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한겨레

위선을 떨다 보면 진심이 생겨날지도 모른다

입력 2019.04.27. 09:46 수정 2019.04.27.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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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김영민의 논어에세이
⑤ 예와 인의 관계

인하지 않으면 예는 의미 없나
예를 반복하면 인 생겨날 수 있나
'논어', 인과 예의 관계 논해

인 없는 예는 위선이다?
위선의 빤스를 내려버리면
쓰레기 매립지를 봐야 할지도
<논어>에는 본성이 “거기서 거기”라고 해도 후천적인 반복 훈련에 따라 사람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취지의 언명이 있다. 주검을 대충 파묻지 않고, 예식에 맞추어 유골을 하나하나 추리고, 형태대로 가지런히 놓고, 칠성판 위에 삼베로 묶은 유골을 놓은 뒤, 적절한 장송곡에 맞추어, 천천히 관에 넣는 행위를 반복하다 보면, 원래는 없던 엄숙한 마음이 생겨날지도 모른다. 게티이미지뱅크

학생들의 요청으로, 주제넘게 연애 관련 발언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평생 연애에 미숙했던 사람이라 길게 드릴 말씀은 없고, 두가지만 언급하고 싶습니다. 사람은 배가 고프면 만사에 의욕이 없어지거나 사나워지는 경향이 있으니, 데이트 중간에 디저트 먹는 일을 소홀히 하지 말기 바랍니다. 그리고 데이트 장소를 정할 때 화장실 동선을 섬세히 고려하기 바랍니다. 실외로 나가서 철문을 열어야 하는 화장실 동선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찬 바람을 쐬면, 달아올랐던 기분이 확 식지 않겠습니까.

연애에 미숙했던 사람으로서 할 말이 많은 분야는 데이트 기술이라기보다는 실연의 기술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첫사랑이 이별을 통고하겠죠? 안 그럴 가능성보다는 그럴 가능성이 높겠죠? 갑작스러운 이별 통고를 받으면, 일단 그 통고가 정말 갑작스러운 것인지 자문해봐야 합니다. 통고를 받는 입장에서야 청천벽력 같을지 몰라도, 이별을 통고하는 사람은 오랫동안 고민한 결과일 가능성이 높죠. 당신은 계속되는 경고 신호를 무심코 흘려보냈는지도 모릅니다. 언젠가 여자친구가 “우리 만날 때 이렇게 기운이 빠지고 그러면 안 되는데…”라고 작게 탄식한 적이 있었나요? 그때 혹시 “기운을 내!”라고 하이파이브 한번으로 때우지 않았나요? 청천벽력 같은 하이파이브에, 여자친구는 이미 ‘아, 이놈은 발전이 없구나’라고 마음을 접었을 수도 있습니다.

실연의 기술

기왕에 이별 통고를 받았다면, 떠나가지 말라고 애원하지 않는 편이 재결합의 가능성을 높인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당신이 ‘찌질하게’ 보여서 헤어지자고 하는데, 거기다 대고 처량하게 매달리면 얼마나 ‘더 찌질해’ 보이겠습니까? 당신이 둔감하다고 여겨서 고민 끝에 헤어지자고 하는데, 그 고민을 헤아리지 못하고 매달리면, 얼마나 더 둔감해 보이겠습니까? 매달리지 마십시오. 헤어지자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래, 헤어져”라고 대답하고 두말도 하지 말고 돌아서 나오십시오. 그리고 절대 먼저 연락하지 마십시오. 어디 동굴 같은 데 들어가 마늘즙과 쑥즙을 먹으며 버티다 보면, 헤어지자던 여자친구가 다시 연락해올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기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냉큼 돌아 나오기가 어디 쉬운가요? 눈물 콧물 타액 식은땀 등 얼굴의 각 구멍에서 액체란 액체는 다 흘러나올 지경일 겁니다. 이별 통고를 받자마자, 제발 돌아와달라고 간청하고 싶을 겁니다. 바로 이때! 위선이 필요합니다. 안 그런 척하는 겁니다. 태연한 듯 “그래, 헤어져”라고 또박또박 말하고, 미사를 마치고 떠나는 신부처럼 의연히 돌아 나오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위대한 위선을 해낼 수 있을까요? 반복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제 우리 그만 헤어져”라는 말을 녹음한 뒤, 매일 아침 들으며 “그래, 헤어져”라고 반응하는 연습을 반복하는 겁니다. 마치 종소리만 들으면 침을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될 때까지 반복합니다. 그리하여 이별 예식에 숙달되면, 헤어지자는 말만 들어도, 자동적으로 입에서는 “그래, 헤어져”라는 말이 튀어나오고, 몸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게 될 겁니다. 누가 악수하자고 손을 내밀면 자동으로 손을 맞잡게 되는 것처럼. “우리 이만 헤어져.” “그래, 헤어져.” 이어지는 문 닫는 소리, 쾅.

