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천방지축 개 구슬이가 건네는 사랑과 위로..'나는 개다' 펴낸 백희나 인터뷰

이영경 기자 2019. 4. 25.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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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서울 용산 구 이촌동의 작업실에서 신작 <나는 개다>를 펴낸 백희나 작가를 만났다. 직접 인형을 만들어 사진으로 찍어 그림책을 만드는 백희나가 인형 하나를 손보고 있다. 이석우 기자 foto0307@kyunghyang.com

백희나 작가의 그림책 <알사탕>(책읽는곰)에서 유독 눈길을 끄는 캐릭터가 있다. 지친 듯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을 자주 보이는 얼룩무늬 개 구슬이. 주인공 동동이가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알사탕을 먹자 구슬이는 말한다. “네가 오해하는게 있는데 네가 싫어서가 아니라, 내가 너무 늙어서 그래.” 개슴츠레 뜬 눈이 짠해 보이는 늙은 개 구슬이가 주인공이 된 그림책 <나는 개다>(책읽는곰)가 출간됐다. <알사탕>의 프리퀄(전사)에 해당하는 이야기로, 구슬이가 동동이네로 처음 와 가족이 된 이야기, 젊디 젊은 시절의 구슬이의 이야기다.

“<알사탕> 작업을 하고 있었을 때, 제일 먼저 만든 게 <나는 개다>에 표지로도 쓰인 구슬이 인형이었어요. 아련하면서 슬퍼보이기도 하고, 조는 것 같기도 하고 표정이 재미있게 나와서 구슬이를 주인공으로 하는 책을 만들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지난 12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이촌동에 있는 백희나의 작업실을 찾았다. 작업실엔 <나는 개다>에 등장하는 인형 50여개가 테이블 위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누워 있는 구슬이, 귀를 긁는 구슬이, 동동이, 아빠, 할머니까지…. 모두 백희나가 손으로 하나하나 만든 것이다. 진흙과 비슷한 스컬피라는 재료를 손으로 빚어 구워 만들었다. 구슬이의 수염을 표현하기 위해 실까지 한올 한올 붙였다.

“방울이, 순영이, 구슬이에게”. <나는 개다> 첫 장에 적힌 문구다. 백희나는 어린 시절부터 개와 함께 자랐다. 책에 등장하는 방울이와 구슬이 모두 그가 직접 길렀던 개들의 이름이다. 책에서 구슬이는 슈퍼 집 개 방울이의 넷째로 태어나 젖을 떼자마자 동동이네 집으로 온다. 피붙이와 떨어져 낯선 곳에 온 구슬이는 이내 동동이와 좋은 친구가 되고, 잘 넘어지고 잘 우는 동동이를 보고 “인간의 아이는 참으로 나약하다. 내가 지켜주는 수밖에”라며 측은히 여기기도 한다.

“겉으로 보면 철부지 개의 이야기로 보이지만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고 포기하지 않고 사랑을 나눠주는 개의 이야기에요. 지난 1월 <구름빵> 저작권 소송에서 패소했어요. 이렇게 작가의 권리가 보잘 것 없다면 모든 걸 쏟아부어 만드는 작업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회의가 들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 견디며 살아가는게 생명있는 존재의 의무가 아닌가 생각했어요. 이 책이 ‘괜찮다’라고 말해주는 느낌이었어요.”

<구름빵>은 불공정 매절 계약의 대표적 사례로 알려졌다. 백희나는 <구름빵> 저작권 문제로 오랫동안 분쟁을 벌여왔다. 신인 작가였던 그는 모든 저작권을 출판사에 넘기는 계약을 체결했다. <구름빵>은 이후 애니메이션, 뮤지컬 등으로 제작되며 4400억원 규모 수익을 창출했지만, 백희나에게 돌아온 것은 1850만원 뿐이었다. 그의 의사와 상관없이 <구름빵>을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과 후속 그림책이 만들어졌고, 아시아 판권은 중국 회사로 넘어갔다. 그는 첫 작품으로 명성을 얻었지만 동시에 큰 상처와 트라우마도 얻었다. 그는 “나쁜 선례를 남겨선 안된다는 생각에서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고통 속에 만들어진 작품은 역설적이게도 따스하다. <나는 개다> 제작 과정에선 특별한 이벤트가 있었다. 구슬이의 가계도를 그리기 위해 SNS를 통해 독자들로부터 반려견 사진을 받았다. 피부병에 걸려 병원에 남겨진 후 한 가족에게 입양돼 15년째 잘 살고 있는 따랑이, 집에 온 첫날 긴장해 있다가 베토벤 음악을 듣고 잠이 든 벤, 일광욕을 좋아하는 믹키 등 독자들은 개들의 특징과 사연을 보내왔고, 이들이 가계도의 주인공이 됐다. 백희나는 “개들이 카메라를 들고 있는 주인을 바라보며 찍은 사진들이어서 절절한 눈빛과 사랑의 아우라가 느껴졌다”고 말했다.

