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건 폐 때문이라고?..신입생 앞에서 아는 척하는 복학생 같았다 [위근우의 리플레이]

위근우 칼럼니스트 2019. 5. 4.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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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MBC ‘나 혼자 산다’ 잘못된 이경제 활용법

4월26일 방영된 MBC <나 혼자 산다>에서 한의사 이경제 원장은 공황장애 진단을 받으러 온 기안84에게 “한의학은 오장육부와 감정을 연결하고 폐는 슬픔을 담당”한다며 “자기(기안84)는 안 슬픈데 폐 때문에 슬프다고 생각하는 거”라고 했다. 그의 진단은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는 순간”이라는 이시언의 맞장구처럼 방송을 통해 공적 권위를 얻고 과학적 신빙성을 획득한 것일까. <나 혼자 산다> 방송 화면 캡처

공황장애 때문에 찾아온 기안84에 폐가 슬픔을 담당한다며 진단 내려 음양오행설 연결고리만 설명하며 기승전 없이 ‘결’만 강조한 이경제 ‘귀를 접어 아프면 디스크’ 주장한 ‘무한도전’ 때도 한의사들 비판받아

고등학교 시절 모의고사 지문에서 차주환의 수필 ‘냉면기’를 읽은 기억이 난다. 냉면에 대한 찬양을 담은 이 글 후반부엔 위암에 걸린 한 목사가 수술을 거부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이나 실컷 먹겠다며 냉면을 먹었다가 속이 편해지고 최종적으로는 암이 나은 사례가 나온다. 글쓴이도 “냉면 자체가 약이 된 것은 아니겠지만”이라고 단서를 달지만, “식욕 자극이라든지 하는 것이 위장의 작용을 활발하게 하여 암까지도 녹여 버렸을지 모른다”고 조심스레 추측한다. 여기에 어떤 의학적 진실이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괜찮다. 중문학자가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에 대해 쓴 이 수필로부터 의학적 정보를 진지하게 얻고자 한다면 그건 독자 잘못일 테니까. 하지만 의학에 대한 권위를 지닌 사람이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면?

지난 4월26일 방영된 MBC <나 혼자 산다>에 출연한 한의사 이경제 원장은 공황장애와 관련해 진단을 받으러 온 만화가 기안84에 대해 “한의학은 오장육부와 감정을 연결하고 폐는 슬픔을 담당하는데, 실제로 자기(기안84)는 안 슬픈데 폐 때문에 슬프다고 생각하는 거”라고 진단을 내린다. 스튜디오에 직접 출연해서는 기안84의 문제가 “자기가 고뇌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라고도 말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기안84의 마음의 병이 폐에서 비롯된 착각일지도 모르며, 이경제의 조언을 통해 나아질지도 모른다. 왜 가능성이 없겠는가. 냉면으로 위암을 고친 사례도 있는데.

어떤 지식이 지식으로 기능하기 위해선, 어떤 상황이 참인지 아닌지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왜 그것이 참인지에 대해서까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냉면을 먹던 위암 환자가 완치된 게 사실이라 해도,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까지 설명할 수 있어야 그것이 냉면 혹은 암에 대한 하나의 유의미한 지식이 될 수 있다. <나 혼자 산다>의 이경제로부터 그러한 것을 볼 수는 없다. 뇌 과학의 성과를 통해 우울증의 원인을 찾아내는 시대에 폐 건강으로 마음 건강을 유추하는 것을 과연 어디까지 믿어줄 수 있을까.

물론 한의학은 오랜 경험이 축적된 분야이며, 그 안에 임상에서의 경험적 진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각 부위와 감정 간 연결이 음양오행이론을 통해 설명되는 것이라면 그것을 지식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취재에 응한 한 한의사는 “과거 한의학에선 뇌라는 기관에 대해 잘 모르고 중요하지 않게 봤기 때문에 심장이 뇌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폐가 안 좋아서 슬픔을 느낀다는 식의 이야기는 현대적 관점에서 반박당할 여지가 많다”고 말했다. 귀가 태아의 모양이며, 귀 지압을 통해 몸 상태를 파악할 수 있다는 이경제 특유의 진단법도 마찬가지다. 이미 그는 수년 전 MBC <무한도전>에 출연해 귀가 인체의 축소판이며 귀를 반으로 접어 아프면 허리 디스크가 안 좋은 거라는 진단을 내린 바 있다. 이 방송에 대해선 당시 현직 한의사들조차 비판한 바 있다. 귀를 이용한 진단은 신체 각 부분이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는 ‘전식론’에 근거하지만, 이 이론 자체가 아직 유의미하게 검증된 게 아니며 모든 한의사들이 동의하는 것 역시 아니기 때문이다.

