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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생에도 군함도에서"..눈을 의심케 한 어느 일본인의 글귀

나가사키(일본) | 배문규 기자 입력 2019.04.21. 21:25

[경향신문]

아름답지 않은 ‘지옥섬’ 환경재단 주최로 7박8일간 한·중·일 3국을 탐방하는 피스&그린보트에 오른 한·일 양국 시민들이 지난 14일 조선인을 강제징용해 노동을 시킨 현장인 일본 군함도를 둘러보고 있다(왼쪽 사진). 한 참가자가 배 위에서 군함도를 휴대폰 카메라에 담고 있다. 나가사키(일본) | 김영민 기자

시커먼 콘크리트 덩어리가 유령선처럼 바다 위에 떠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도 이미 숨이 끊어진 짐승처럼 움직임은 없고, 낯선 방문자들 주변으로 갈매기들만 맴돌았다. 갑판에서 솟아오른 듯한 함교와 함포에 무쇠장갑처럼 방파제를 둘러친 섬의 형상이 군함을 빼닮았다. 이 바위섬의 이름은 하시마(端島), ‘군함도’로 더 잘 알려졌다. 조선인들 사이에선 ‘죽어야 벗어날 수 있는 지옥섬’으로 불렸지만, 일본인들에게는 자랑스러운 ‘메이지 산업혁명’의 유산으로 꼽힌다.

지난 13~14일 환경재단의 ‘피스&그린보트’ 참가자들과 방문한 일본 나가사키는 군함도부터 원자폭탄 투하지까지 일본의 근대가 층층이 포개져있는 도시다. 이 역사적 현장에선 최근 ‘망각의 정치’로 기우는 일본의 우경화 움직임이 노골적으로 표출되고 있었다.

■‘아름답고 환상적인 군함도?’

“하시마 탄광에는 전국 각지에서 많은 분이 일을 찾아왔습니다. 일본뿐만 아니라 외국에서 온 노동자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1944년부터 종전까지 외국인들도 출신지와 관계없이 목숨을 걸고 동료로서 좋은 관계를 맺었습니다….”

군함도에 들어가기 전 ‘군함도 디지털 박물관’에서 들을 수 있는 한국어 설명이다. 영상에는 화사한 옷에 밝은 표정의 여성들이 걸어가고, 일을 마친 남성들이 미소를 띠며 맥주를 마시는 기록사진이 이어졌다. 걸음을 옮기다 마주친 군함도 그림에 시선이 머물렀다. 작품 제목은 ‘Beautiful Fantastic Gunkanjima(아름답고 환상적인 군함도)’였다.

“다음 생에는 하시마에서 태어나고 싶다.” “바다와 석양, 솔개와 까마귀 덕분에 나는 시인이 될 수 있었다.” 군함도 주민들이 남긴 이 낭만적인 글귀들은 일본인들에게 ‘틀린’ 역사가 아니다. 1890년 미쓰비시에서 처음 석탄을 캐기 시작해 ‘산업의 쌀’을 만드는 제철소에 연료를 공급하던 근대화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1916년 일본 최초의 7층짜리 철근콘크리트 아파트가 세워졌고, 1950년대 도쿄에도 흔하지 않던 TV가 집집마다 있을 정도로 소득 수준도 높았다고 한다. 에너지 수요가 석유로 옮겨가면서 1974년 탄광을 폐쇄하고 무인도가 됐다.

긴 잠을 자던 군함도는 2000년대 들어 다시 수면 위로 부상했다. 2015년 비서구권 최초로 산업화에 성공한 사례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 1850년대부터 1910년까지 일본 중공업(철강, 조선, 석탄산업)’의 23곳 중 하나로 등재된 것이다. 현재는 페리선을 타고 40분이면 들어갈 수 있는 나가사키의 관광코스가 됐다.

■“살고싶지도 죽고싶지도 않았다”

나가사키항에서 남서쪽으로 약 19㎞ 떨어진 군함도는 남북으로 480m, 동서로 160m인 야구장 두 개 크기의 작은 섬이다. 40년 넘게 비바람에 방치된 건물에 하얀 페인트의 흔적이 옅게 남아있었다. 방문자들은 30여분 동안 견학코스를 따라 30·31호동 아파트, 종합사무소, 갱도로 내려가는 승강계단과 저탄 벨트컨베이어 등 일부 시설만 멀리서 볼 수 있다.