이러한 이별의 예식은 재결합의 가능성을 높입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에 여자친구는 의아해하게 됩니다. 아, 내 상황 파악이 틀렸던 게 아닐까, 이 친구에게 내가 모르는 면이 있었구나 등등. 코미디언 그라우초 마크스는 말한 적이 있죠. 나를 받아주는 클럽 따위에는 가입하고 싶지 않다고. 늘 자기를 받아주던 남자라서 소중한 줄 몰랐고, 그래서 선뜻 헤어지자고 말했으나, 막상 자기에게 매달리지 않는 모습을 보니, 헤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스멀스멀 드는 겁니다. 그러다 뾰족한 대안이 생기지 않으면, 다시 연락이 올지도 모르는 거죠. 끝내 연락이 안 오면 어떡하냐고요? 그거야 제 알 바 아니죠. 적어도 안전 이별은 이루어진 것 아닌가요?

인이 먼저냐 예가 먼저냐

“그래, 헤어져”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이별의 예식에 숙달되었을 때, 그 사람의 마음은 과연 어떤 상태일까요? 파블로프의 개처럼 아무 생각이 없을까요? 아니면, 숙달된 예식에 상응하는 어떤 자아 혹은 내면이 형성되었을까요? 이 사안은 <논어>에서 말하는 인(仁)과 예(禮)의 관계에 대한 문제와 닮았습니다. 합당한 내면(仁)이 없이, 외적인 행동인 예를 반복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예를 반복하다 보면 없던 내면도 생겨나는가, 바람직한 내면을 갖추고 있으면, 결국 그것이 예로 드러나게 되는가와 같은 문제들.

어떤 학자들은 인이 있어야 예의 진정한 실천이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이때 예는 내면의 표현에 가깝겠죠. 아닌 게 아니라, 논어에는 사람이 인하지 않으면 예의 실천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묻는 대목이 나옵니다.(人而不仁,如禮何) 이런 입장에 서면 내면의 인이 동반되지 않은 채로 겉으로만 하는 예는 위선과 다름없어 보일 겁니다.

그런데 위선이 나쁘기만 한 걸까요? 사람들이 무턱대고 ‘위선의 빤스’를 내려버리면 우리는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 안에 아름다운 내면 풍경이 아니라 쓰레기 매립지가 있다면 어떡하란 말입니까. 누가 위선의 장막 아래 덮어둔 쓰레기를 구태여 들여다보고 싶겠습니까? 들여다보고 싶다고요? 너 나 할 것 없이 다 같이 쓰레기라는 사실을 확인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요? 미국의 소설가 커트 보니것은 위선을 떠는 모습 말고 별도의 자아란 없으니, 위선 떠는 데 유의해야 한다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죠.

그렇다면 위선의 빤스를 입은 사회는 하의실종의 야만 상태보다는 나을 겁니다. 누가 아나요? 위선을 계속 떨다 보면, 예식을 지속적으로 수행하다 보면, 어떤 내면이 생겨날지도 모릅니다. <논어>에는 그런 입장을 뒷받침하는 듯한 문장이 있습니다. 본성이 “거기서 거기”(相近)라고 해도 후천적인 반복 훈련(習)에 따라 사람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相遠)는 취지의 언명이 있죠.(性相近也,習相遠也) 주검을 대충 파묻지 않고, 예식에 맞추어 유골을 하나하나 추리고, 형태대로 가지런히 놓고, 칠성판 위에 삼베로 묶은 유골을 놓은 뒤, 적절한 장송곡에 맞추어, 천천히 관에 넣는 행위를 반복하다 보면, 원래는 없던 엄숙한 마음이 생겨날지도 모릅니다. 즉 예를 꾸준히 지키다 보면, 단순히 예라는 행동을 반복하는 단계를 넘어서, 예를 지키는 ‘사람’이 되어버릴지도 모르죠. 마치 아름다운 그림을 보다 보면, 단순히 아름다운 그림을 보는 단계를 넘어서, 아름다운 그림을 보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처럼.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으로는 그에 상응하는 내면이 생기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우디 앨런의 영화 <젤리그>의 주인공은 주변 사람들에게 동화되고 싶은 나머지, 그 사회에서 요구하는 행동 패턴을 그대로 따라 하지요. 정도가 심한 나머지, 유대인 랍비들 사회에서는 아예 랍비가 되어버리고, 흑인들 사회에서는 아예 흑인이 되어버릴 정도죠. 자아 따위는 없는 양, 주변 환경에 동화되려고만 들죠. 그런 행동을 한다고 해서 젤리그의 마음속에서 그에 상응하는 내면이 자라날까요? 영화 속에서 젤리그는 끝내 노이로제에 걸리고 맙니다. 즉, 영화 <젤리그>는 소외되기 싫다고 해서 사회에서 요청되는 행위를 위선적으로 반복하다 보면, 노이로제에 걸리게 된다고 경고하는 것 같습니다. 따돌림당하지 않기 위해서 사회가 요구하는 예절에 순응하기만 한다고 만사형통은 아니라는 거죠.

