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한 선'보다 '강력한 정의'가 필요해

2019. 4. 20.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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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프리즈너> 한국방송 제공.

<닥터 프리즈너>(한국방송2)는 절대 권력에 맞서기 위해 교도소 의료과장이 된 의사를 그린 장르물이다. 동명의 일본 만화와는 무관하며, 한국의 법과 의료제도를 바탕으로 박계옥 작가가 쓴 창작물이다. 흔히 이런 장르의 드라마는 마니아는 있어도 시청률은 높지 않다. 어둡고 전문적인 이야기에 복잡한 얼개가 문턱으로 작용하며, 초반의 짧은 공방에 피로감을 느낀 시청자들이 이탈하거나 중간 유입이 힘든 탓이다. 하지만 이런 통념을 깨고 <닥터 프리즈너>의 시청률이 고공행진 중이다. 비결이 뭘까.

일단 극본이 뛰어나다. 의료권력과 사법권력과 자본권력이 엉켜 있는 지점을 파고든 독특한 소재에, 예측 불허의 전개와 치밀한 구성이 극의 재미를 보장한다. 연출의 세공도 남다르다. 수준 높은 미술과 조명, (표준 렌즈보다 화각이 넓은) 애너모픽 렌즈를 쓴 촬영과 색보정으로,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한 때깔의 화면을 자랑한다. 여기에 다소 과잉으로 쓰인 음악과 음향도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하지만 가장 주효한 흥행 요소는 주인공의 매력일 것이다. 나이제(남궁민)는 본래 선인이었으나 나락으로 떨어진 뒤 속을 알 수 없는 무서운 인간이 된다. 이처럼 선악을 넘나드는 인물에 남궁민의 캐스팅은 적확했다. <김과장> 등에서는 선인을, <냄새를 보는 소녀> 등에서는 악인을 연기했던 남궁민은 미묘한 눈빛과 심드렁한 목소리로 열정과 냉소, 정의감과 비굴함이 교차하는 입체적인 인물을 묘사해낸다.

드라마는 나이제의 의도를 단번에 드러내지 않으며, 표적도 계속 바뀐다. 처음에는 망나니 재벌 2세를 노리는 듯했지만, 적폐를 상징하는 교도소 의료과장을 무너뜨리고, 이제 거대자본을 상징하는 재벌과의 맞대결을 앞두고 있다. 그의 칼끝이 개인이 아닌 구조를, 복수가 아닌 정의를 향하고 있음이 서서히 드러난다.

나이제는 적의 손을 잡거나 배신에 능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적보다 한술 더 뜨는 행동으로 적을 이긴다. 그는 비상한 두뇌를 지녔지만, 최고의 필살기는 적의 욕망을 간파하고 끝까지 베팅을 할 수 있는 담력이다. 자기 손에 피 묻히기를 마다하지 않으며,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심리적 마지노선을 뛰어넘는다. 그는 적의 힘을 이용해 적을 무너뜨리고 적의 악행이 저절로 드러나게 하는 전법을 구사한다. 선으로 정의를 실현할 수 없으며, 오히려 힘을 통해 정의가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이런 나이제의 정의관에 대조되는 인물이 한소금(권나라)과 여동생이다. 한소금은 사라진 남동생을 찾겠다는 의지만 있을 뿐 능력도 없고 강단도 없다. 그는 나이제에게 “적과 싸우기 위해 적과 똑같아졌다”고 비판했지만, 나이제가 던져주는 콩고물 같은 정보에 의존할 뿐이다. 그는 무력한 선의지를 대변한다. 한편 여동생은 나이제에게 거대권력과의 싸움을 중단하고 시골에 내려가 살자고 말한다. 하지만 나이제는 권력에 짓밟힌 가장 약한 자의 죽음을 언급하며 개인적인 복수가 아닌 정의의 실현임을 이야기한다. 여동생은 정의를 개인적 용서의 문제로 치환하고 현실 논리를 앞세워 타협하려는 박약한 의지를 대변한다. 이런 한소금과 여동생이 모두 여성인 것이 우연일까. 여기에 “그 사람들 이기려고 하지 마라”는 유언을 남기고 희생된 청각장애인 엄마까지 떠올리면, 드라마가 무력한 선과 박약한 의지를 여성으로 젠더화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단점과 더불어, 권력을 무소불위한 것으로 과장하는 문제도 지적할 만하다. 특히 의료권력을 전능하게 묘사하는 것은 의료에 대한 몰이해를 깔고 있다. 가령 나이제가 형집행정지로 재소자를 빼내기 위해 병을 만드는 과정이 철저한 계산에 의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인체는 기계가 아니고 의료에는 예측 밖의 변수들이 작용하기 때문에, 그가 아무리 천재의사라 해도 모든 과정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다. 드라마는 의학적 묘사를 디테일하게 담지만 전체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의료의 본질을 놓치고 있다.

몇가지 단점에도 드라마는 장르적 완성도로 보나 현실적 맥락으로 보나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드라마는 자막이나 화면 질감을 통해 허구임을 강조하지만 현실의 세련된 반영임을 드러낸다. 교도소 안에서 특별 관리되는 재벌과 정치인들이 있음을 상기시킬 뿐 아니라 ‘영남제분 사모’나 ‘댓글 작업을 지시한 국정원장’을 통해 현실의 기시감을 불러내기 때문이다. 영화 <특별수사: 사형수의 편지>에서는 악독하게 그려졌던 영남제분 사모가 <닥터 프리즈너>에서는 귀엽고 우호적인 조력자로 등장하는 이유가 뭘까. 그 사람보다 악덕한 형집행정지자들이 얼마든지 있음을 암시하는 건 아닐까. 사실 한해 275명에 달하는 형집행정지자들을 전수조사해보지 않는 이상 드라마 속 이야기가 순전히 허구임을 어찌 확신할 수 있으랴. 때마침 박근혜도 형집행정지를 신청하였다. 시청률이 15%에 육박하는 지상파 드라마를 통해 형집행정지에 대한 냉소적인 인식을 공유한 시민들이 박근혜의 형집행정지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사법질서에 대한 신뢰가 바닥난 상태에서 드라마는 나이제의 목소리를 빌려 말한다. 이제 개인이 아닌 구조를 보아야 한다고. 무력한 선이 아니라, 강력한 정의가 필요하다고!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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