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전에는 모두 친절했다 총학생회장 당선.. 차별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이영빈 기자 2019. 4. 27.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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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이영빈 기자의 휘슬]
외국인 최초 총학생회장, 포항공대 대학원생 인도인 사르카르씨
소우라브 사르카르 포항공대 대학원 총학생회장은 서글서글하다. 한국에서 당한 차별에 대해 묻기 전 “실례인데 괜찮겠느냐”고 운을 띄우자 “어서 하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웃음이 많은 그도 대학원생 처우 개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학생회장으로서 반드시 고쳐야 할 문제”라며 진지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한국에 사는 어떤 외국인은 우리보다 더 우리를 잘 알게 해 준다. 포항공대(포스텍) 대학원 총학생회장에 당선된 인도인 소우라브 사르카르(27)씨도 그렇다. 그에게 한국은 '온·냉탕'이 공존하는 이상한 나라다.

그는 2015년부터 한국에서 살았다. 포항공대 화학공학과 교수에게 직접 메일을 보내 대학원생으로 입학했다. 인도에서 건너온 지 5년째, 소우라브는 "코리아와 사랑에 빠졌다"고 했다. 한국어를 전혀 못 하지만 연구실 동료와의 회식 자리에는 열 일 제치고 간다.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실에서 동고동락하며 한국인의 정(情)을 느꼈다. 닭갈비, 파전, 삼계탕을 즐겨 먹는다. 지난달 결혼한 아내도 이 땅으로 와 살 예정이다.

지난해 12월 소우라브가 포항공대 대학원 총학생회장에 당선됐다. "외지인을 따뜻하게 품어준 학교를 직접 바꿔보고 싶어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했다"고 그는 말했다. 외국인 총학생회장은 우리나라 최초. 그때부터 소우라브를 바라보는 시선이 냉랭하게 뒤집혔다. 친절한 줄 알았는데 한국인들이 독설을 내뱉기 시작했다. 인종차별적 비난도 쏟아졌다. 5년간 들어본 적 없는 말들이었다.

인도 출신 총학생회장의 등장으로 먼저 소셜미디어가 요동쳤다. 그의 당선 소식에 '왜 평화로운 캠퍼스에 분란을 일으키느냐' '한국보다 못사는 후진국 인도인,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같은 게시글이 올라왔다. 소우라브는 "어디에서도 접해본 적이 없는 가시가 돋친 반응이라 아팠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에겐 한국도 인종차별 국가라는 뜻이다.

'사 회장(사르카르 회장)'은 이달 첫째 주부터 공식 업무를 시작했다. 투표에 참여한 315명 중 161명의 지지를 받았다. 지지자의 과반이 한국 학생이었다. 외국인 학생의 몰표로 뽑히지 않았다는 뜻이다. 핵심 공약은 조교 임금 인상, 1~2년 차 대학원생을 위한 심리상담센터 설립이었다. 지난 16일 포항공대 대학원 학생회관에서 만난 그는 시종일관 이렇게 말했다. "한국인, 외국인이기 전에 우리는 포항공대 대학원생입니다. 국적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첫 외국인 총학생회장

대학교 총학생회는 교내 모든 학생을 대변한다. 회장은 학교가 불합리한 요구를 할 경우 학생을 대표해 맞서 싸우고, 학교 외부에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1970~80년대에 왕성하게 활동한 '운동권'도 대부분 총학생회였다. 학부가 아닌 대학원 총학생회라 할지라도 하는 일이 크게 다르지는 않다.

어떻게 출마하게 됐나.

"외국인 기숙사 시설이 많이 낡았다. 학생회에 몇 번 제보했지만 반응이 없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영어로 메일이 와서 읽지 않았다'고 하더라. 주요 공문들도 모두 한국어로 온다. 하지만 포항공대는 '바이링구얼(Bilingual·이중 언어를 할 줄 아는) 캠퍼스'다. 올해 세계 대학 순위에서 142위다. '이런 불편이 있으니 내가 직접 학생회에 참여하겠다'고 했지만 '소통이 잘 안 될 것 같다'며 거절당했다. 그래서 학생회장 출마를 결심했다."

외국인이 학생회장 선거에 나간다고 하자 뭐라고 하던가.

"비웃고 비난했다. 그러나 나는 출마 자체로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 '우리는 외국인이기 전에 학생'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엄연히 포항공대 대학원 학생이잖나. 사람들은 가끔 이 사실을 잊는다."

누가 비웃었나.

"내 친구들, 많은 인도 친구들이 비웃었다. 당선되니 벙 찌더라. 내가 그들에게 한 방 먹인 셈이다(웃음)."

한국어를 못한다고 들었다.

"'안녕하세요' 말고는. 이곳의 거의 모든 대학원생은 영어 강의를 듣고 영어로 토의하고 영어로 시험을 치른다. 학생회에서 필요한 전문적인 용어는 그때마다 사전을 찾아보면 된다."

언어에 익숙지 않은 타지에서 리더로 나선다니, 어려운 결정이었을 텐데.

