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루스벨트는 진주만 기습을 미리 알았다"

박인규 프레시안 편집인 2019. 4. 26. 0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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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국가 미국·2강-③] 미국의 2차 대전 참전 : 겉모습과 실제

[박인규 프레시안 편집인]

 미국 역사학자 하워드 진은 "2차 대전이 세계인의 생각에 미친 치명적이고 심대한 장기적 효과"에 대해 "전쟁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생각을 계속 존속시킨 것"이라면서 이로 인해 "1차 대전의 무의미한 살육 이후 철저하게 불신됐던 전쟁이 다시 한 번 숭고한 것이 됐다"고 지적한다.

'전쟁의 정당화'야말로 2차 대전이 낳은 최악의 결과라는 것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미국인은 2차 대전을 '좋은 전쟁(Good War)'으로 생각한다. 미국은 군국주의 일본의 비열한 기습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참전했다, 그러나 전쟁을 통해 세계의 평화와 정의를 회복했으며 세계의 지도국가로 등극했다는 것이 2차 대전에 대한 미국의 공식 서사다. 군사력에 의한 세계 질서의 유지, 이것이 '좋은 전쟁'의 핵심 요지다. 2차 대전을 계기로 되살아난 미국의 군사주의는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하지만 1차 대전 이후 2차 대전 참전 직전까지 대다수 미국인들은 전쟁을 혐오하고 불신했었다. 1차 대전의 경험 때문이었다. 1917년 4월 2일 참전을 결정한 윌슨 행정부는 자원병 100만 명 확보를 목표했지만 모집 공고 6주 동안 입대를 자원한 사람은 7만 3천 명에 불과했다. 결국 자원이 아닌 징병을 통해 병력을 충원해야 했다. 윌슨 행정부는 방첩법, 선동금지법 등 악법을 제정해 시민들의 반전운동을 철저히 억압하는 한편, 대대적 선전 선동을(참전 결정 직후 결성된 선전기구 CPI의 홍보 요원은 자그마치 7만 5000명이었다) 통해 국민들의 전쟁 의욕을 고취시켰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1차 대전의 실상이 드러나면서 미국인의 반전여론은 극에 달했다. 수정주의 역사가들과 의회 청문회 등을 통해 미국의 참전은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JP 모건 등 대기업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고 이를 위해 무고한 미국 시민의 목숨이 희생됐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라던 1차 대전의 결과, 세계가 평화로워지기는커녕 새로운 전쟁의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미국인들의 강력한 반전 여론에 따라 미 의회는 1935년 이후 4차례 중립법을 제정해 미국의 해외 전쟁 참여를 막으려 했다. 이러한 미국인의 전쟁 불신은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 때까지 계속됐다. 다시 말해 진주만 기습이 없었다면 미국의 참전은 지극히 어려웠을 것이다.

이 때문에 미국 역사학자 스티븐 암브로스는 미국은 2차 대전에 '참가한(enter)' 것이 아니라 '끌려 들어갔다(pulled-in)'고 말한다. 즉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고, 나흘 뒤인 12월 11일에는 나치 독일이 미국에 선전포고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아시아와 유럽의 전쟁 모두에 뛰어들게 됐다는 것이다.

실제로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0년 11월 대선에서 '전쟁 불참'을 공약으로 3선에 성공했다. 또한 진주만 기습 다음 날, 12월 7일을 '치욕의 날(Day of Infamy)'로 지칭하며 일본의 비열한 기습 공격을 강력히 비난했다. 미국은 최후의 순간까지 일본과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애썼지만 일본은 선전포고도 하기 전에 미국의 주요 군사기지를 기습하는 만행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의 여론은 일거에 반전된다. 일본에 대한 증오심으로 국민 모두가 총력전 체제로 돌입한 것이다. 평화를 위해 노력했던 미국에 대한 일본의 비열한 기습 공격, 이것이야말로 '2차 대전은 좋은 전쟁'이라는 공식 서사의 핵심 요소다.

