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왕릉인가, 장수왕릉인가?

임기환 입력 2019. 4. 18.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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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 명장면-69] 평양 동남쪽 제령산 서쪽 기슭에는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의 능으로 전해지는 무덤이 있다. 이른바 전(傳)동명왕릉이다.

무덤의 외형을 보면 2단의 돌기단 위에 사각추형으로 흙을 쌓아 봉토를 올린 석축기단봉토분이다. 이런 형식은 국내성시대 가장 전형적인 무덤 양식인 계단식 적석총 및 새로운 무덤 양식으로 등장한 봉토석실분이란 2가지 무덤 양식을 결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왕릉의 형식으로 보자면 장군총과 같은 계단식 적석총에서 봉토석실분으로 바뀌는 과도기적 양식이다.

따라서 전동명왕릉은 평양으로 천도한 뒤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고분 중의 하나로 판단해도 무리가 없다. 분구의 크기를 보면 기단부 한변의 길이가 22m, 높이 8.15m로 외형은 그리 큰 편이 아니다. 봉분 주위에는 기단으로부터 사방 5m 정도 넓이로 강자갈을 깐 묘역을 마련하였다.

무덤 내부 구조를 보면 널길, 앞방, 널방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두방무덤이라고 북한 학계는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앞방은 널길의 일부인 이음길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전동명왕릉은 안팎 2부분으로 이루어진 길이 3m 정도 기다란 널길과 2개의 곁방, 하나의 널방으로 구성된 외방무덤이다. 널방의 크기는 한변이 4.2m 내외, 높이는 3.9m 내외이다. 내부 유물은 이미 도굴되어 약간의 금제 관장식과 관못 등이 출토되었을 뿐이다.

무덤방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벽화이다. 처음 이 무덤이 발견된 일제강점기만 해도 벽화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1970년대 초엽에 동명왕릉 내부를 재조사하면서 무덤방 안 벽면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열과 행을 이루며 그려진 100여 송이 연꽃을 확인하였다. 연꽃은 지름 12㎝ 되는 보라색 바탕의 붉은 자색으로 활짝 핀 모습으로 표현되었으며, 무덤 전체에 640송이 정도가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었다. 무덤 널방 가득한 화려한 연꽃을 통해 불교의 정토(淨土)세계를 꾸민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 무덤 주인공을 추정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도 있다.

그러면 전동명왕릉은 언제부터 동명왕릉으로 알려져 왔을까?

현재 남아있는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은 고려말 이승휴가 남긴 '제왕운기(帝王韻紀)'이다. 여기서 동명왕의 무덤이 평양의 용산묘(龍山墓)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초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 "동명왕 무덤은 부의 동남쪽 30리쯤 되는 중화(中和)의 경계 용산(龍山)에 있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사(高麗史)'지리지 평양조에도 "동명왕 무덤은 (서경유수)부의 동남쪽 중화(中和)의 경계 용산(龍山)에 있다. 속칭 진주묘(眞珠墓)라고 한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보면 조선시대에는 평양 중화군에 동명왕릉이 있다고 믿고 있음이 분명하다.

세종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시조묘를 세우라는 명을 내렸고, 이에 세종 11년 동명왕의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으며, 동명왕 무덤에 대한 국가 차원의 관리가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선조는 임진왜란으로 역대 왕들의 능묘가 훼손되자 이를 잘 관리하도록 명하면서, 이때 평양의 기자묘와 동명왕 무덤도 잘 보살피도록 평안도 관찰사에게 당부하였다. 이후 숙종, 영조, 고종으로 이어지면서 동명왕릉의 수리·관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고종(高宗)은 동명왕의 무덤을 '동명왕릉(東明王陵)'으로 부르도록 공식적으로 정하고, 대대적인 개수를 시행하고 사당도 정비하였다.