행동과 구별되는 내면 존재할까

<논어>의 세계 속에서는 내면(仁)과 외면(禮)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실로 중궁(仲弓)이 인(仁)에 대해서 묻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죠. “문을 나가서는 큰손님을 뵌 듯이 하며, 백성을 부릴 때는 큰 제사를 받들듯이 하며,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은 타인에게 하지 않는다. 그러면 나라에도 집안에도 원망이 없을 것이다.”(出門如見大賓, 使民如承大祭, 己所不欲, 勿施於人, 在邦無怨, 在家無怨.) 즉, 인에 대해 말하면서 내면의 상태를 이야기하기보다는 외적인 처신만 이야기하고 있죠. 만약 인이 결국 외적인 처신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상대의 내면 같은 것에는 결코 다가갈 수 없는 것이겠죠. 우리가 내면의 진심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사실 겉으로 드러난 행동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컴퓨터 자판으로 쳐서 출력한 반성문보다 자필 반성문에 더 진심이 담겼다고 믿는 경향이 있죠. 그러나 타이핑을 했건, 자필로 썼건, 다 겉으로 드러난 행동에 불과할 뿐 당사자의 내면을 알 길은 사실 없죠.

그러나 외적 행동규범으로만 환원되지 않는 자아 혹은 내면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증거는 <논어> 텍스트에 많습니다. “삼베 모자를 쓰는 것이 예이다. 그런데 지금은 실로 짠 것을 쓴다. 그것은 검소한 것이니 나는 다수 사람들을 따르겠다. 당 아래서 절하는 것이 예인데, 지금은 당 위에서 절한다. 이것은 교만한 것이니, 다수 사람과 다르더라도 나는 당 아래서 하는 것을 따르겠다.”(麻冕, 禮也. 今也, 純, 儉, 吾從衆. 拜下, 禮也. 今拜乎上, 泰也. 雖遠衆, 吾從下.) 예를 따르는 일에 관련하여 기존의 전통, 다수의 의견, 그리고 개인의 판단이라는 세가지 잣대를 제시한 뒤에, 결국 공자는 개인의 판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고 있죠. 과거에 어떻게 해왔든, 다수가 어떻게 생각하든, 합당한 근거가 있다면 자기 길을 가고 말겠다는 자아(吾)의 목소리가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외적인 행동규범에 수동적으로 따르는 존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필요하다면 행동규범 자체를 바꿀 수도 있는 존재들이라는 거죠.

이렇게 글을 쓰고 있을 무렵, 지난번 강연을 들었던 청중 한분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이메일이 도착했습니다. “적은 확률이라도 그녀가 돌아오길 원한다면 ‘그래, 헤어져’라고 냉큼 돌아 나오는 건 실제로 효과가 있습니다! 제 경우가 그랬어요. 실제로 재결합해서 첫사랑과 결혼에 골인했죠. 하지만 첫사랑이 꼭 이루어져야 할까요? 첫사랑의 아픔을 하나쯤 가슴에 간직하면 평생 가슴에 보석 하나 가지는 것과도 같습니다. 첫사랑과 헤어지면 20대 싱그러운 순간에 박제된 모습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어요. 첫사랑이 이루어져 아기가 태어나 새벽 3시에 기저귀를 가는 현실은 생각보다 아름답지 않습니다.”

▶ 김영민 :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동아시아 정치사상사, 비교정치사상사 관련 연구를 해오고 있다. 저서로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가 있다. 정밀 독해와 역사적 맥락을 강조한 ‘논어 에세이’ 시즌 1(2017.9.16~2018.3.17)에 이어, 시즌 2에서는 논어에 담긴 인간과 사회에 대한 사상을 더 집중적으로 다룬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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