평화를 지향했던 미국은 선의의 피해자인 반면 기습 공격을 감행한 일본은 사악한 전쟁범죄자라는 인식이 미국 국민들에게 깊이 각인됐다. 이제 미국의 참전은 완벽하게 정당하며 또한 필요한 것이 됐다. 1차 대전 이후 철저하게 불신됐던 전쟁이 다시 한 번 숭고한 그 무엇이 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참전 과정에 대한 이러한 공식 서사는 과연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 것일까? 그렇다고 보기 어렵다. 진주만 기습 직후부터 지금까지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당시 미국은 강력한 경제 제재 등을 통해 일본을 전쟁으로 몰아갔다는 의견에서 진주만 기습을 사전에 알고도 고의로 방치했다는 주장까지 다양한 반론이 제시되고 있다.

이들 반론의 핵심은 과연 '진주만 공격은 미국을 속인 일본의 기만적 기습이었나?'라는 것이다. 나아가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한다.

'루스벨트를 비롯한 미국의 핵심 정책 입안자들은 일본을 자극함으로써 일본이 먼저 미국을 공격하도록 도발한 것은 아닌가?'

'미국이 일본의 비밀 암호문을 감청하고 해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을 감춤으로써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부추긴 것은 아닌가?'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막거나 방해할 수도 있었던 미군의 군사 활동을 미국의 고위 정치지도자가 고의로 저지하지는 않았는가?'

'진주만 수정주의(Pearl Harbor Revisionism)'로 불리는 이러한 반론은 1948년 미국 역사가 찰스 비어드가 <루스벨트 대통령과 1941년 전쟁의 도래 : 겉모습과 실제에 관한 연구>를 펴내면서 본격 제기됐다. 비어드는 미국 역사학회 회장을 지낼 정도로 저명한 역사학자였으나 이 저서에서 루스벨트를 맹비난하면서 학문적으로 철저하게 매장된다.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국민적 영웅 루스벨트에 대해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인 원흉으로 비난한 대가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상당수 역사가, 논픽션 작가, 언론인들에 의해 수정주의적 반론은 계속 제기되고 있다. 태평양전쟁에 대한 최고의 논픽션 작가로 인정받는 존 톨랜드의 <치욕: 진주만과 그 이후>(1982년), 전쟁 당시 해군 병사였으며 이후 신문기자로 활동하면서 17년간 20만 건의 관련 문서를 발굴하고 암호해독 요원들과의 인터뷰 등을 통해 진실을 파헤친 로버트 스티네트의 <기만의 날: 루스벨트와 진주만의 진실>(1999년), 그리고 역사학자 스티븐 스니고스키의 논문 <진주만 수정주의를 옹호함>(2001년)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진주만 기습 직후부터 1946년까지 5년간 9차례 조사가(해군과 육군의 자체 조사, 의회 청문회 등) 진행된 데 더해 전쟁 후 50년이 지난 1995년에도 국방부 재조사가 진행됐을 정도로 진주만의 진실은 여전히 논란거리다.

1995년, 진주만 군사책임자였던 허즈번드 키멀 해군 제독과 월터 쇼트 육군 중장의 유족들은 루스벨트 행정부가 일본의 진주만 기습에 관한 정보를 유독 이들에게만 전달하지 않음으로써 이들이 (진주만 방어에 태만했다는) 직무유기의 죄를 뒤집어쓰고 2계급 강등 예편 당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재조사를 통해 이들의 계급과 명예를 회복시켜줄 것을 요청했다.

국방부는 7개월 조사 끝에 50쪽의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유족의 요청을 기각했다. 또한 1999년에는 미 상원이 키멀과 쇼트의 명예 회복에 관한 결의안을(찬성 52, 반대 47) 채택하고, 2000년 클린턴 대통령에게 이들의 계급을 복원시켜줄 것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50여 년이 지난 후까지도 당사자 측의 이의 제기가 있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렇다면 진주만 기습의 진실은 무엇인가? (4편에 계속됩니다.)

박인규 프레시안 편집인 (inkyu@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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