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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리를 생리라 불렀는데 그게 쿨하다고요?"

박가영 기자 입력 2019. 04. 28. 06:30 수정 2019. 04. 28.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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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불편러 박기자]생리대 광고도 돌려 말하는 '생리'.."'그날'이 도대체 뭔데?"

[편집자주] 출근길 대중교통 안에서, 잠들기 전 눌러본 SNS에서…. 당신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 일상 속 불편한 이야기들, 프로불편러 박기자가 매주 일요일 전해드립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그날이면 자꾸 신경 쓰여서 '나 괜찮아?'하고 묻곤 했죠."(1997년 생리대 광고)

#"마법같은 여자의그날이 온다. Enjoy your magic day."(2007년 생리대 광고)

#"양이 많은그날밤, 뒤척여요 편한 대로. 비결은그날의 꿀잠템."(2018년 생리대 광고)

'생리'는 어려운 존재다. 남녀노소 '생리'라는 말 자체를 입에 올리기 힘들어한다. 생리대 광고에서조차 생리는 '그날', '마법' 등으로 에둘러 표현된다.

'생리' 혹은 '월경'은 두꺼워진 자궁점막이 떨어져 나가면서 출혈과 함께 질을 통해 배출되는 생리현상이다. 가임기 여성이라면 모두 경험하는 일. 인구 절반이 겪는 현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평범한 일이지만 '생리'라는 단어 자체를 불편하고 껄끄러워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생리 당사자'인 여성도 생리를 어려워하긴 마찬가지다. 월경, 생리 등 직접적인 단어 대신 돌려 말하기 위해 은어를 사용한다. '생리'도 실은 생리현상에서 따온 '월경'의 은어다. 이마저도 사회에서 '빨간 날', '대자연', '그날', '마법' 등 다양한 표현으로 숨겨진다.

다수의 생리대 광고에서 생리혈은 파란색 액체로 미화돼 표현된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생리 은어를 사용하는 건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다. 생리 주기 추적 앱 '클루'와 국제여성건강연합(IWHC)이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전 세계 여성 10명 중 8명이 생리를 돌려 표현하는 은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 세계적으로 '생리' 뜻하는 은유적 표현은 총 5000가지나 된다. 프랑스에선 "영국 군인이 상륙했다"라고 표현한다. 미국 독립 전쟁 당시 영국군이 붉은 군복을 입은 데서 따온 말이다. 네덜란드는 "토마토 수프가 너무 익었다"라고 생리를 돌려 말한다.

'생리'라는 말이 어려운 사회에서 생리대는 조심스러운 물건이 됐다. 생리대를 빌릴 때면 누가 볼까 잽싸게 건네고 빠르게 숨긴다. 여성들은 화장실에 갈 때도 생리대를 주머니, 파우치 등에 넣어가기 일쑤다. 편의점이나 드럭스토어에서 생리대를 살 땐 보이지 않게 검정 봉투 혹은 종이 봉투에 담는다. 들키면 큰일나는 '은밀한' 물건으로 취급받는 것이다.

직장인 이윤성씨(28)는 "여중, 여고를 나왔는데 그 때도 생리대를 숨겨 다녔다. 생리 중이라고 말하는 것도 조심스러웠다"고 회상했다.
"생리대가 마약도 아닌데 왜 숨겨?"…생리 앞에 당당해진 여성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생리를 금기시하는 분위기 속, 여성들은 하나둘씩 반기를 들고 있다. 생리를 생리라고 부르지 못하는 현실에 불편을 느끼는 이들이 점차 늘고 있는 것이다.

취업준비생 김모씨(25)는 요즘 '생리'라는 단어를 거리낌 없이 사용한다. 김씨는 "아직까진 '생리'라고 말하면 당황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남자 앞에서 '생리한다'고 하면 주변 여자 친구들이 더 난리치기도 한다. 생리가 금지어도 아닌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생리대 빌릴 때도 안 숨긴다. 생리는 부끄러운 게 아니다"고 전했다.