"어렸을 때 굉장히 가난하게 자랐다. 두 살 때부터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 모든 것을 스스로 해야 했다. 나쁜 상황을 타개하는 데 익숙하다. 공부, 생활비 등 모든 걸 직접 해결했다. 겉으로는 어려워 보이지만 부딪쳐 보면 수월한 경우가 많다. '외국인이 생활하는 데 불편이 있다면 내가 직접 불편을 없애자'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NGO(비정부기구)에서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도왔다. 내가 직접 NGO를 만들고 운영한 경험도 있다. 학생회 지휘에도 자격이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다."

외국인으로서 계속 불편을 느꼈나.

"나보다 앞서 이런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있었다. 그래도 나아지지 않았다. 2011년에 학생회가 만들어졌는데, 지금까지 외국인은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5년 만에 처음 겪은 '인종차별'

"이 나라는 기본적으로 중동·인도 등지에서 온 이들을 '불쌍한 존재'로 여기며 동정한다. 그러나 평범한 이주민에게 권력이 생기면 불편한 심리가 발동한다. 동등한 권리를 가졌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이자스민 전 국회의원에게 과도한 비판이 쏠렸을 때 한 전문가의 분석이다. 이자스민 전 의원은 "국회 밖에서 안으로 들어왔을 뿐인데 사회운동을 하던 때와 달리 온갖 비난을 받았다"고 했다.

언어 문제도 그렇고, 당선 후 부정적인 반응이 많았다.

"내 당선 소식이 소셜미디어에서 100번 이상 공유됐다. 다들 매우 화난 것 같았다. '왜 평화로운 캠퍼스에 하필' '후진국에서 온 사람이 학생회장이라니' 같은 반응이었다. 한국인이 가진 이런 차별적 시선을 없애지 않는다면 '큰 나라'는 될 수 있을지언정 품격 있는 '글로벌한 나라'는 될 수 없지 않을까."

소우라브 사르카르 포항공대 대학원 총학생회장이 학생회관 근처 건물 계단에 서 있다. 그는 “언어나 피부색은 나에게 장애물이 아니다. 더 나은 대학원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회장 선거에 출마했다”고 했다. / 포항=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글로벌한 나라라니.

“‘큰 나라’는 유명하고 대단한 나라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휴대폰을 만들지 않나. 반면 ‘글로벌한 나라’는 명성에 걸맞은 매너를 갖춘 나라다.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동등하게 대하는 나라 말이다.”

―당선 전에는 이런 반응을 느낀 적이 있었나.

“전혀 없었다. 그래서 굉장히 놀랐다. 한국에서 내 삶은 언제나 평온하고 기쁜 기억들뿐이었다. 연구실에서도 다들 먼저 말 걸어주고 사이 좋게 지낸다. 아마 내가 얻은 161표 중 약 75%가 한국 학생들에게서 받은 표일 것이다. 그래서 반응에 더 경악했다. 한국 사회의 한 단면을 볼 수 있어 좋았지만.”

―좋았다니?

“원색적인 비난도 한 사회를 발전시키는 데 일조한다. ‘악플’은 사회를 비추는 거울과 같다. 한국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내가 속한 사회를 정확히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무례하지만 이런 생각이 든다. 만약 당신이 인도인이 아니라 유럽·미국 등 서구권에서 온 백인이었다면 반응이 어땠을까.

“확신하기는 어렵다. 벌어진 일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다. 그러나 굳이 가정해 보자면 아마 긍정적인 반응이 많았을 것이다. 차별은 옳지 않다고 생각은 하지만, 잠재적인 무의식에는 여전히 그런 멸시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후진국이라든지, 외모에 대한 비난은 없었을 것 같다.”

―미국 하버드, 영국 옥스퍼드에서 한국인이 총학생회장에 뽑힌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박수 쳐줬다. 그러나 현지에서는 ‘백인 학생회’ 같은 집단을 비공식적으로 만들어 그 한국 학생을 비난했다고 한다. 당신도 같은 상황일 듯한데.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나보다 훨씬 뛰어난 마이클 잭슨, 버락 오바마, 오프라 윈프리, 무하마드 알리도 같은 상황을 마주했다. 동기부여가 된다. 미국의 정치인 프랭크 클라크는 ‘비판은 나무에 오는 비와 같아서 뿌리를 파괴할 정도가 아니라면 더 튼튼하게 해준다’고 말했다. ‘더 좋은 대학으로 바꾸라’고 나를 응원해주는 거라고 생각한다.

―무섭지는 않은가. 앞에서는 미소 지으면서 트위터에는 욕설을 남기는 셈인데.

“괜찮다. 안 죽는다(웃음). 지금은 개인 신변보다 총학생회 일이 더 중요하다. 내가 내건 공약, 정책 추진으로 답변하면 된다. 우리 총학생회의 안건은 ‘모든 대학원생에게 익숙해지기’다. 대학원에는 총학생회가 중요하지 않다는 인식이 있다. 그리고 본인들이 얼마나 열악한 노동 환경에 처해 있는지도 모른다. 대학원생 조교 임금 상승은 반드시 해결돼야 한다.”

