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생생경제] 우리가 일본화폐에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실리는 것을 허락할 수 없는 이유

입력 2019.04.11. 17:21 수정 2019.04.15.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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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 : YTN 라디오 FM 94.5 (15:10~16:00)
■ 진행 : 김혜민 PD
■ 대담 : 정재정 서울시립대학교 교수

[생생경제]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 우리가 일본화폐에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실리는 것을 허락할 수 없는 이유


◇ 김혜민 PD(이하 김혜민)> 오늘 가장 뜨거운 경제뉴스를 제일 생생하게 전해드리는 시간입니다. 국가의 첫째 상징이 국기라면, 둘째는 화폐입니다. 세계 화폐의 8할은 앞면에 인물이 들어가는데요. 그래서 화폐에 실리는 인물에는 국가 정체성이 담겨 있습니다. 그제 일본 정부가 1만 엔 권에 시부사와 에이이치를 넣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시부사와는 일본 경제의 아버지로 불리는데요. 그는 구한말 화폐를 발행하고 제일은행, 또 경부철도 사장을 하면서 한반도 경제 침탈에 앞장선 인물입니다. 오늘이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죠. 그래서 저는 더욱더 이 뉴스를 그냥 넘어가기가 힘들었습니다.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어떤 인물인지 알아보고요. 일제의 한반도 경제침탈에 관해 알아보죠. 서울시립대학교 정재정 교수님 나오셨어요. 교수님, 안녕하세요?

◆ 정재정 서울시립대학교 교수(이하 정재정)> 네, 안녕하세요.

◇ 김혜민> 생생경제에 역사학자가 나온 것은 처음입니다. 교수님도 경제 프로그램에 나온 건 처음이시죠?

◆ 정재정> 그렇습니다.

◇ 김혜민> 오늘 제가 왜 생생경제에 역사학자를 모셨는지 앞에 잘 설명을 했으니까요. 청취자분들이 굉장히 관심을 가지고 들으실 것 같아요. 오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입니다. 역사학자로서의 소회, 나눠주시죠.

◆ 정재정> 네,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지 10년도 안 돼서요.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했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큰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1910년대는 이른바 '무단 통치'라고 해서 헌병 경찰이 일반인들의 일상생활까지도 엄격하게 통제하던 시대였거든요. 그것을 뚫고 3·1운동을 일으키고, 그 열기 속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는데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선 왕조와 같은 전제 정치로 돌아가는 게 아니고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민주공화정을 표방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은 오늘날의 대한민국의 정치 체제와 이념과 맞닿아 있다고 하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 김혜민> 가장 일제의 억압이 심했던 무단 통치 시기에 세워진 임시정부, 그리고 그것이 민주공화제라는 것으로 선포됐다는 것. 두 가지 의미를 밝혀주셨습니다. 역사학자다 보니까 역사적 인물을 가장 많이 접하실 텐데, 그럴 때마다 이런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조상들, 인물들을 보면 나는 그때 그럴 수 있었을까, 이런 생각들을 하실 것 같아요. 저는 늘 하거든요. 어떠세요?

◆ 정재정> 그 냉혹한 시대에, 더군다나 이역 만 리로 이산이 되어서 독립운동을 한다고 하는 것은 대단한 결의와 용기, 또 배짱이 필요한 거죠.

◇ 김혜민> 맞습니다. 이런 가운데 제가 이 뉴스를 접했으니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저뿐만 아니라 이 뉴스를 들으신 분들이 굉장히 분노하셨을 것 같은데, 지금 일본이 화폐를 이번에 발행하면서 구한말 한반도 경제침탈의 선봉에 섰던 상징적 인물을 새 지폐에 넣겠다는 거거든요. 교수님은 이 소식을 처음에 듣고 어떤 생각을 하셨어요?