직장인 이모씨(30)도 "같이 일하는 동료가 어디 아프냐고 묻길래 '생리통 때문이다'라고 답했다. 그런데 그 동료가 '그런 것까지 말하냐. 정말 쿨한 것 같다'고 했다.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고 말했다.

생리대도 더는 숨기지 않는다. 직장인 권모씨(27)는 "어느 순간 '가임기 여성이 생리대 사는 게 잘못된 것인가. 마약도 아닌데 왜 꼭꼭 숨기는 걸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감춰야 할 이유가 없다는 걸 깨닫고 회사에서도 그냥 생리대 들고 화장실 간다"고 설명했다.

누리꾼 A씨는 "초등학교 때 성교육하는데 양호 선생님이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슈퍼 카운터에 아저씨 있으면 생리대 사지 말고 나오라고 했다. 그래서 그땐 '남자한텐 생리 얘기도 하면 안 되는구나' 싶었다"며 "지금은 당당하다. 생리 때문에 얼굴 붉히지 않는다"고 했다.
"그날이 도대체 뭔데? 아무것도 하기 싫어. 그게 생리야"
생리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기 위한 움직임도 이어지고 있다.

한국 최초 생리 다큐멘터리를 표방한 '피의 연대기'가 지난해 1월 개봉됐다. '피의 연대기'는 '여성들은 왜 생리를 숨겨야 할까'라는 의문에서 시작한다. 영화에 등장한 여성들은 자신들의 생리 경험을 털어놓는다. 생리컵, 탐폰 등 생리용품의 역사와 사용 방법에 대해서도 자세히 다룬다. 숨기는 데 급급했던 생리혈이 공개되기도 한다. 여성이 겪는 생리의 고통과 현실을 솔직하게 보여준 이 영화는 '생리' 이슈를 대중적으로 공론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생리대 브랜드 나트라케어 생리대 광고 중 한 장면.'그 날에도 자신있게 흰 옷을 입으세요'라는 내레이션 들을 여성이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다./사진=나트라케어 광고


최근엔 '진짜 생리'를 보여준 한 생리대 광고가 호평을 받기도 했다. 지난해 말 생리대 브랜드 나트라케어는 여성의 생리를 보다 직접적으로 표현한 TV 광고를 선보였다. 그동안 생리를 '그날', '마법' 등으로 표현해왔던 기존 생리대 광고와 달리 은어가 아닌 '생리'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등장시켜 주목 받았다.

깨끗하고 상쾌한 이미지를 전달했던 국내 생리대 광고의 정형성에서도 탈피했다. 이 광고엥선 "아프고 신경질 나", "절대 상쾌하지 않아", "그게 생리야"라고 말하는 여성의 목소리 등장한다. 생리하는 날 아무것도 하기 싫고, 뭘 입어도 불안한 여성의 심리가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이 광고는 28일 기준 유튜브 조회수 980만회 이상을 기록하는 등 큰 인기를 끌었다. 누리꾼들은 "너무 좋다. 여리여리한 여자가 원피스 입고 목화솜이 담긴 바구니를 든 채 '그날에도 안심!'하는 거 솔직히 별로였다", "생리를 생리라고 하는 광고가 드디어 나왔다", "'그날이 도대체 뭔데'라고 말하는 부분 정말 속 시원하다" 등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

직장인 김모씨(31)는 "더디지만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며 "숨기려 하고 터부시할 수록 '생리' 자체가 잘못인 것처럼 여겨진다. 이게 언어의 힘인 것 같다. 같은 맥락에서 초경했다고 여자가 된 것처럼 축하하는 것도, 폐경이라는 단어 사용도 자제할 필요가 있다. 생리의 모든 과정이 여자가 태어나서 늙어가는 과정 중에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변화로 받아들였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박가영 기자 park0801@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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