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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치니 '억' 하고.. 박종철 고문치사

김삼웅 입력 2019.04.24.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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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 82회] 5공정권에 치명타를 가해 노태우의 〈6·29선언〉이라는 '항복문서'를 이끌어냈다

[오마이뉴스 김삼웅 기자]

         
한 사람의 무고한 죽임은 때로 역사의 물굽이를 바꾸게 한다.

60년 3ㆍ15 부정선거 때 마산의 김주열이 그랬고, 87년 민중항쟁의 전초가 된 박종철 고문치사가 그랬다. '죽임'은 사고사가 아닌 포악한 권력의 '살인'이기 때문이다.

"1월 14일 오전 8시 10분경 관악구 신림동 하숙방에서 연행돼 오전 9시 16분경 조반으로 밥과 콩나물을 주니까 조금 먹다가, 어젯밤 술을 많이 먹어서 밥맛이 없다고 냉수나 달라고 하여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10시 51분 경부터 심문을 시작, 박종운 군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억' 하고 소리를 지르며 쓰러져 중앙대부속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 경 사망하였음." 
 
▲ 박정기 이사장이 독재정권에게 고문당해 숨진 아들 고 박종철 열사의 동판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박정기 이사장이 독재정권에게 고문당해 숨진 아들 고 박종철 열사의 동판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 장윤선
87년 1월 15일자 중앙일보 사회면에는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2단짜리 작은 기사가 실렸다. 이날 오후 이 기사 내용의 사실을 확인하는 기자들에게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그동안 숨겨오던 박종철(21세, 서울대 언어학과 3년) 군의 사망사실을 처음으로 시인하면서 그 경위로 앞의 인용 내용을 밝혔다. 이 자리에 배석했던 치안본부 박처원 대공담당 5차장은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쓰러졌다"고 '유명'한 망언 한 마디를 덧붙였다.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 군이 수사관 6명에 의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 연행되어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사건 관련 수배자 박종운(26살, 사회학과 4년 재적)의 소재파악을 위한 조사를 받던 중 수사요원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의 고문으로 이날 11시 20분경에 숨졌다. 이들은 물고문과 전기고문으로 박종철을 숨지게 하고 단순 쇼크사인 것처럼 은폐조작했다.
  
경찰의 사건조작 은폐에도 불구하고 물고문과 전기고문의 심증을 굳히게 하는 최초 검안의 오연상 교수의 증언과 부검의 황적준 박사의 증언이 잇달아 신문지상에 보도되자 경찰은 자체조사에 나서, 사건발생 5일 만인 1월 19일 물고문 사실을 공식 시인하고, 조한경과 강진규를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고문치사) 혐의로 구속했다.

맨 처음으로 박군의 시체를 본 오연상 교수(중앙대 부속 용산병원 내과의)는 "박군은 병원에 옮기던 중 사망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14일 오전 11시 45분쯤 대공분실 조사실에 도착했을 때 이미 숨진 상태였으며, 자신이 도착했을 때 박군의 복부가 확연히 드러날 정도로 부푼 상태였고 청진기 진단결과 복부 등 몸 속에서 꼬르륵 하는 물소리가 들렸는데, 쇼크사는 심장마비가 먼저 오고 호흡곤란이 생기므로 쇼크사는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고 경찰의 사인발표를 정면으로 부정했다.
  
또 부검을 집도한 황적준 박사는 출혈반이 생기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전기 충격요법이나 인공호흡을 했을 때도 생길 수 있으며 특별한 치명상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목과 가슴 부위에 피멍이 많이 발견됐다"고 역시 경찰발표와 다른 견해를 밝혔다.
    
궁지에 몰린 경찰은 1월 19일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2차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부검결과 사망원인은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사였으며 복부팽만은 조사관의 인공호흡과 초진 의사의 호흡기 주입으로 인해 공기가 위장에 들어가 생긴 일시적 현상이라는 것이었다.

폐조직 검사 결과 수분이 검출되지 않았으며, 폐기공 현상은 과거 폐결핵 병력에 의한 폐손상 흔적이고 왼손 부위와 머리 부위의 타박상은 연행과정에서 저항으로 생긴 부상이라는 등 여전히 은폐조작으로 정확한 사인규명을 거짓으로 일관했다.
     
검찰도 제대로 사인규명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경찰의 주장을 그대로 인정하는 듯이 발표했다. 여기에 경찰은 박종철 군의 시신을 부검한 후 매장하지 않고 서둘러 화장함으로써 증거를 인멸시켰다. 각 언론사에는 보도지침을 내려 축소보도하도록 하는 등 정부가 이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하려고 기도하여 많은 국민의 분노를 샀다.
 
고문치사 사건 진상의 일부가 언론에 공개되고 정부가 계속하여 은폐조작하려는 사실이 드러나자 야당과 종교단체들이 들고일어났다.

신민당이 임시국회 소집과 국정조사권 발동을 요구하는 등 정부 여당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에 나서고, 재야ㆍ종교단체들은 규탄성명 발표, 진상규명 요구 농성에 이어 각계 인사 9천여 명으로 구성된 '박종철군 국민추도회 준비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야당과 재야단체들은 추도회와 49재 등을 지내면서 고문정권 규탄 및 민주화 투쟁을 전개했다.
      
▲ 김만철씨 일가 '귀순'을 알리는 언론보도(동아일보, 1987. 2. 9) '따뜻한 남쪽나라'로 가고 싶다던 김만철씨 일가 11명은 당국의 설득이 주효해 1987년 2월 8일 김포공항으로 입국하여 기자회견을 한 후 <대방동 수용소>로 이동하였다. 이들의 '귀순' 소식은 언론에 대서특필되면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국민적 항의와 관련된 기사를 덮어버렸다. 신문 왼편 구석에 몰린 "추도회관련 40명선 구속방침"이라는 기사가 보인다.
ⓒ 동아일보
특히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박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범이 따로 있다는 내용의 진상조작 사실을 폭로하여 국민에 다시 한 번 충격을 주었다. 이 폭로로 황정웅 경위, 반금곤 경장, 이정호 경장이 고문공범으로 구속됐으며, 범인 축소조작 은폐사건과 관련 박처원 치안감과 대공수사2단 5과장 유정방, 5과 2계장 박원택 등이 추가 구속되었다.
 
위기에 몰린 전두환은 5월 26일 노신영 국무총리, 장세동 안기부장, 정호용  내무장관, 서동권 검찰총장 등 권력 내 핵심인물에 대한 문책인사를 단행했으나, 국민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국민은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더욱 격렬하게 전개하여 곧바로 6월항쟁으로 이어짐으로써 이 사건은 5공몰락의 기폭제가 되었다.  
     
 
박군의 고문치사 1주기에 터진 담당 부검의 황적준 박사와 처음으로 이 사건의 수사를 담당했던 안상수 검사(당시)의 증언으로 5공정권의 부도덕성과 축소은폐가 다시 한 번 백일하에 드러났다.
 
황 박사는 "당시 부검결과 경부압박 질식사로 판명돼 이를 보고했으나,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부검소견서를 변경토록 지시했으며 외상 부분도 빼도록 했다"라고 폭탄선언을 했으며, 안 변호사는 "박군 사건의 중요성에 비추어 검찰이 직접 수사하려 했으나 관계기관대책회의에서 초동수사를 경찰에 맡기기로 결정함으로써 사건을 조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는 충격적인 증언을 했다.
  
이 사건은 5공정권에 치명타를 가해 노태우의 〈6ㆍ29선언〉이라는 '항복문서'를 이끌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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