◆ 정재정> 저는 사실은 일반인들이라고 할까, 또 최근 한국의 언론 보도하고는 다른 생각으로 접했습니다. 왜냐하면, 시부사와 에이이치에 대해서는 제가 논문도 쓴 적이 있고, 제가 연구하는 일제 강점기의 경제사라고 할까요? 여기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라서 일본 자체에서 봤을 때는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릴 정도로 대단히 높게 평가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언젠가는 화폐에 등장하리라고 예상을 하고 있었고, 실제로 1960년대부터 후보로 올라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수염이 난 사진이 없어요. 수염이 없으면 화폐 위조 기술이 발달됨에 따라서 위조 화폐 만들기가 쉽다고 해요. 그래서 제외된 경험이 있었거든요. 그것이 최근에 와서는 그런 것을 방지하는 3D 기술 같은 것이 있어서 그런 약점을 극복할 수 있어서 등장할 때가 됐다고 저는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 김혜민> 그러니까 이게 아베 정권 들어서 우경화됨에 따라서 이 사람을 지폐에 넣겠다는 게 아니라 위조지폐를 방지할 수 있는 기술이 나오면서 이 사람을 지폐에 올려도 되겠다고 일본이 생각했다는 겁니다. 그것은 현실적인 판단이지만,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이게 반갑지 않은 것을 넘어서서 분노할 만한 것 아닙니까?

◆ 정재정> 물론이죠.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일본 국내에서 한 500여 개의 기업을 만들어서 경영을 했어요. 그런데 그 기업 중에 큰 기업들은 한국에 진출을 해요. 그러니까 한국 경제를 침탈하는 데 앞장선 거죠. 그 당시는 제국주의 시대니까 국가 권력이 군대를 보내서 외지를 점령한다든지, 침략할 때 선봉에 서는 사람들이 대개 기업이었어요. 요새도 어디에 파병을 하면 따라서 경제가 들어가잖아요? 그때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했던 일 중 하나가 제일은행이라고 하는 은행을 만들어요. 1876년에 조선과 일본이 소위 수호 조약을 맺어요. 그해 벌써 제일은행의 지점을 부산에 설치해요. 그래서 은행을 통해서 경제 침탈하는데, 그 후에 더 큰 문제는,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가 경인철도이거든요. 서울에서 인천까지. 그 철도를 미국 사람이 놓게 되어 있었는데, 미국 사람이 일본에 부설권을 팔아요. 거기에 앞장섰던 사람이 시부사와에요. 시부사와가 경인철도 합자 회사를 만들어서 사장이 되죠. 그리고 일본 자본가들의 힘을 모아서 경인선을 놓습니다. 그다음 경부선도 마찬가지입니다. 경부철도 주식회사를 만들어 가지고 시부사와 사장이 됩니다. 그 철도는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지 10년도 전에 일본이 장악하고 그것을 교두보로 삼아서 한국을 침략한 거죠.

◇ 김혜민> 네, 지금 일본 1만 엔 지폐 모델로 등장할 것으로 알려진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어떤 사람인지, 한반도 경제 침탈에 어떻게 앞장섰는지에 대해서 지금 정재정 교수님과 이야기 나누고 있습니다. 제일은행 설립했고, 그리고 경부선 부설권을 획득하고, 결국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할 수 있는 교두보 역할을 그 사람이 했었다고 말씀해주셨어요. 교수님께서 또 '철도와 근대 서울'이라는 책도 쓰셨잖아요? 이 부분에 대해서 전문가인데, 저도 찾아보니까 이게 궤간이라고 하는 게 중요하다고 하더라고요. 이것을 설명해주시겠어요?

◆ 정재정> 시부사와의 결정 중에는 경인선, 경부선을 놓을 때 일본의 군부나 정부는 협궤를 놓으려고 했어요. 협궤는 열차 폭이 좁은 거예요. 일본이 당시에 협궤를 택하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일본식의 협궤를 놓으면 우선 비용이 절감되잖아요. 그런데 시부사와는 어떤 주장을 하냐면, 아니다, 한반도는 대륙하고 연결되기 때문에 유럽과 같은 표준궤를 했어요. 표준궤는 협궤보다 높습니다. 폭이 1.435m에요. 오늘날 우리나라 철도가 그거거든요. 일본 국내 철도보다도 훨씬 기능이 우수하죠. 많은 물량을 실을 수도 있으니까요.

