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오동 전투' 영웅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 이번에도 '논의만'

2019. 4. 22.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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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21일 카자흐스탄에서 독립유공자 계봉우·황운정 지사의 유해를 봉환했다.

문 대통령은 임시정부 수립 100돌을 맞아 독립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장군의 유해 봉환을 적극 추진했으나, 카자흐스탄 정부와 논의를 계속하기로 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장군의 유해 봉환은 1992년 카자흐스탄과 국교를 맺은 뒤 김영삼 정부 시절부터 면면히 이어져온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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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전쟁 상징' 유해 봉환 난항
1995년 김영삼 정부도 추진했으나 아직까지 이역에
고향이 평양인 점을 들어 북한에서 연고 주장
남북갈등 우려한 고려인들도 선뜻 나서지 않아
직계 후손 남아 있지 않아 동의 구하기 힘들어
국립묘지 규정상 면적에 따른 예우도 고민거리
문재인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각) 카자흐스탄 누르술탄 국제공항에서 열린 독립유공자 계봉우·황운정 지사 유해 봉환식에서 추모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21일 카자흐스탄에서 독립유공자 계봉우·황운정 지사의 유해를 봉환했다. 그러나 이들과 함께 묻힌 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이번에도 돌아오지 못했다. 문 대통령은 임시정부 수립 100돌을 맞아 독립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장군의 유해 봉환을 적극 추진했으나, 카자흐스탄 정부와 논의를 계속하기로 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장군의 유해 봉환은 1992년 카자흐스탄과 국교를 맺은 뒤 김영삼 정부 시절부터 면면히 이어져온 과제다. 김영삼 정부는 1995년 장군의 유해 봉환을 추진했지만, 분단의 현실이 간단치 않았다. 당시 북한은 장군의 고향이 평양인 점을 들어 연고를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남북 갈등을 우려한 고려인들도 장군의 유해 봉환에 선뜻 나서기 힘들었다.

남북과 고려인들이 모두 어정쩡한 상태에 놓이면서 장군의 유해는 이역을 떠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남북이 안중근 의사 유해 공동발굴을 논의하는 것처럼 장군의 유해 봉환을 위한 협의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북쪽에서 유행 봉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상의할 필요가 있다”며 “장군의 유해 봉환이 남북관계를 풀어가는 데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정부가 지난해 홍범도 장군 탄생 150주년을 기념해 발행한 우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장군의 후손들도 모두 세상을 떠났다. 외국에 있는 독립유공자의 유해를 봉환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후손들의 동의가 필요한데, 동의를 구할 이들이 없어진 것이다. 보훈처 관계자는 “카자흐스탄에는 장군을 기리는 고려인들이나 관련 단체가 적지 않지만, 직계 후손은 없는 것으로 안다”며 “카자흐스탄 정부와 고려인들의 뜻을 모으는 게 급선무”라고 말했다.

고려인들이 장군을 동포사회의 구심점으로 여기는 점도 유해 봉환에 신중한 접근을 요구한다. 고려인들은 크질오르다에 장군의 묘역을 조성하고 장군을 민족의 지도자로 기린다. 카자흐스탄 정부도 1994년 ‘홍범도 거리’를 선포할 정도로 장군이 고려인 사회의 구심점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보훈처 관계자는 “고려인 사회에서 차지하는 장군의 위치가 워낙 높아 그들의 의견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장군의 유해가 봉환된다고 하더라도 상징성에 값하는 예우를 하기가 여의치 않다는 지적도 있다. 국립묘지법에는 대통령의 직에 있었던 사람이 아니면 1평의 묘역을 제공하도록 규정돼 있다. 이번에 유해가 봉환된 황운정 지사도 1평의 묘역에 안장됐다. 고려인들로선 묘역을 성역화하면서까지 기려온 장군을 1평의 묘역에 모시는 게 마뜩하지 않을 수 있다. 정부로선 장군의 유해를 달리 안장할 경우 규정과 형평에 어긋난다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

1868년 평양에서 태어난 장군은 일제 치하에서 의병투쟁에 몸을 던졌다. 대한독립군 총사령관까지 오르며 간도와 연해주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1920년 장군이 이끈 봉오동 전투의 승리는 독립운동의 가장 빛나는 장면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장군은 이어진 청산리 전투에서도 큰 구실을 했다. 1937년 스탈린 정권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연해주에서 크질오르다로 가야 했던 장군은 이곳에서 75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움막집에서 살며 고려극장의 경비로 생계를 이을 만큼 힘든 말년을 보냈다. 정부는 1962년 장군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유강문 선임기자 m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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