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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인간 神.. 그들은 어떻게 일본의 내면을 지배했나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입력 2019. 04. 27.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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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와 시대, 日王의 의미를 읽다]
왕조 교체 없이 이어온 혈통
메이지 이전까지 실권 없었지만 근대 들어 '천황家'에 주목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일본인에게 '천황'은 국민 통합의 상징이다. 일본인의 내면을 깊숙이 지배하는 '천황제'를 이해하는 건 지일(知日)·극일(克日)의 한 방법이기도 하다. 내달 1일 새 일왕 즉위를 맞아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가 '천황'의 역사와 '천황제'의 의미를 이해하는 책 5권을 추천했다.

오는 5월 1일 일본에 새로운 천황(일왕)이 즉위한다. 이름은 나루히토(德仁), 연호는 레이와(令和)다. 기원전 660년 일본을 건국했다는 진무(神武) 천황을 제1대로 삼고 있는데, 그렇게 계산하면 새 천황 나루히토는 126대가 된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학적으로 증명된 것은 아니다. 학계에서는 대체로 6세기 중반부터 지금의 천황가가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로부터만 따져도 약 1500년간 한집안에서 일본의 왕 노릇을 하고 있다. 세계 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이 말은 일본에서는 역성혁명, 즉 왕조 교체가 한 번도 없었다는 말이다. 나라(奈良) 시대 세상을 주물렀던 불교 세력도, 헤이안(平安) 시대 천황 권력을 훨씬 능가했던 귀족 가문도, 그리고 약 700년간 정권을 차지했던 무사 세력도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천황의 자리를 탐하지 않았다. 이 또한 놀라운 일이다.

자고로 일본인들은 이를 두고 다른 나라와 비교할 수 없는[萬邦無比] 일본의 미덕이라고 자찬해왔지만, 그게 그렇게 자랑할 일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이처럼 장구한 세월 동안 특별한 존재로 지속돼 왔으니, 천황이 일본인들에게 각별한 의미를 가지리라는 것만큼은 짐작할 수 있겠다. 고토 야스시가 쓴 '천황의 나라 일본'(예문서원)은 그 기나긴 역사를 통관한다.

사무라이들이 집권했던 약 700년간의 막부 시대(가마쿠라·무로마치·도쿠가와 막부)에 천황은 정신적·문화적으로야 존재감이 없었다고 할 수 없겠지만, 정치·경제·외교·군사 면에서는 명실상부하게 왕 노릇을 하지는 못했다. 그러니 우리가 알고 있는 천황상은 대체로 근대 이후, 즉 메이지 유신 이후 만들어진 천황제에 따른 것이다. 그 시작은 막말기(幕末期·1850~60년대)의 존왕양이 운동이었다. 서양 열강의 위협을 과장되게 해석하여 자신들의 영향력을 높이려고 했던 중·하급 사무라이들은 잠자고 있던 천황의 정치력에 주목했다. 그들이 당시 맹렬히 배우기 시작하던 유학은 존왕 사상을 한껏 고취시켰고, 왕정복고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유학의 눈으로 볼 때 진짜 왕자(王者)는 천황이었고, 에도의 쇼군은 패자(霸者)에 불과했던 것이다. 당시 존왕 사상의 유행은 너무나 강력해서 막부를 포함한 어느 정치 세력도 이를 공공연히 거부할 수 없었다. 강렬한 존왕 사상은 결국 일군 만민의 정치 체제를 지향하게 된다. 천황 아래 있는 건 만민일 뿐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신분제는 약화, 이윽고 무화될 터였다. 하급 사무라이들, 상층 평민들은 여기에 모든 걸 걸었다. 이 에너지가 만들어 낸 것이 약 700년 만의 왕정복고, 즉 메이지 유신이다.

그때 선포된 '왕정복고 대호령'은 재미있게도 모든 일을 진무 천황 때를 모범으로 한다고 선언했다. 기원전 660년 전의 일이 남아 있을 리 없다. 요컨대 짐작, 추측하여 알아서 맘대로 하겠다는 것이었다. 급진적인 서양화 개혁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에게는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들은 어린 메이지 천황(무쓰히토)을 때마침 부설하기 시작한 철도에 태워 전국을 순행시켰다. 단순히 주술적·종교적·문화적 존재가 아니라 국가원수와 국군 통수권자라는 존재감을 일반 국민에게 심어주기 위한 노력이었다. 천황 행렬을 본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인데, 이제 도로와 철길 옆에 서서 천황을 바라보며 일장기를 들고 '반자이(萬歲)'를 외치도록 강요받았다. 다키 고지의 '천황의 초상'(소명출판)과 다카시 후지타니의 '화려한 군주'(이산)는 천황과 국민 대중을 일체화하려는 이 국가적 프로젝트를 묘사한다. 그것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는 그 후 천황에 대한 일본인들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그 극한점은 가미카제 특공대였다.

그런데 메이지 국가의 설계자는 절대 권력자인 천황이 그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했다. 천황이 정치와 권력 싸움에 개입하게 되면 결과의 성패(成敗)가 생기게 마련이고, 그 결과 천황의 권위가 손상될 것을 우려한 것이다. 권위와 권력을 분리한 심모원려였다. 그 설계자가 이토 히로부미다. 근대 일본에서 천황은 절대 권력자라기보다는 절대 권위자로 존재했다. 야스다 히로시의 '세 천황 이야기'(역사비평사)는 메이지·다이쇼·쇼와 천황의 정치 행동을 다루고 있지만 그들을 지탱하고 있던 것은 결국 권위였음을 보여준다.

이로 인해 권력 부침과 격한 정쟁에도 국민 사이에서 천황의 권위는 흔들림이 없었고, 대일본제국의 처참한 패전을 겪고서도 그것은 건재했다. 진주만 기습을 승인한 히로히토(쇼와)가 살아남은 이유다. 아니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그는 '상징 천황'으로 옷을 갈아입고, 1989년 사망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오랫동안 정치 전면에 나서는 일은 없었지만, 그가 병석에 눕자 일본 국민은 '1억 총자숙' 했다. 좌도 우도 없었다. 누가 시킨 것도, 계획한 것도 아니었다. 일본인도 놀랐고 세계도 놀랐다. 벌써 잊은 줄 알았던 천황의 존재감이 국민 개개인의 일상에 극적으로 부활한 순간이었다. 한 일본 지식인은 "천황제의 숨결은 공기에도, 바람에도 길가의 초목과 돌멩이에도 배어 있구나"라고 내뱉고 말았다. 노마 필드는 '죽어가는 천황의 나라에서'(창비)를 통해 그 느낌을 전해준다.

역사와 영토 문제를 둘러싼 한·일 갈등이 격화되면서 일본에서 혐한 감정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악화된 것은 2012년 한국 대통령이 '천황이 무릎 꿇고 사죄하라'고 했다고 보도되면서였다는 점에 일본 전문가들 사이에 이견이 없다. 역사와 영토 문제에서 한국을 이해하려고 했던 많은 일본인이 이 발언으로 인해 돌아서거나 일본 내에서 어려움을 겪게 됐다. 그만큼 천황 문제는 영토나 역사 문제보다 훨씬 일본인들의 내면 깊숙이 닿아 있고, 결이 사뭇 다른 문제다. 따라서 우리가 천황 문제를 다룰 때는 자못 신중하고 세심한 대응이 필요하다. 책임 있는 당국자가 심모원려 없이 발언하는 것은 영토나 역사 문제 해결에도, 나아가 우리 국익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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