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 한국에서도 닻 올랐다

주영재 기자 2019. 4. 27. 17:2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더불어민주당 김영진 의원이 4월 2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같은 달 29~30일 경기도 수원에서 열릴 2019 대한민국 기본소득 박람회를 소개하고 있다. 경기도는 이달부터 경기도 31개 시·군에 3년 이상 거주한 만 24세 청년들에게 분기별로 25만원씩 100만원을 ‘청년기본소득’으로 지급한다. / 연합뉴스

내년 졸업을 앞둔 대학생 이대원씨는 올 가을 경기도 ‘청년기본소득’을 신청할 생각이다. 청년기본소득은 경기도 31개 시·군에서 3년 이상 계속 거주한 만 24세의 청년들에게 분기별로 25만원씩 1년간 100만원을 지역화폐로 지급하는 제도다. 지난 4월 8일부터 1분기 접수를 받는데 이씨는 만 24세가 되는 올해 3분기 때 신청할 수 있다.

이 돈은 모든 구성원 개개인에게 아무 조건 없이 정기적으로 지급하는 소득이라는 의미에서 ‘기본소득’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국가 장학금을 받을 때처럼 소득분위를 파악할 수 있는 서류를 작성하고, 부모님의 동의서를 받을 필요가 없다. 이씨는 “소득과 같은 자격을 묻거나 사용처를 묻지 않아 받는 사람을 신뢰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같은 전공을 하는 또래 박현보씨도 이씨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다. 박씨는 “소득을 심사하는 경우 재산을 축소해 신고하는 식으로 악용할 수 있지만 기본소득은 누구나 조건 없이 똑같이 받으니 그런 부작용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씨는 제도가 안착해서 이후에는 노인들에게까지 확대가 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표했다. 그는 단점보다는 장점이 부각되는 제도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중국어를 전공하는 대학 4학년생 김성수씨도 올해 3분기 청년기본소득 신청 대상자다. 김씨는 “이번 학기에 장학금 신청을 위해 소득수준을 재평가받았는데 어떤 기준에 따라 평가했는지 (소득이) 바뀐 게 없는데도 더 높은 분위로 판정을 받아 장학금이 덜 나왔다”며 “(기본소득은) 이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자유롭고 편리하다”고 설명했다.

조건 없이 주는 돈이라는 점에서 보수진영에선 ‘현금 퍼주기’ ‘포퓰리즘’이라는 비판을 하지만 이들은 동의하지 않았다. 박씨는 “기본적으로 돈이 풀리면 소비도 늘어서 경제가 선순환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며 “제도가 계속 시행되면 못받았던 사람도 받게 되고, 돈은 돌고 돌게 되니 누구에게 불이익이 간다고 보긴 어렵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지역화폐로 주기 때문에 지역경제를 살릴 수 있다는 장점이 크다”며 “청년취업이 힘든 상황에서 미래의 노동자들을 위한 사회의 투자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돈을 허투루 쓰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기우에 불과하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생활체육을 전공하는 이씨는 “돈을 받으면 아르바이트를 한두 시간이라도 줄여서 자격증을 따기 위한 공부를 하든지 자기 전공을 살릴 수 있는 활동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일주일에 20~30시간씩 일하면서 한 달에 80만~100만원 정도를 벌고 있는 김씨는 분기마다 25만원씩 받는 정도로는 아르바이트를 줄일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봤다. 그러나 기본소득으로 식비를 대신하거나 생활비를 아낄 수 있어서 취업 관련 공부에 쏟을 여력이 더 생길 것이라고 기대했다.

기본소득, 한국에서도 닻 올랐다

“자신의 삶에 대한 결정권을 스스로 행사할 때, 소득이 안정적이고 분명하다는 것을 확신할 때, 자기계발을 추구할 수단이 있다는 것을 알 때 개인의 존엄이 꽃필 것이다.”