동명왕릉 (일제시기)
동명왕릉 정자각과 비각(일제시기)

이처럼 고려시대부터 평양에 동명왕릉의 존재가 확인되고, 조선시대에는 동명왕릉이 국가 차원의 관리를 받는 역사적인 성소였다. 그런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나 '광개토왕릉비'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시조 동명왕의 장지는 첫 수도인 졸본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가 멸망한 뒤 고려는 고구려의 수도 졸본이나 국내성 지역을 영역 내에 포함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고려인들은 고구려의 발상지가 어디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고구려의 후기 수도인 평양지역이 건국지라는 인식이 나타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동명왕릉도 평양에 있다는 전승도 만들어졌다. 이런 인식이 조선에 들어 특히 세종대에 확고해져 평양의 동명왕릉이 정설로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기억에서도 사라지게 된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평양의 동명왕릉이 고려시대에 허구로 만들어졌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고구려가 평양 천도한 후에 졸본의 동명왕릉을 평양으로 옮겨왔거나 혹은 평양에도 동명왕릉의 허묘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고구려시대에 만들어진 동명왕릉의 존재가 전승되면서, 오히려 이 동명왕릉을 근거로 평양이 고구려 건국지라는 인식이 등장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전동명왕릉은 정말 동명왕의 무덤일까?

북한 학계에서는 실제 동명왕릉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이유로 평양 일대에서 다른 고분에서는 볼 수 없는 화려한 연꽃무늬 벽화가 이 무덤의 위상이 최고 수준의 증거라는 점을 들고 있다. 또 다른 근거로 동명왕릉이 속한 진파리 고분군의 다른 무덤들이 모두 동명왕릉을 향하고 있는 배치가 동명왕릉이 시조 동명왕의 능다운 품격을 갖추고 있다는 점을 중시한다.

그리고 '정릉(定陵)'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그릇과 기와가 출토되어 정릉사로 불린 사찰이 무덤 앞에 건립되어 원찰의 역할을 한다는 점도 시조릉으로 보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당시에 이처럼 능사를 갖춘 왕릉급 고분은 전동명왕릉이 유일하다는 점 역시 이 무덤이 특별한 위상을 갖는 무덤임을 반영한다. 어쨌든 이런 여러 이유로 북한은 이 무덤을 동명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1993년 5월에 동명왕릉으로 화려하게 개건했다.

우리 학계에서도 동명왕릉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앞서 언급한 과도기적인 고분 형식, 능사의 존재, 진파리고분군의 배장묘 등 여러 근거를 종합해 볼 때, 평양 천도 이후 고구려 왕실과 장수왕권의 상징적인 기념물로서 성격을 갖고 있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하지만 반론도 만만치 않다. 동명왕릉이 실제 동명왕의 무덤이라면 이는 허묘(墟墓)여야 한다. 왜냐하면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여러 문헌기록에 의하면 시조 동명왕의 장지는 첫 수도인 졸본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평양천도 이후에도 안장왕, 평원왕, 영류왕은 졸본에 가서 시조 사당(始祖廟)에 제사를 올렸는데, 이를 보면 시조 무덤이 여전히 졸본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졸본에 있는 동명왕 무덤을 평양으로 이장한 것이 아니라면 평양의 동명왕릉은 허묘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전동명왕릉 무덤 안에서 금제 관장식과 관못이 출토되었기 때문에 실제로 관이 안치되었던 실제 묘로 보아야 하기 때문에, 허묘인 동명왕릉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면 이 무덤을 동명왕릉으로 보지 않는 견해에서는 누구 무덤으로 보고 있을까? 이 무덤이 왕릉급이라는 점과 평양 천도 이후 이른 시기의 왕릉이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장수왕이나 문자왕이 유력한 후보가 된다. 또 전동명왕릉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경신리1호분을 어느 왕의 무덤으로 보는지에 따라 전동명왕릉의 주인공도 달라지게 된다.

지금까지 나온 견해를 보면 전동명왕릉을 장수왕릉으로 보는 견해, 경신리1호분을 장수왕릉으로 보고, 전동명왕릉을 문자왕릉으로 보는 견해 등이 유력한 편이다. 이런 논란은 이들 무덤의 축조 연대를 확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전동명왕릉의 축조 시기를 5세기 중엽으로 본다면, 491년에 사망한 장수왕릉이 결코 될 수 없다. 그러나 5세기 말에 축조되었다면 장수왕릉일 가능성이 훨씬 커진다. 아직까지는 이런 편년이 불투명하기 때문에 무덤 주인공을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는 것이다.