―얼마나 열악하고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나를 비롯해 대학원생 대부분은 조교 역할을 하는 대신 학비가 없다. 생활비 명목으로 평균 월 80만원 정도를 받는데, 생활을 꾸리기 힘든 금액이다. 하루 두 번, 끼니당 6000원짜리 식사를 한다고 쳐도 한 달에 36만원이 빠진다. 기숙사비·교통비 등을 제외하면 매달 8만원밖에 남지 않는다. 연구 과제를 수행해 받는 포상금도 교수 재량이라 누구는 많이 받고 누구는 거의 받지 못한다. 기본급 인상과 포상금 분배에 대한 조정이 필요하다. 설문조사 후 대의원 회의를 거쳐 구체적인 인상안을 낼 예정이다. 대학원생을 위한 심리 치료도 해야 한다. 일부 대학원생들은 교수나 선배로부터 심한 괴롭힘을 당하기 때문이다. 내 주변에도 우울증에 시달리는 이들이 여럿 있다. 이들을 위해 심리상담센터를 만들 것이다.”

―‘외국인 우대 총학생회’라는 비판에선 얼마나 자유로울까. ‘외국인 학생을 위한 취업 박람회 유치’ 같은 공약은 오해를 살 수 있지 않을까?

“‘글로벌 포스텍’을 만들자는 차원이다. ‘바이링구얼 캠퍼스’라면서 기본적인 준비가 하나도 돼 있지 않다는 비판이 나온다. 기초는 올려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해외 홍보도 적극적으로 해서 외국 인재들이 먼저 찾는 학교로 만들고 싶다. 불합리한 비난은 우리 총학생회의 행보를 보고 나서 해달라.”

나쁜 상황이면 좋은 방법을 찾자

소우라브는 두 살 때부터 이모집에 얹혀살았다. 어머니가 ‘가난해서 못 키우겠다’고 했다. 이모 가족은 그에게 경제적 지원을 조금도 해주지 않았다. 말을 떼고 나서 혼자 헤쳐나갔고, 한국에 오기까지 온갖 허들을 다 뛰어넘었다. 그는 ‘나쁜 상황을 어떻게 역전시키는지 누구보다 잘 안다’고 했다.

―당신의 카스트 계급은 무엇인가. 그게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인도에는 여전히 카스트라는 계급 제도가 있다. 크게 보자면 높은 순서대로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로 나뉘며 결혼, 직업, 식사 등에 제한이 있다).

“나는 농민·상인 계급인 ‘바이샤’다. 그러나 보다시피 나는 교수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있다. 본래는 ‘브라만’이 할 수 있는 직업이었다. 현대 사회에서는 카스트제도에 따른 차별이 거의 없다.”

―아버지는 상인이었다고.

“맞는다. 그런데 내가 태어났을 때 사업이 부도가 났다. 집에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나는 태어난 마을에서 150㎞ 떨어진 이모네 집으로 밀려났다. 살아남으려면 매일 노력해야 했다.”

―생존을 위해 노력하다니.

“끼니를 해결하고, 어디서 공부하고, 어떤 학교에 다니고 등 모두 내가 결정해 행동해야 했다. 가난한 학생을 위한 재단 등에 지원을 직접 신청했다. 좋은 사람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만큼 어려운 학생들을 도와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다. 나는 운이 좋아 일찍부터 좋아하는 공부를 한다.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종교적인 교육을 받아 카스트제도에 묶여 있는 학생들도 있다. 그들에게 더 넓은 세상을 가르쳐 주는 게 내가 할 일이다.”

―부모가 원망스럽지는 않나.

“그들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에 내가 태어났다. 지금은 이해한다. 돌파력을 배우고, 많은 학생을 돕고,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게 된 것 모두 어린 시절 경험 덕이니까. 지금 우리는 살아 있고 잘살고 있다. 괜찮다.”

―대학원 학생회장이 되기까지 그런 경험이 어떻게 영향을 미쳤을까.

“내 인생은 순간순간이 난관이었다. 나쁜 상황이면 넘어서기 위해 최선의 방법을 택해야 한다는 것을 체득했다. 외국 학생이라고 학생회의 관리를 받지 못한다면 차라리 내가 직접 학생회장이 되자. 결론은 간단했다.”

―작년 예멘 난민 문제에 대해 우리 사회는 찬반이 갈렸다. 국내 인구는 줄어가고 외국인 노동자가 들어와 빈 구멍을 메우고 있다. 외국인으로 본 한국 사회는 어떤가.

“한국같이 인구가 줄고 있는 나라에서 외국인 노동자가 늘어나는 현상은 필연이다. 많은 사람이 기피하는 3D 업종을 누군가는 해야 한다. 미국·독일의 이주민은 전체 인구 대비 13%다. 싱가포르는 43%에 가깝다. 한국은 고작 2.9%다. 앞으로 지금보다 더 많이 늘어날 듯한데, 제한하고 차별하기보다는 더 성실하고 유능한 노동자를 데려올 방법을 고민해볼 시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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