◇ 김혜민> 그럼 비용이 더 드는데, 왜 이것을 주장했을까요?

◆ 정재정> 그 사람이 주장한 것은 한반도는 대륙하고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세계의 간선이 될 것이다, 한국에 놓인 철도는 일본처럼 섬나라에 있는 철도가 아니고 대륙하고 연결되기 때문에 간선 철도가 되니까 처음부터 성능이 우수한 것으로 해야 한다고 해서 주장해서 그것을 관철시켰어요. 그런 점에서는 시부사와의 혜안이라고 할까, 그런 게 나타나는 측면이 있죠.

◇ 김혜민> 기업인으로서의 혜안,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거지만, 그게 한 약소국의 경제를 침탈한 장본인이라는 게 지금 이 사람에 대한 대한민국의 평가고요. 이 철도를 놨고, 그게 결국은 우리가 경제 속국으로 가는 길이 된 거죠?

◆ 정재정> 당시는 철도라는 게 군사시설이거든요. 그러니까 침략의 선봉, 지렛대라고 보면 돼요. 그러니까 그 지렛대를 놓은 거죠.

◇ 김혜민> 그런데 일각에서는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그냥 기업가에 불과하다. 일본이라는 국가가 국가 식민지와 경제 침탈에 앞장섰고, 기업가로서 그냥 기회였기 때문에 한국에 들어왔다고 하는 해석을 하는 분도 계신데요?

◆ 정재정> 아주 좋은 질문인데요? 우리가 약간 냉정하게 일본 안에서의 시부사와의 역할이라고 할까요, 그런 것을 짚어볼 필요가 있어요. 시부사와는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서 처음에 1867년에 파리 만국박람회에 갔다가 유럽의 산업이라든지, 군사시설을 보고서 일본도 이렇게 해야겠다고 하는 거죠. 거기서 와서 명치정부의 관료를 조금 하다가 아예 실업계로 돌아와서 수많은 기업을 만들어요. 주로 만든 기업이 은행, 철도, 이런 회사를 만들어서 500여 개를 운영하는데, 그 사람이 단순한 기업가가 아니고, 무엇을 주장하냐면, 경제와 도덕의 합일을 주장해요.

◇ 김혜민> 경제와 도덕의 합이요?

◆ 정재정> 우리가 요새 생각하면, 언뜻 생각이 안 되는데요. 그러나 그 사람의 경제 사상 기본에는 논어가 있어요. 논어에서 이야기하는 공공을 위한. 그러니까 자기는 그런 이야기를 해요. 경제라고 하는 것은 개인이 부자가 되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고, 사회, 국가의 부를 증진시키는 것이라고 해서 의리와 이익이 합치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해요. 그래서 스스로가 500여 개의 기업을 만들어서 운영했지만, 재벌을 만들지 않았어요. 명치시대의 기업가 중에는 다 나중에 재벌이 되죠. 미쓰비시나. 그런데 시부사와는 그런 것들이 잘 되면 다른 사람한테 매각을 해요. 이런 식으로 해서 일본 자체 내에서는 이른바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라고 높은 평가를 들어요.

◇ 김혜민> 그런데 교수님, 저는 그 얘기를 들으니까 더 슬픈 게 정말 이 시대 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 사람에게 인간만도 못한. 그러니까 지금 이 기업인이 생각한 경제와 도덕의 합일, 공공을 위한 가치에 조선 사람들은 없는 거잖아요?

◆ 정재정> 없죠. 그게 한계죠. 예를 들면, 조선에 철도를 놓지 않습니까? 같은 철도를 놓으면 일본인과 같은 요금을 내고 타잖아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짐짝 취급을 하고 다른 칸으로 밀어내려고 하는 게 그 당시 철도 실상이에요. 그리고 시부사와가 경영한 것은 철도뿐만이 아니고, 경성 전기도 있었고, 수많은 기업들을 조선에서 했는데요.