미국의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암살되기 직전 마지막으로 펴낸 책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혼돈인가 공동체인가>에서 기본소득을 주장하며 이렇게 말했다. 킹 목사는 기본소득이 경제적 불안감을 없애고 심리적 안정을 가져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기본소득 혹은 그와 유사한 제도를 주장한 사상가들은 킹 목사 이전은 물론 이후에도 여럿 있었다. 처음으로 기본소득을 주장한 인물로 토머스 모어가 꼽힌다. 그는 1516년 <유토피아>에서 “도둑질이 음식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지구상의 어떤 처벌로도 도둑질은 멎지 않을 것이다”라며 “끔찍한 처벌 대신 모든 사람에게 어느 정도 생활수단을 주는 것”이 해법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의 정치사상가 토머스 페인은 1796년 <토지정의>에서 토지 보유로 얻은 지대소득에서 국가 기금을 거둬 50세 이상 노령층에게 매년 10파운드스털링의 소득을 주고, 21세가 된 성년에게 15파운드스털링을 주자는 제안을 했다. 페인의 주장은 토지가 모든 국민이 평등하게 누릴 권리가 있는 공유자산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헨리 조지 역시 1879년 <진보와 빈곤>에서 “토지는 모든 사람의 공유유산이며, 모든 사람은 거기서 나오는 지대소득을 공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토지 소유자에게서 적정 수준의 ‘국토보유세’를 징수해 기본소득의 재원을 마련하자는 한국 내 기본소득 진영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기본소득은 과거에서 현재로 오면서 점차 이상에서 현실로 바뀌는 모양새다. 미국 알래스카주는 1982년부터 인근 바다에서 나는 석유 수입으로 조성한 기금에서 모든 주민들에게 매년 1000~3000달러를 배당한다. 나미비아와 인도, 핀란드와 캐나다 등지에서도 기본소득 실험이 진행됐거나 진행 중이다.

한국도 2016년 경기 성남시에서 청년배당 지급을 시작했고, 이젠 같은 제도가 기본소득이라는 이름을 달고 경기도 전역으로 확산됐다. 경기도 기본소득 정책의 평가를 담당하는 경기연구원의 유영성 상생경제연구실장은 국내 기본소득이 이제 실험단계를 지나 시행 혹은 실시의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봤다. 유 실장은 “실험이라면 대조군이 있어야 하지만 우린 그렇지 않아 엄밀히 말하면 실험단계는 아니다”라면서 “다만 아직 일반의 관점에선 낯설기 때문에 실험이라는 단어가 더 친근할 수 있겠다”고 했다.

청년기본소득 시행과 함께 4월 29~30일 경기도가 마련한 ‘기본소득 박람회’는 기본소득 논의를 전국에 확산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받는다. 하지만 그 이전에 부의 불평등이 심화하고, 자동화로 인한 일자리 상실 가능성이 커지면서 최근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기본소득 논의 부상한 이유는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이사장인 강남훈 한신대 교수는 “소득과 자산의 격차가 갈수록 커지고 다른 방법으로는 경제를 평등하게 만들어가기 어렵다는 생각을 조금씩 더 하는 것 같다”며 “최근 농민들 사이에서 농민 기본소득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는 것도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의 농사직불금은 농사면적에 따라 지급하기 때문에 땅을 많이 가진 이들에게 돌아가는 몫이 커 불평등을 키울 수 있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전남 해남군은 지난해 전국에서 처음으로 가구당 연 60만원씩 농민 기본소득의 일종인 ‘농민수당’을 올해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해남 외에도 지난 3월 기준으로 경기 여주·이천, 경북 봉화·상주, 전남 강진·장흥 등 14개 기초지자체가 농민수당 도입을 확정하는 등 논의가 확산되고 있다.

기존의 ‘복지국가’ 모델이 한계에 봉착한 상황도 기본소득 논의가 부상한 배경이다. 김교성 중앙대 사회복지학부 교수는 “노동이 예전처럼 자본과 노동의 장기간 계약에 의한 정규직 중심으로 이뤄지지 않고, 불안정 노동자들이 많아지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는 사회보험과 같이 정기적 기여에 기반한 복지제도가 크게 기능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기술 발전이 가져온 노동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기본소득 부상의 원인으로 꼽았다. 로봇과 인공지능을 갖춘 거대자본은 더 많은 부를 갖고 일반 사람은 소비할 수 있는 기본소득마저 잃게 될 수 있다. 이를 대비해 무조건적으로 사회적 급여를 개인에게 주는 방식을 선호하게 됐다는 것이다.