“주민들의 똥오줌을 바다에 버리면 물고기들이 몰려들곤 했습니다. 육지사람들은 그걸 잡아다 사시미로 먹으니 섬사람들은 ‘저게 맛있을까’ 얘기하며 웃곤 했죠.” 안내를 맡은 일본 노신사가 우스운 얘기를 섞어가며 군함도의 생활상을 전했다. “작업자들은 사방이 뚫린 승강기를 타고 땅 속으로 600m를 내려가 다시 400m를 걸어들어갔습니다. 미쓰비시의 작업 권고 온도는 37도였는데 실제 온도는 40도를 넘겼고, 습도는 95%에 달했다고 합니다.” 갱내는 가스 폭발과 붕괴 위험에다 지하수가 차고, 산소가 부족했다고 한다.

이러한 설명은 동행한 한국인 가이드를 통해 겨우 전해들을 수 있을 뿐, 애초에 한국어 통역 자체가 허용되지 않았다. 조선인 강제 징용 등 부정적인 역사에 대해선 어떠한 설명도 없었다.

이영채 게이센조가쿠인대 교수는 “이곳 해설사는 1956년부터 1974년까지 폐광 전 군함도의 생활상만 얘기할 뿐 이전의 역사는 말하지 않는다”며 “설명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제대로 된 역사를 말하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시마 탄광에는 1939~1945년 1000명이 넘는 조선인이 동원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화장 매장 허가증을 근거로 사망자가 122명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너무 힘들어 섬을 나가려고 신체 절단까지 생각했다.” “도주해서 잡히면 고무 튜브로 피부가 벗겨질 정도로 맞고 고문을 당했다.” “살고 싶지도 죽고 싶지도 않았다.” 최장섭씨 등 군함도 생존자들은 군함도를 쇠창살 없는 감옥으로 회고한 바 있다. 이러한 어두운 역사는 오늘날 ‘외국인들도 한때 동료로 일했다’는 짧은 설명으로 묻혔다.

■평화를 위한 ‘진정한 사과’

진정성 잃은 평화 염원 ‘학 모형 탑’ 나가사키 원폭 평화공원에 있는 학 모형과 종이학들. 배문규 기자

군함도 투어에서 안내받는 건물들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아니다. ‘산업혁명 유산’ 시기를 1910년까지로 제한했기 때문에 하시마에서는 메이지 시기 갱 터와 방파제 유구만 해당한다. 그런데도 하시마 전체가 산업유산인 양 소개되고 있다.

한성민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일본이 근대를 1945년까지로 규정하면 강제 노동이 쟁점으로 부상하다보니 메이지 시대로 명칭과 기간을 제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일본의 ‘근대화 역사 미화’ 시도에 대해 한국과 일본의 시민사회가 강하게 비판하자 유네스코에서도 해당 시설과 관련한 “역사의 전모를 밝힐 것”을 일본 정부에 권고했다. 결국 일본 정부도 강제 노역(forced to work)이 포함된 사실을 수용했지만,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 해당 표현이 강제 노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입장을 뒤집으며 이중적 태도를 보였다.

이영채 교수는 “세계유산 등재는 아베 정부에서 메이지유신 150주년(2018년)에 맞춘 이벤트였는데 자랑스러운 역사에 부정적인 측면을 담고 싶을 리가 없지 않겠냐”고 했다. 메이지유신의 정신적 지도자인 요시다 쇼인의 ‘쇼카손주쿠(松下村塾)’가 산업유산에 포함된 것도 논란거리다. ‘정한론’을 주창하고 이토 히로부미 등 메이지유신의 주역을 길러낸 인물의 서당을 세계유산에 포함시킨 것이다. 전쟁에 대한 반성과 침략을 받은 지역에 대한 배려가 있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평화헌법’을 고쳐 일본을 전쟁 가능한 국가로 바꾸려는 최근 움직임과도 동떨어진 일은 아닐 것이다.

일제의 폭주는 1945년 8월9일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지면서 파멸을 맞았다. 인권운동가였던 오카 마사하루 목사(1918~1994)는 일본 정부의 가해 책임을 묻고 조선인 피폭자와 강제동원 문제를 드러냈다. 그의 생각과 행동에 공감했던 지인들은 일본의 가해 역사를 알리는 나가사키 평화자료관을 세웠다. 이 자료관의 사키야마 노보루 사무국장은 “진정한 평화와 반성을 위해선 과거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와 기업이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본에선 1965년 ‘한일협정’으로 마무리된 일이고, ‘사과’ 담화도 여러 차례 했다는 볼멘소리도 있다. 얼마나 더 잘못을 빌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한국 내에서도 ‘반일’ 감정을 정치·사회적으로 소모하며 감정의 골이 깊어져왔다. 그사이 정작 피해 당사자들은 소외됐다.

원자폭탄이 떨어진 나가사키는 전쟁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이기도 한 일본의 이중적인 모습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 나가사키에선 평화를 염원하는 종이학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나가사키(일본) | 배문규 기자 sobbel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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