◇ 김혜민> 그러니까 인프라 사업은 다 가지고 있었던 거잖아요?

◆ 정재정> 그렇습니다. 그런 것들이 결국은 일본의 한국 침략 교두보 역할을 하는, 그 당시 제국주의 시대의 전반적인 흐름이죠. 그런 것을 했으니까 우리로 봐서는 일본인들이 평가하는 것과 같을 수는 없죠.

◇ 김혜민> 당연히 같은 수 없고요. 제가 앞서 오프닝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화폐라는 것은 국가의 얼굴이고, 또 내국인만 쓰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외국인들과 모두가 쓰는 건데, 거기에 한 나라 경제 침탈에 앞장선 사람을 싣는다는 게 문제가 있다는 게 당연히 우리의 입장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시부사와 에이이치라는 일본인에 대해서 알아봤는데, 오늘도 임정 100주년이니까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삼고 어떤 경제침탈을 했는지를 우리가 들여다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아까 전에 1910년대는 무단 통치의 시대라고 하셨고, 19년부터가 문화 정치 시기, 그리고 31년부터가 병참기지화 및 전시동원 시기라고 나오더라고요. 그러면 이 경제 침탈은 언제 먼저 시작했고, 언제 가장 극심했습니까?

◆ 정재정> 침략을 위한 인프라 구축이라고 하는 측면에서는 벌써 1910년 강점 이전에 경부선 놓죠, 경인선 놓죠, 경의선 놨거든요? 그리고 식민지화 하자마자 1910년대에는 화폐, 이런 것들을 조선 은행 것으로 다 바꾸죠. 또 토지조사라는 것을 해요. 토지의 소유관계를 보고 총독부가 세금을 거두는데요. 그게 가장 중요한 정책이에요. 20년대 가서는 일본이 식량이 부족하니까 조선에서 쌀을 증산해서 가져가려고 하는, 소위 산미 증식 계획이라고 해서 대대적으로 농토 있잖아요. 개량 산업이라든지, 품종 개량해서 증산되는 것의 몇 배를 일본으로 수탈하는 정책을 해요. 30년대 가면 전쟁이 시작돼요. 만주 침략하죠, 37년부터는 중국하고 전쟁. 조선이 일본과 중국 대륙의 중간에 있잖아요? 그러니까 조선을 그 사람들 표기로 팔뚝이라고 생각해서 여기에서 군수물자 생산, 그거 하기 위해서는 광산 자원을 개발해야 하고요. 이런 등의 것들을 강력하게 추진해나가죠.

◇ 김혜민> '미스터 션샤인' 드라마를 보면 일본 화폐를 쓰라고 하는데 한국 상인들이랑 조선 사람들이 쓰지 않는다고 하니까 일본 사업하는 사람들이 일본 사람들한테 항의하더라고요. 이거 조선에서 통용 안 되는데, 이거 뭐야, 이러는데, 이게 아까 말씀하셨던 화폐 개혁 이야기인 거죠. 그렇게 화폐를 바꿨고, 토지 조사를 해서 토지를 소유하고, 산미 증식이라고 해서 식량도 약탈했고요. 특히 1930년도에는 전쟁에 필요한 필수품 조달을 위해 군수공업을 위주로 하는 공업화 정책도 추진했다고 하더라고요. 일본 자본가들이 이렇게 돈이 넘쳐서 조선에 투자했다, 이런 얘기가 있더라고요?

◆ 정재정> 30년대쯤 가면요. 일본 국내에서는 공장법이라든지, 장시간 노동 시키는 것을 금지한다든지, 이런 게 있잖아요? 그런데 식민지 조선에서는 그런 게 없었어요. 그러니까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장시간 일을 시킬 수도 있고요. 또 하나는 일본보다 땅값이 싸니까 공장 부지라든지, 이런 것을 쉽게 확보할 수가 있죠. 또 조선에는 일본에 없는 광산 자원이 풍부했어요. 그 원료를 확보할 수가 있고요. 이런 등이 합쳐져서 일본 자본가들이 조선에 대대적으로 투자를 하죠. 그럼으로써 대규모 산업들이 생겨나요.