일단 편년을 접어두고 전동명왕릉이 동명왕릉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은 타당할까?

관 장식이 나와서 실제 무덤이라는 비판도 다소 궁색하다. 동명왕릉의 허묘를 만들 때 실제 동명왕릉처럼 허구로 관을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안장왕, 평원왕들이 졸본에 순행하여 시조묘에 제사 지냈다는 점도 평양에 동명왕릉을 만들지 않았다는 논거가 될 수 없다. 평양 천도 후 가장 왕권이 강력했던 장수왕, 문자왕과는 달리 안장왕 이후 왕들이 졸본에 간 배경에는 시조묘 제사 이외의 졸본이나 국내 지역 세력을 회유하려는 정치적 목적이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전동명왕릉이 동명왕릉이 아니라는 논거 역시 불충분하기 때문에 여전히 동명왕릉의 허묘일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좀 더 상상력을 발휘해보자.

중국 랴오닝성 환런시 미창구에는 '장군묘(將軍墓)'라고 불리는 거대한 무덤이 있다. 이 장군묘는 사각형 밑면에 방추형으로 생긴 방대형 봉토석실분이다. 봉토의 밑면 둘레는 150m, 높이는 8m 정도이다. 내부 구조는 널길과 2개의 곁방, 이음길, 널방으로 이루어진 외방무덤이다. 장군묘는 외형도 크지만 무덤칸 규모도 만만치 않다. 널길의 길이가 5.4m, 널방의 크기는 한면 3.5m에 높이 2.1m이다. 그리고 널방과 곁방의 벽과 천장에 벽화를 그렸다. 벽화의 주제는 '왕(王)'자 무늬와 연꽃무늬 중심의 장식무늬이다. 무덤 안에서는 부뚜막도기, 흑갈색네귀항아리, 도금된 말갖춤 및 장식물, 철제 도구 등이 출토되었다.

미창구장군묘의 연꽃무늬 벽화
전동명왕릉의 연꽃무늬 벽화

장군묘는 무덤 크기, 무덤 구조와 벽화 내용으로 보아 평양에서 전동명왕릉이 축조되는 시기와 같은 때에 만들어진 듯하다. 장군묘 역시 왕릉급 무덤으로 손색이 없다. 장군묘가 위치한 환런은 고구려의 첫 수도 졸본으로서 시조 동명왕릉이 위치한 곳이다. 그런데 평양 천도 후 5세기에 졸본에 왕릉급 무덤이 만들어질 이유를 찾기 어렵다. 그렇다면 장군묘는 시조 동명왕릉과 연관시켜 볼 수 있겠다.

첫 수도 졸본에 위치한 장군묘, 새로운 수도 평양에 위치한 전동명왕릉. 이 두 무덤은 같은 시기에 조성되었으며, 같은 무덤 구조에, 벽화의 주제도 연꽃으로 매우 비슷하다. 그렇다면 이 두 무덤을 하나의 맥락에서 연관시켜 파악해 볼 수 있겠다.

이 두 무덤을 관통하는 어떤 의도, 즉 장수왕이 평양 천도 이후 왕실의 신성성 및 왕권의 권위를 드러내는 기념물로서 새 수도 평양과 옛 수도 졸본에 각각 시조 동명왕릉을 구축하였으리라는 추정이 마냥 지나치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 두 동명왕릉은 평양 천도를 기정사실화하고 이를 시조 동명왕의 뜻을 이은 것이라는 표상이 충분히 될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논증보다는 추정이 앞선 견해라는 점을 부정하지 않겠다. 단지 역사적 상상력을 좀 더 발휘했다고 변호해본다.

왕의 무덤은 단순히 죽은 자의 안식처가 아니다. 전대의 왕릉은 현왕의 권위를 보장하는 정치적 상징물이다. 내세관이 정신세계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전근대시대에는 더욱 그러했다. 고분의 정치학으로 왕릉을 바라보는 까닭이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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