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기본소득이 지역화폐를 만났을 때

김태훈 기자 2019. 4. 27.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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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대학생 이지성씨(25)가 지난해 만든 ‘버킷리스트’ 항목들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죽기 전에 꼭 해봐야겠다, 하는 정도로 거창한 건 아니고 분기마다 청년배당이 25만원씩 나오니까 그 돈 쓸 곳을 미리 정리해 뒀던 거죠.” 굳이 목록을 정리한 이유는 청년배당으로 나온 지역화폐를 쓸 사용처가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이씨가 사는 경기 성남시는 2016년부터 청년배당이라는 이름의 정책을 도입해 만 24세 청년들에게 한 해 동안 100만원을 지역화폐로 지급했다. 올해부터는 성남시를 넘어 경기도 전체가 청년기본소득 제도를 도입했다. 내용은 사실상 크게 다르지 않다. 해당지역 안에서, 특히 소상공인 영업체를 중심으로 쓸 수 있는 지역화폐가 기본소득의 지급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이다.

경기 성남시 분당구 금호행복시장에서 한 시민이 지역화폐인 성남사랑상품권으로 과일을 사고 있다. / 이상훈 선임기자

분기별로 25만원씩 연간 100만원

이씨가 지난 한 해 동안 받은 100만원 중 남은 일부는 구매 예정 목록 마지막에 남은 물건들을 사는 데 쓸 예정이다. 지난해 1년 동안 지역화폐로 지급되는 청년배당을 받으면서 같은 돈으로 얼마나 합리적으로 소비할 수 있을지에 관한 요령도 생겼다. 성남시의 지역화폐는 상품권 형태의 ‘성남사랑상품권’이다. 모바일로도 간편하게 쓸 수 있지만 종이 상품권으로만 지불할 수 있는 가게가 더 많으니 종이 상품권으로 받아두는 게 더 나았다. 또 상시 6% 할인된 액수로 살 수 있으니 오프라인 상점에서 써야 할 때는 현금 대신 지역화폐를 이용하는 게 더 낫다는 것을 경험했다. 이씨는 “가맹점 중에 식당이 많은데, 친구들끼리 모일 때 상품권으로 회비를 걷어서 평소 학생들이 가기엔 조금 비싼 식당에 가서 쓰면 유용했다”고 말했다.

지역화폐 상품권을 받는 소상공인 입장에서는 어떨까. 성남시 중원구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전성환씨(54)는 “현금이나 다를 게 없으니 받기도 쓰기도 편하다”고 말했다. 신용카드 업체에 지불할 수수료가 절감되는 데다, 급하게 음식재료가 떨어져 가까운 시장에 갈 때 손님들에게서 받은 상품권을 그대로 내도 되기 때문이다. 전씨는 “식자재 납품업체는 성남 상품권을 안 받기 때문에 완전히 현금과 똑같다고 할 순 없지만, 일단 장사하는 입장에서 보면 손님들이 상품권을 써야 하기 때문에라도 골목상권에 들르니까 그 자체로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경기도를 중심으로 전국의 기초·광역 지방자치단체에서 기본소득 또는 그와 비슷한 성격의 정책을 지역화폐와 묶어 도입하는 모습이 하나의 모델로 정착하고 있다. 하지만 따져보면 기본소득과 지역화폐는 반드시 결부되는 것은 아니다.

지역화폐는 말 그대로 특정지역에서 통용되는 화폐로 처음 시작할 때는 정부나 지자체보다는 민간에서 자발적인 실험을 위해 탄생했다. 1983년 캐나다 코목스밸리 마을에서 시작된 ‘레츠(LETS·Local Exchange and Trading System)’가 선구적인 형태로, 국내에서도 도입 초기 대전 등지에서 이 ‘레츠’라는 이름을 지역화폐의 대명사로 써왔다. 그러나 가맹점을 확보할 수 있는 영역이 좁고 발행권의 가치를 보증할 수 있는 방법에 한계가 있어 국내에서는 민간 차원의 지역화폐 시도가 주춤했던 반면, 최근 들어 각 지자체들이 도입에 앞장서면서 행정력을 투입해 기존의 문제점도 상당히 해소됐다.

이에 따라 올해 들어 전국 지자체들의 지역화폐 발행량은 급격히 늘어나는 양상이다.

전국 지자체 지역화폐 발행 급증

행정안전부의 ‘전국 지자체 최근 3년간 지역화폐 발행 현황’을 보면 2017년 3063억원, 2018년 3712억원이었던 전국 지자체의 지역화폐 총 발행 액수는 올해 1조8256억원으로 급격히 늘어났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1000억원대를 넘긴 광역지자체가 경북 1곳(1170억원)에 그치고 그 뒤를 전북(770억원)이 이었으나, 올해 이들 두 지자체에서만도 각각 2135억원(경북), 3543억원(전북)으로 발행액을 크게 늘리고, 경기와 인천에서 각각 4388억원, 3000억원씩을 발행하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발행규모가 커지면서 기본소득 또는 무상복지 정책의 일환으로 지역화폐를 지급함에 따라 나타나는 부작용 역시 감소할 것으로 보인다. 성남시의 청년배당 도입 초기 지급받은 상품권을 현금으로 바꾸기 위해 액면가보다 크게 할인해 파는 경우가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 일부 지자체에서 지역화폐 도입을 장려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10%까지 할인해 지역화폐를 판매하고 있고 굳이 현금으로 바꾸지 않아도 사용할 수 있는 가맹점의 범위가 넓어졌다. 무엇보다 지역화폐 유통량 중 지자체가 정책 차원에서 무상으로 지급하는 비율이 크게 줄어들면서 그간 기본소득과 지역화폐의 결합이 낳은 부작용들이 대부분 상쇄되는 상황이다.

특히 전통적인 기본소득과 달리 지역화폐와 결합하는 경우 보편적 복지와 함께 지역경제 활성화를 도모할 수 있다는 평가도 있다. 유영성 경기연구원 상생경제연구실장은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소득불평등이 가장 심한 편에 속하므로, 소득불평등 개선을 목표로 하는 실험이 필요하다”며 “기존의 선별적 복지와 달리 기본소득은 자격 여부 심사에 따른 과다한 행정비용과 불공정성 문제, 그리고 수급대상자에 대한 낙인효과로부터 자유롭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지역화폐와 기본소득의 관계를 두고 좀 더 검토할 여지도 적지 않다. 기본소득의 취지는 누구에게나 어디서든 사용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추게 한다는 데 중점을 두지만, 지역화폐는 특성상 사용범위가 특정지역으로 한정된다는 점에서 서로 배치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역화폐와 기본소득의 결합에는 지역의 주민과 이해관계자들까지 직접 참여하는 네트워크와의 연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2019 기본소득 국제콘퍼런스에서 ‘기본소득과 지역화폐’ 발표자로 나서는 김병조 울산과학대 교수는 “지자체 주도 상품권형 지역화폐는 비정부·비영리기구나 사회적 경제 영역 못지않게 지역의 당사자, 이해관계자, 노동자 등이 자발성과 자치의식으로 참여하는 구조가 돼야 한다”며 “각 경제주체들의 역할을 더욱 구체화시켜야 지역화폐와 기본소득을 매개로 한 지역경제 활성화를 추구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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