◇ 김혜민> 그렇군요. 오늘 관련된 이야기, 지금 정재정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님과 함께하고 있는데요. 저도 새록새록 역사에 대해 공부하는 것 같아서 굉장히 재밌습니다. 한 청취자님께서 "광산, 일본, 화폐," 이렇게 보내주셨는데,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걸까요?

◆ 정재정> 광산 하면 우리나라에서 금광 같은 것을 채취하는 사업도 시부사와가 관계를 했어요. 그런 게 있고, 또 하나는 화폐. 화폐에서는 아까 제일은행을 설치했다고 했잖아요? 말은 국립이었지만, 실제로는 시부사와가 일본에서 설립한 은행이 제일은행이에요. 오늘날 일본에서 미즈호은행이라고 있어요. 지금도. 그게 전신이거든요. 그 은행에서 우리나라에 화폐를 발행했어요. 1902년부터 1904년까지 화폐를 발행하는데, 1원짜리, 5원짜리, 10원짜리 화폐에 자기 사진을 넣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일본에서 화폐에 시부사와 사진을 넣는다고 하잖아요? 이미 120여 년 전에 우리나라에서는 시부사와 사진을 넣은 화폐가 발행됐어요. 그것을 유통시키려고 했죠. 그러나 나중에 잘 못 가서 통감부가 설치된 후에 소위 화폐 개혁이 일어나죠.

◇ 김혜민> 그 화폐 개혁이 하나의 금융 침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 정재정> 왜냐하면요. 제일은행에서요. 당시 대한제국을 압박해서, 물론 정부가 뒤에서 백업을 하니까 그런 거죠. 그래서 제일은행이 대한제국의 국고를 관리했어요. 요새 말로 하면, 한국은행이 해야 할 일 아니에요? 제일은행이 그것을 관리하고, 담보를 뭐로 잡았냐면, 우리나라의 관세 수입이 있잖아요? 자연히 한국의 화폐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몸으로 따지면, 혈액하고 같은 거예요. 혈액의 흐름을 장악한 거죠.

◇ 김혜민> 그렇군요. 이런 얘기가 있더라고요. 조선 정부가 아무래도 서양식 세관 업무, 아까 말씀하신 거죠. 세금을 빌미로 삼았다고 하셨잖아요. 조선 정부가 이런 세관 업무 지식이 부족하니까 외국인에게 위탁을 했고, 그것을 일본이 끼어들어서 한 거죠?

◆ 정재정> 그렇죠. 잘 알다시피 1880년대 멜렌도르프라고 들어보셨죠? 독일인? 그 사람을 우리나라의 세관사로 고용을 하잖아요. 그게 나중에 일본 경제 침탈이 강화되면서 일본에서 접수를 해가는 거죠.

◇ 김혜민> 그러면 역사학자의 전공 분야인 우리 조선 사람들의 노력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저도 학교 다닐 때 국채보상운동, 이런 것을 배웠거든요? 이런 일제의 경제 침탈에 가만있지는 않았잖아요?

◆ 정재정> 물론이죠. 우리 한국인들도 있잖아요? 개항 이후부터는 회사, 기업, 이런 것에 대해서 눈을 떠요. 물론 그전 전통 시대에도 장사는 하고, 다 했죠. 그런데 근대적 경영이라고 하는 측면에 눈을 뜨게 되니까 많은 회사도 설립을 합니다. 그런데 그 회사들이 오래가지 못하고, 망하고, 하는데요. 지금부터 120, 130년 전에 설립한 회사 중에서 지금까지 계속하는 게 몇 개가 있어요. 예를 들면, 두산그룹 있잖아요? 두산 그룹의 박승직의 경우는 일본 사람들하고 거래를 하면서 직물 공장 같은 것을 만든다든지, 그래서 지금 서울의 광장시장 있잖아요. 이런 것에서 상점을 내서 했던 기업들이 지금까지 연속이 되는 게 있어요. 한국인들도 이제는 자본주의 세계라고 할까, 이런 데 점점 익숙해지죠. 그러나 일본은 그 틈을 노려 가지고 이익권을 빼앗고, 침탈해 들어오게 되니까 한국인들이 인프라 같은 것을 만들려고 하면, 돈이 없으니까 일본에 차관을 빌리잖아요? 차관을 빌리면 빚을 갚아야 하잖아요. 빚을 갚지 못하니까 대신 경제 이권을 장악하죠. 거기에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주머닛돈 털어서, 비녀를 팔아가지고 일본 빚을 갚자고 나선 게 국채보상운동이에요. 그게 1907년, 1908년이에요.