여성과 소수자의 자립을 도와주는 차원에서 기본소득을 도입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일례로 인도 마디야프라데시주에서 2009년 이후 4년간 진행된 기본소득 실험 결과 여성과 장애인, 하층 카스트의 경제적 활동이 증가했다. 특히 이전까지 자기 소득이 없어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던 여성이 베일을 벗고 공동체 활동에 나설 정도로 여성의 권리가 신장됐다.

기본소득 박람회 기조연설자인 애니 밀러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공동설립자는 기본소득을 지지하게 된 배경을 여성의 종속적인 지위와 관련지었다.

그는 “과거에 여성은 남편에게 재정적으로 의존했고, 사회보장 혜택도 가장에 기초해 있었다”며 “기본소득은 여타 유사한 제도와 달리 존엄과 프라이버시, 재정적 자율성을 부여하는 해방의 효과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탄소배당·데이터세 등 새 재원 방안 등장

기본소득을 받으면 시장에서 돈을 받는 ‘임금노동’만이 아니라 사회돌봄, 정치참여와 같은 공동체를 위한 일도 더 많이 할 수 있다. 유 실장은 “일의 노예가 되어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벗어나 공익적이고 창의적인 일에 더 많은 시간을 쓸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점에서 지난 2년간 진행된 핀란드 실험은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성공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중도우파 성향인 핀란드 정부는 2017년 1월부터 2018년 12월까지 2년간 실업수당 수급자(25~58세) 2000명을 대상으로 월 560유로(약 70만원)를 지급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지난 2월 발표된 1차 평가 결과는 실업수당을 받은 경우와 비교해 노동 공급이 줄어들지 않았으면서도 받은 사람들의 행복감이 더 높아졌다는 결론을 내렸다.

김교성 교수는 “많은 사람이 기본소득을 받으면 일을 하려는 의욕이 떨어질 것으로 우려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결론이 나온 것”이라며 “사회정책의 목표가 ‘일을 해라, 말아라’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긍정적인 면은 더 크다고 본다”고 말했다.

기본소득 진영은 아동수당과 노인기초연금, 청년기본소득을 받지 않는 이른바 ‘비어 있는 연령층’에 단계적으로 기본소득을 지급하면서 제도의 보편성을 확보하는 방안을 지지한다. 기본소득 지급액은 도입 단계에선 1인당 월 30만원을 상정한다. 한국의 조세부담률(20%)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수준(24.9%)으로 올리면 약 180조원을 추가로 거둘 수 있는데 이 정도로 가능하다고 본다.

복지제도가 탄탄한 북유럽 국가들의 조세부담률은 45.9%(덴마크), 34.3%(스웨덴), 31.2%(핀란드)에 이른다. 여기에 국토보유세를 매기고 상속세, 금융자산에 대한 과세를 강화하면 부담을 더 낮출 수 있다고 본다.

김교성 교수는 “한국의 조세부담률을 OECD 평균 혹은 북유럽 국가 수준으로 올리면 기본소득과 더불어 지금의 복지서비스까지 유지할 충분한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며 “다만 국민이 증세에 얼마나 찬성할 수 있으며 증세를 이야기할 정당이 있을지가 문제”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양재진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는 “재정에 한계가 있는 상황에서 기본소득을 도입하면 기존 사회복지 급여를 기본소득으로 대체하는 우파 버전이 현실화될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주파수 사용료, 지적재산권과 천연자원 등 ‘공유자산’에 기초한 기금을 만드는 방안도 있다. 미국 알래스카주가 대표적 사례이다. 빌 게이츠가 제안한 로봇세는 물론 탄소세도 기본소득 재원이 될 수 있다. 27명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를 비롯한 3000여명의 미국 경제학자들은 지난 1월 ‘탄소배당과 녹색 뉴딜을 위한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탄소 배출에 세금을 매겨 거둔 수입을 전국민에게 나눠주는 탄소배당을 실시하자고 주장했다.

최근에는 데이터도 새롭게 공유할 부로서 거론된다. 글로벌 시총 상위권을 휩쓰는 정보기술(IT)기업들의 부가 사회 구성원 모두가 기여해 만든 데이터에 기반한다는 생각에서다. 안효상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부소장은 “데이터를 이용하는 플랫폼 기업들에 이용료를 받거나 공유기금을 만들어 이 기금이 플랫폼 기업의 주식 일정 부분을 소유하는 방법으로 부를 환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주영재 기자 jyj@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