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경 칼럼] 문재인 정부발 한·일 관계 파탄의 공포

이하경 2019. 4. 22.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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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때 한국 IMF로 내몬 건
YS '버르장머리' 기억한 일본 반격
일본이 한국 버리고 중국 택하면
한국엔 돌이킬 수 없는 재앙 될 것
이하경 주필
일본 대사를 지낸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은 일본의 심리를 훤히 꿰뚫고 있다. 한국이 1997년 외환위기 때 국제통화기금(IMF)행이라는 굴욕을 겪게 한 결정타는 일본의 단기외채 회수였다고 본다. 그는 “한국을 가장 잘 지켜 주는 게 일본이라고 생각해 왔던 뉴욕·런던·홍콩의 금융시장은 큰일이 난 걸로 보고 앞다퉈 한국에서 돈을 뺐다”고 했다.

2년 전인 1995년 11월 14일 김영삼 대통령과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의 정상회담 직후 기자회견에서의 발언이 화근이었다. “난징대학살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장쩌민은 “어렸을 때 내가 직접 봤는데도 일본은 그런 일 없었다고 잡아뗀다”고 했다. 김 대통령은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이 계속되고 있다.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고 했다. 일본은 경악했다. 대통령 외교비서관으로 현장에 있었던 유 전 장관은 “이 발언이 IMF행을 불렀다”고 했다.

문재인 정부가 위안부 합의를 무력화하고, 강제징용자에 대한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이 나오면서 한·일 관계는 악화일로다. 일본은 “한일협정에 근거한 국가 간 약속을 깼다”고 주장하고 있다. 가해자인 일본이 국제 사회에서 피해자 행세를 하는 어이없는 상황을 한국이 자초했다. 외환위기 때처럼 일본이 한국에 치명상을 입힐 가능성을 우려하는 사람이 많다. 일본은 이미 위안부 소녀상 설치를 문제 삼아 한·일 통화스와프 협상을 중단시킨 상태다.

신각수 전 주일 대사는 양국 경제를 “세계 밸류체인과 부품 공급망에서 상호 의존적 관계”로 정리한다. 허창수 전경련 회장은 “한·일 관계가 좋을 때 우리 경제가 좋았다”고 한다. 요즘은 뭔가 이상하다. 박철희 서울대 교수는 “한국으로 올 투자가 중국과 대만으로 향하는 사례들이 나오고 있다”고 했다.

거꾸로 중·일은 밀월관계다. 일본은 내일 중국 해군창설 70주년 기념 관함식에 제국주의의 상징인 욱일기를 단 자위대 호위함을 참가시킨다. 중국이 일본을 얼마나 편안하게 대하는지를 상징하는 사건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올해 6월 28일 오사카에서 열리는 G20 회의 참석차 일본을 찾는다. 8년7개월 만의 중국 최고지도자 방일이다.

아베는 지난해 10월 500여 명의 경제사절단과 함께 일본 총리로는 7년 만에 중국을 공식 방문했다. 30조원 규모의 중·일 통화스와프 협정을 맺었고 20조원 규모의 기업 간 경제협력에도 합의했다. 제3국 진출 경제협력과 투자를 위한 펀드도 함께 조성하기로 했다. 세계 2,3위 경제 대국인 중국과 일본이 트럼프의 통상압박에 맞서 손을 꽉 잡은 것이다.

중국은 이제 미국으로부터 첨단기술을 얻기 어렵다. 미국의 중국산 수입품 관세 인상으로 수출이 줄고 성장률도 둔화되고 있다. 일본과 친해져야 할 이유가 넘친다. 그래서인지 난징대학살 추도식에서도 일본을 겨냥한 과격한 발언이 사라졌다. 미래를 위해 과거의 치욕에 입을 다문 것이다.

7월 참의원 선거를 앞둔 아베로선 즐거운 상황이다. 여기서 일본이 경제협력의 큰 물줄기를 중국 쪽으로 완전히 돌려버리면 한국엔 재앙이 될 것이다.

치밀한 일본은 미국의 환심을 사는 데도 탁월하다. 아베는 이번 주에 워싱턴으로 날아가 트럼프 대통령 부인 멜라니아의 49번째 생일을 축하하고 트럼프와 골프도 친다. 트럼프도 다음 달 새 일왕 나루히토의 즉위식에 참석하고, 6월에는 G20 정상회의 참석차 다시 일본을 찾는다. 트럼프의 방한 소식은 없고, 일본과의 셔틀 정상회담은 2011년 이후 8년째 가동되지 않고 있다. 주한 고위 외교관은 “양국이 잘못 지내면 북한이나 중국에 써야 하는 에너지가 약화된다”고 우려했다. 이쯤 되면 정부가 비상등을 켜야 하는 것이 아닐까.

1998년의 김대중·오부치 선언은 한·일 관계의 빛나는 전범(典範)이다.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반성과 사죄가 담긴 최초의 공식 합의 문서다. 한국도 금융·투자·기술이전 등 일본의 대한국 경제지원의 기여를 인정했다. 과거를 직시하되 미래로 가자고 외친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일본과의 역사 화해를 남북 교류협력과 동아시아 공동체 비전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동북아 냉전 해체라는 큰 그림을 담았다. 한반도 평화를 최우선으로 하는 이 정부가 깊이 새긴다면 일본을 절대로 소홀히 하지 못할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의 전략은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 “일왕 사죄” 발언의 단견(短見)과 대비된다. 한국에 대한 일본 기업의 투자가 2012년 45억 달러에서 다음해 26억 달러로 추락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정부는 왜 양국관계의 파탄을 방치하는 것일까. 국내정치를 겨냥한 과잉 민족주의, 반일 정서가 문제다. 아무리 밉고 서운해도 일본과 잘 지내야 아베를 통해 트럼프의 미국이 한국을 인정하게 할 수 있다. 경제와 안보 리스크도 해소하고, 대북정책에서의 역할도 확보된다. 지금의 상황은 너무 위험하다. 한·일 관계에 정통한 이낙연 총리라도 나서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의 지혜로운 결단을 기대한다.

이하경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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