◇ 김혜민> 이때 일제가 정말 한국의 경제를 파탄에 빠뜨려서 일본에 예속시키려고 했는데, 그래서 그 차관을 국민들이 갚아보자고 해서 했던 것이 국채보상운동이고요. 이것은 정말 민중들이 시작했고, 또 교수님이 어떤 기업들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제가 그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이런 질문이 하고 싶습니다. 근대화에 눈을 뜨면서 기업들이 세워졌다, 이런 주장 때문에 일제 식민지 시대의 경제 성장이 60, 70년대 우리나라 경제 성장의 토대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의견이 있거든요.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 정재정> 그것은 학문적 논쟁인데요. 그것을 식민지 근대화론이라든지, 제국주의 미화론이라고 하는데, 일제 시대 때 전반적으로 경제가 성장하고, 인구가 늘어가고, 공장 수가 증가하는 것들은 팩트니까요. 사실이에요.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해방 후 60년대, 70년대 한국 경제의 기반이 됐다고 하는 것에는 몇 가지 잘못이 있어요. 뭐냐면, 우선 45년 해방이 된 이후부터 남북이 분단돼요. 남북이 분단되는데, 분단은 무엇을 의미하냐면, 일제시대 때 주로 대공장이라든지, 기업이라든지, 광산이 개발됐던 것은 38선 이북이에요. 남한에는 잘 알다시피 농업 지대이기 때문에 큰 공장들이 없었어요. 거기에다가 또 하나, 6.25 전쟁이 일어나요. 6.25 전쟁이 일어나서 그나마 있었던 것이 대부분 파괴돼요. 그런 속에서 실질적으로 60년대, 70년대 경제 개발을 할 때 쓸 만한 공장이라든지, 이런 게 별로 없었어요. 그러니까 60년대, 70년대는 한국이 선택한 경제 정책, 그리고 외국에서 들어온 차관, 기술, 이런 것을 바탕으로 피땀 흘려 노력한 결과 그렇게 된 거죠. 일제 강점기와의 직접 연관이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약해요.

◇ 김혜민>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철도나 전기 같은 기간산업을 주도해서 했고, 그리고 그 당시에 자본주의가 조선 땅에 들어오면서 기업들이 세워진 것은 맞지만, 그게 계속해서 60, 70년대 한국 경제의 근간이 될 정도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주장은 잘못됐다. 또한 일본인들이 대한민국 그때 우리가 지배했기 때문에 개화도 빨리 됐고, 근대화도 빨리된 거야, 라고 한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 정재정> 그것도 일면 타당성은 있죠. 식민지 시대라고 하는 게 세계사적으로 보면, 근대화 시대에요. 근대 문명이 일본을 통해서 우리한테 들어온 것은 사실이거든요. 그런데 그러한 것의 주체가 누구였냐면, 일본인들이었어요. 일본인들이었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말이죠. 그 당시 학교를 나와도 제대로 된 직장을 갖기가 어려웠어요. 일본인들이 다 장악하니까. 핵심 기술 부분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니까 오히려 그 당시에 한국에서는 숫자적으로는 늘어나는데, 비율에서 봤을 때는 상대적으로 일본인들한테 핵심 부분들은 빼앗기고 있었기 때문에요. 해방이 된 후에 대단히 곤란을 겪죠. 철도 얘기를 또 하나 하면, 일본인들이 철도 운영을 장악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해방 이후에 일본인들이 다 물러갔잖아요. 그러면 우리 손으로 기관차를 만들고, 운영해야 하는데, 그 핵심 부서에는 우리가 들어가 있지 못했어요. 차표를 팔고, 차장은 했지만, 실제적으로 열차 시간표를 짠다든지 하는 것을 못했기 때문에 그때 들어왔던 게 미국이에요. 미국에서 들어와서 미국의 기술이라든지, 미국의 노하우나 자본, 이런 것들의 도움이 됐죠.