<나는 개다>는 구슬이의 시점으로 만든 책이다. 모두가 나간 후 홀로 식구들을 기다리는 장면은 한없이 쓸쓸하고, 산책 시간에 거리를 쌩쌩 달리는 장면, 산책길에 고양이를 마주치고, 새를 쫓다 놓치는 장면 등은 개가 질주하듯 역동적으로 그려진다.

백희나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물었다. 구슬이가 동네 개들을 향해 짖으면 다른 개들이 “아우우”하고 응답하는 하울링 장면에 대해선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 느낌, 가족의 확산, 연대를 의미하는 장면이어서 소름끼치게 좋았다”고 말했다. 그래도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은 산책 장면이다. 하루종일 식구들을 기다린 구슬이가 할머니와 산책을 나서며 질주하는 장면이다. “개의 행복한 표정을 생생히 표현하면서도 원근감을 주기 위해 기술적으로 공을 많이 들였다. 제일 처음 만든 장면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백희나는 <장수탕 선녀님> <이상한 엄마> <알사탕> 등 판타지가 들어간 작품들을 만들어왔다. 회사에서 일하느라 바쁜 엄마를 대신해 선녀님이 찾아와 아픈 아이를 돌봐주고, 목욕탕에서 선녀님이 나타나 함께 신나게 논다. 백희나와 함께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우지영 편집장은 “도움이 절실한 사람에게 꼭 그만큼의 도움을 주는 이야기다. 작은 판타지이지만 현실에선 불가능하기 때문에 마음에 남는다”고 말했다.

백희나는 지난해 말 일본 각지 서점 직원 3000명이 뽑은 ‘MOE 그림책서점대상’을 수상한 데 이어 최근 마이니치 신문사와 전국학교도서관협의회가 주최하는 ‘일본그림책상’에서 번역 그림책상과 독자상을 동시 수상했다. <알사탕>은 국내에서 15만부 판매됐고, 뮤지컬로 제작돼 현재 상연중이다. 백희나는 “<구름빵>은 뮤지컬로 만들어진지도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아이들과 함께 봤다. 영광스러우면서도 괴로웠다. <알사탕>을 제작할 때는 처음부터 함께 상의해 존중받는 느낌을 받았다. 중견 작가인데 존중받는 느낌을 처음 받았다는 게 창피하고 슬픈 일”이라고 말했다.

백희나에게 그토록 고된 인형 만들기와 애니메이션 작업을 계속하는 이유를 물었다.

“제가 만든 이야기는 현실에 발을 붙이고 있는 작은 판타지가 많아 현실에 가까운 입체작업을 많이 한 것 같아요. 입체든 그림이든 별 상관 없는 이야기도 있지만, 품은 많이 들어도 ‘만드는 과정이 재미있어서’ 입체로 만들 때도 있습니다. 이 작은 세계와 공간에서 주인공이 살아가고 있다니, 꼭 인형놀이를 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개다>에 사용된 인형 전체 사진. 진흙과 비슷한 재료인 스컬피를 빚어 구워 만들었다.
백희나 작가는 처음 스토리를 구상하면 스토리보드를 만들고 가제본한 책 ‘더미북’을 만들어본다. <나는 개다>의 더미북.
구슬이 엄마 ‘방울이’의 인형을 손보고 있는 백희나 작가. 이석우 기자 foto0307@kyunghyang.com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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