양해 말씀을 드리겠고요. 그렇게 약산 선생께서 월북을 하셨기 때문에 남한에 있는 가족들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김태영 선생님의 어머니인 김학봉 여사께서는 어떤 삶을 사셨는지 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 김태영 : 아이고, 고생을 많이 하셨죠. 그 당시 중앙정보국에서 6개월에 1번씩 취조도 당하고 고등학교 때는 고문도 당하고 그러셨죠. 혹시나 북한하고 연계가 있지 않은가, 취조 당하고 고문 당하고 물고문도 당하고 그러셨죠, 어머니는. 그러다가 결혼하셔서 아버님이 빨리 돌아가셨어요 일찍이. 그래서 제가 외할머니 댁에서 컸는데 또 외할머니마저 돌아가시고, 나를 도와주시는 중간외삼촌도 감옥에 갇히시고 반국가 혐의로 감옥에 갇히시고 또 어머님 오빠 되시는 분도 전쟁통에 처형 당하시고 이러다 보니까 우리는 고아원에 맡겨질 수밖에 없었죠.

▷ 오태훈 : 고아원에서 거주를 하셨어요?

▶ 김태영 : 예, 6년 동안 거기서 자랐습니다.(웃음) 그 당시에는 고아원이라는 데가 굉장히 학대가 심했던 그런 시기였죠...

▷ 오태훈 : 그러면 김태영 씨께서는 미국으로는 언제 건너가신 겁니까?

▶ 김태영 : 1985년도에 왔습니다.

▷ 오태훈 : 혹시 삼촌이 약산 김원봉 선생이라는 것을 아신 건 언제셨어요?

▶ 김태영 : 중학교 한 1학년쯤부터 안 것 같아요. 고향 주변 사람들이 수근대는 말도 있고 어떤 이들은 “빨갱이 집안이네”, 그러고 내가 결혼을 하자마자 미국으로 왔는데 결혼식장에서도 누가 그러더라고요. “알고 보니까 빨갱이 집안이네.” 이러더라고요. 빨갱이 소리 많이 듣고 자랐죠. 그리고 집에 이사를 할 때마다 어머니가 갖고 다니셨던 장롱이 있었는데 조그마한. 장롱에 김원봉 큰외삼촌의 사진이 몇 장 남아 있었어요. 그것을 명주 보자기에 싸서 어머니가 늘 간직하고 계셨죠. 왜냐하면 오빠들은 처형 당하고 가족이 다 뿔뿔이 흩어지니까 마지막으로 우리 외할머니가 갖고 계시다가 외할머니 돌아가시자 자연스레 어머니가 그걸 간직하게 됐죠. 그래서 좀 일찍이 제가 알았던 편입니다. 어머니가 설명도 많이 해 주고 그러셔서.

▷ 오태훈 : 한데 김태영 씨 입장에서는 삼촌 때문에 온갖 고초와 또 집안도 풍비박산 나고 많이 힘든 삶을 사셨잖아요. 혹시 삼촌이 원망스럽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습니까?

▶ 김태영 : 어릴 때는 연좌제도 있고 이랬으니까 굉장히 원망스러웠죠. 우리 사촌 분 중에 한 분이 사법고시에 합격이 됐었는데 신원조회 때문에 못하기도 하고 이랬으니까 우리 집안으로 봐서는 굉장히 원망의 대상이죠. 그후로는 나이가 자꾸 들어가니까 이해가 되더라고요. 나이 들어서는 그런 게 없어지더라고요, 차츰차츰.

▷ 오태훈 : 제가 시사인 인터뷰를 한 기사를 봤는데 거기서 김태영 선생님의 사진을 봤습니다. 약산 선생의 모습이 남아 계세요.

▶ 김태영 : 아이고, 그렇습니까?

▷ 오태훈 : 눈 주변으로 보니까 약산 김원봉 선생님의 모습이 많이 투영돼 있는 것 같아서 저도 좀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지금 상황에 보면 남쪽에서는 월북한 인사다. 또 북쪽에서는 숙청을 당했고. 김원봉 선생은 남과 북 어디에서도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입장이었던 것 같습니다. 후손으로서 많이 속상하지는 않으신지요?

▶ 김태영 : 속상하고 화를 내기에도 세월이 너무 많이 흐른 것 같네요. 그게 그 당시에 독립 운동을 할 적에는 중국이라는 남의 땅에서 한 것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남의 땅에서 생활을 한다는 게, 독립 운동을 한다는 게 굉장히 제한되어 있는 거죠. 그러니까 때로는 국민당의 장제스 당의 도움을 받아야 되고 때로는 대통령의 세력이 그 당시에는 약했지만 모택동의 공산당의 도움을 받아야 되고 그런 처지에서 독립 운동을 하신 것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잘못하면 회색분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어 있죠. 우리가 보는 흑백 논리로 본다면... 그런데 실제로 중국에서 독립 운동을 하실 적에는 거의 장개석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국민당, 지금의 대만. 김원봉의 생각은 내가 볼 때는 우리가 독립을 하는데 이데올로기가 무슨 소용이 있나. 그래서 더 많은 분들이 아나키스트라고 말씀들 하시고 그러는데 우리의 해방이 제1의 목표다. 이데올로기나 이런 게 중요치 않다고 생각했던 분이니, 어떤 사람이 어떤 평가를 하더라도 그거는 그 당시에 상황을 잘 모르고 하시는 말씀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게 좀 억울하죠. 만일에 지금 우리나라분들이 중국이나 베트남에 가서 “야 너 빨갱이 새끼들아.” 이런 말할 수 있습니까? 못하듯이 그 당시 상황을 잘 이해를 못하면서 빨갱이 프레임을 자꾸 만드는 거예요. 그런 게 좀 억울합니다. 서훈이 굉장히 상징적이기도 하고 그렇지만, 그런 게 굉장히 억울하죠. 아직까지도 빨갱이 프레임을 만들어낸다는 게 억울하죠.

▷ 오태훈 : 억울함을 말씀하시고 계시는데요. 이번에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맞아서 선생께서 약산 김원봉 기념사업회 발족을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 김태영 : 예, 여러 어르신들하고 또 학계나 예술계, 문화계 여러 분야의 분들을 모셔서 지금 11월에 발족을 할까 생각합니다. 의열단의 정신, 그리고 독립운동사의 팩트, 그런 것에 대해서 좀 널리 알리려는 그런 생각으로 지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 오태훈 : 끝으로 최근에 논란이 되고 있는 김원봉 선생의 서훈 문제 포함해서 또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포함해서 김원봉 선생의 조카로서 어떤 생각 드시는지 말씀 듣겠습니다.

▶ 김태영 : 세상이 바뀌고 있구나. 지금 (광복된지) 칠십몇 년이 됐는데 우리의 사고 방식도 좌니 우니 그런 이데올로기에 구애받지 않고 사는 그런 세상이 되고 또한 약산과 의열단, 김원봉과 의열단의 그 활동이나 정신을 우리가 되새기는 그런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 오태훈 : 알겠습니다. 오늘 말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함께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 김태영 : 아이고,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 오태훈 : 네, 고맙습니다. 독립 운동가 약산 김원봉 선생의 외조카십니다. 김태영 씨 현재는 미국에서 거주 중이고 저희가 미국 현지를 통해서 연결을 하느라 연결 상태가 썩 좋지 못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께 양해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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