◇ 김혜민> 그러니까 기간산업들을 만들기는 했지만, 시스템은 부재하고, 사람도 안 키워놨기 때문에 결국, 거기서도 자력갱생한 것은 우리의 몫이었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이야기로 해보죠. 1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일제 경제 수탈의 흔적이 우리 가운데 남아 있습니다. 근로 정신대 어르신들은 물론이고요. 강제 징용. 일본 전범 기업을 상대로 한 집단 손해배상 청구까지 이어지고 있거든요. 이런 것들은 저희가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 정재정> 지금 말씀하신 대로 일본 식민지 지배의 상흔이라고 할까, 상처죠. 이게 아직 남아있고, 또 하나는 그것을 전후에 처리를 하고 넘어갔어야 하는데, 1965년에 한일 국교 정상화를 하면서 그런 것들을 서로가 애매하게 처리한 부분이 있어요. 그것은 또 그 상황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측면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식민지 지배를 당했던 쪽에서는 그 당시 일본한테 식민지 지배에 대해서 사죄하고, 반성하고, 배상하라고 요구했어요. 그런데 일본은 무슨 소리냐, 이제까지 식민지를 지배한 나라 중에 그런 것을 한 나라가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그건 사실이에요. 지금 영국도, 프랑스도, 독일도 한 적이 없어요. 솔직히. 그러니까 일본으로서는 버틴 거죠. 아니라고. 이런 식으로 했기 때문에 끝까지, 15년 동안 그것을 가지고 입씨름을 했어요. 그러다가 결국, 타협한 게 그냥 적당한 선에서 한국에 청구권 자금이라고 할까, 이런 것을 주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던 거예요. 그 부족했던 점이 요새 터져나온 거죠.

◇ 김혜민> 그러면 그 당시에 협의한 것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를 한다고 하셨잖아요. 지금 이 시점, 문재인 정부에서는 그것을 무효화하고, 지금 다시 과거사 청산을 하자고 나오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세요?

◆ 정재정> 지금 정부도 무효화하자고는 안 해요. 왜냐하면, 이것을 무효화했다가는 진짜 이것은 외교적으로 한국과 일본이 국교를 단절해야 해요. 65년 체제를 무시하면요. 그러나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지금 정부도 답을 안 내놓고 있어요. 조금 답답하죠.

◇ 김혜민> 그런데 지금 일본 전범 기업을 상대로 한 집단 손해배상 청구가 계속 이어지고 있거든요. 이분들한테는 끝난 이야기가 아니니까요. 최근에만 해도 537명이 참여 의사를 밝혔고, 저도 몇 번 뉴스로 전해드린 게 있는데요. 이것은 일본 기업 차원에서 이 부분을 배상하고 할 수 있는 부분 아닙니까?

◆ 정재정> 그것은 이제 일본 측 생각은 우리하고 달라요.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일본은 이것조차 이미 1965년에 청구권과 경제 협력이라고 하는 협정이 하나 있어요. 그 협정으로 다 끝났다고 하는 게 일본의 주장이에요.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로는 일본 기업으로서는 어디까지나 이 사람들은 장사하는 사람들 아니에요? 한국에서 이런 것을 했을 때 차라리 요구하는 대로 1억 원이면 1억 원씩 돈을 물어주고, 기업을 계속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요, 기업 중에는. 그러나 그렇게 돼버리면 일본이 주장했던 전제가 무너져요. 65년으로 다 끝났다는 게. 그러면 일본은 한국하고만 그런 게 아니고, 동남아시아라든지, 중국하고의 문제도 있고 하기 때문에 쉽게 물러설 수가 없어요. 그런 점까지도 폭 넓게 볼 필요가 있죠.

◇ 김혜민> 현실적인 이야기까지 교수님께서 해주셨습니다. 청취자 한분께서 "교수님, 저는 물산장려운동이라는 말이 항상 떠오르는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운동인가요? 명쾌한 교수님의 시각으로 듣고 싶어요," 이렇게 왔어요.

◆ 정재정> 그렇습니다. 1920년대 들어가면 우리나라에도 10년대 무단통치를 해서 엄격한 통치를 했었잖아요? 그러다가 3·1운동이 났어요. 그러니까 일본으로서도 이러한 정책이 잘못됐다, 그러니까 조선인들에게 어느 정도 숨통을 틔워줘야겠다, 하는 쪽으로 바꿔요. 그래서 신문도 발행하게 해주고, 잡지도 발행하게 해주고, 단체도 만들게 해요. 그런 속에서 한국 사람들도 이제는 우리가 길게 보면 한국인들이 실력을 길러야 하고, 기업을 일으켜서 우리 스스로가 근대 문명을 만들어 가는 게 나중에는 독립과 연결된다, 이런 논리가 나오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한국인 중에도 큰 공장을 세운 사람이 나타나요. 예를 들면, 경성 방직 같은. 그런 방직을 세우고, 고무신 공장을 세우고요. 한국인들한테 물건을 팔기 시작해요. 그런 속에서 이왕이면 한국인들은 만드는 물건을 사서 쓰자, 이게 바로 우리의 실력을 기르는 길이라고 하는 논리가 나오죠. 그런 운동이 바로 물산장려운동이에요.

◇ 김혜민> 그렇군요. 국산품을 애용하자.

◆ 정재정> 국산품 애용이 애국이라는 거죠.

◇ 김혜민> 일제의 경제적 수탈 정책에 항거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경제적 힘을 기르는 거다, 그런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오늘 임시정부 100주년 맞이해서 역사학자와 함께 경제 프로그램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 나눴는데요. 교수님,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서 다시 한 번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들이 있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지 끝으로 정리 말씀 부탁드릴게요.

◆ 정재정> 우선 일제의 혹독한 지배 아래에서도 언젠가는 나라를 세워야겠다고 독립운동에 헌신하셨던 분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은 국내에도 있었고, 국외에도 있었고요. 그야말로 중국 대륙이나 연해주나 미국 등과 같이 수만 리 떨어진 곳에서도 했었거든요. 그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이와 같은 100주년을 기념하고 축하할 수 있다는 게 하나가 있고, 또 하나 이 프로그램이 경제 프로그램이니까요. 일제 강점기에서도 한국인 나름대로 기업을 이룩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기업 활동도 하고, 실제로 그러다 보니까 30년대쯤 가면, 공장 수라든지, 이런 것이 일본 사람이 하는 것보다 한국 사람들이 하는 것이 훨씬 능가를 해요. 거기에서 쌓은 실력이라는 게 있죠. 그런 것들은 나중에 해방 후에 한국이 스스로의 국가를 만들어가는 데 큰 자산이 된 것도 사실이에요. 그러니까 한국인의 성장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는 일제 강점기라는 그 차별과 억압 속에서도 한국 사람들은 꿋꿋하게 그와 같은 것을 했었다고 하는 이런 것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게 좋아요. 그것을 간단하게 요새 친일이라든지, 반일이라든지,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딱 나눠서 비판한다든지, 싸운다는 것은 생산적이지 못한 거예요.

◇ 김혜민> 네, 우리에게 남은 과제까지 정리해주셨습니다. 정재정 서울시립대 명예교수였습니다. 교수님, 고맙습니다.

◆ 정재정>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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