이경제는 ‘매일경제’와의 예전 인터뷰에서 자신이 방송을 잘하는 이유를 “기승전결이 아니라 결론부터 얘기”하는 것으로부터 찾았다. 하지만 바로 그 ‘기승전’을 합리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야말로 전문가로서 자신의 권위를 증명하는 방법이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나 혼자 산다> 멤버들의 혀 상태로 건강 상태를 읽어내고(결론부터 얘기하고) 그것이 어느 정도 들어맞는다 해도, 그가 과거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의 혀를 관찰하면 체질적으로 점프 능력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던 또 다른 결론을 떠올리며 해당 진단 방법의 과학적 신빙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기안84에 대한 이경제의 분석에 대해 이시언은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는 순간”이라고 했지만 이 순간 어디에도 과학적인 면은 없다. 이미 공황장애 진단을 받은 기안84의 스트레스 담당 혈 자리를 눌러보고 당사자가 통증을 느끼지 않았다면, 환자가 스트레스를 받는 감정이 착각이라고 진단하기보단 귀 지압으로 스트레스를 진단할 수 있다는 가설을 의심해보는 게 과학적 사고다. 전자는 명백한 순환논법이다.

이시언 “과학적으로 증명” 맞장구 부실 진단을 방송 통해 권위 주고 주의 자막조차 없이 증세 조롱만 최소한의 절제도 고민도 없었고 재미로 소비할 것·아닌 것도 몰라

이처럼 정신의학이라는 전문화된 영역을 한의학이 대체해도 되느냐는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차치하더라도, “자기의 고뇌가 굉장히 크다고 느껴지는 거다” “그 정도는 남들도 만날 하는 거다” 같은 이경제의 조언은 신입생 앞에서 세상을 다 아는 척하는 복학생 선배의 술자리 조언 수준이다. 그리고 이처럼 누구나 할 수 있는 통찰은 종종 전혀 전문성이 보장되지 않는 유사 지식의 포장지를 두른 형태로 유독 예능에서 자주 등장한다. 지난해 10월 SBS <집사부일체>에 출연한 신애라는 히포크라테스 기질 테스트로 출연자들 성격 유형을 분석했다. 물론 이 역시 방송에선 꽤 적절하게 들어맞았다. 신애라가 이상윤에 대해 “이 팀에 도움을 못 주고 있는지 부담감을 느낄 수 있다”고 하자 이상윤은 눈물까지 흘렸다. 하지만 예능 선수들이 즐비한 방송에 뻣뻣하게 서 있는 그를 보며 그 정도를 예상 못할 사람이 있을까?

기원전 400년경 인간 기질을 다혈질, 담즙질 따위로 분류한 히포크라테스 기질 테스트는 별다른 과학적 근거도 없고 이미 임상에선 쓰지 않고 있다. 심지어 가장 대중적인 성격 유형 테스트인 MBTI조차 사실 포러 효과(동일한 묘사가 거의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일반적인 성격 묘사를 자신에게만 적용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성향, 가령 ‘신중하지만 때에 따라 무모해지는 성격’ 같은 묘사)에 가깝다는 비판을 받는 것처럼, 성격 유형이라는 건 너무나 자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많다. 예외 없이 이경제도 OtvN <어쩌다 어른>에서 스티브 잡스는 사상의학 관점에서 태양인이며 태양인은 완벽주의자라 위인이 많다고 말했다. 누구나 그럴싸하게 말할 수 있는 주제라는 것이 누구나 말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이 선배의 술자리 잘난 척에 끝나지 않고 방송을 통해 공적 권위를 획득하게 된다면 더더욱 그렇다.

이번 <나 혼자 산다>에서 인포테이너로서의 이경제 활용이 문제적인 건 그래서다. 하다못해 이경제를 ‘건강 강연의 1인자’로 소개한 <어쩌다 어른>조차 오장육부를 상, 중, 하로 나누어 위쪽이 불편하면 매실즙과 레몬즙을, 중간 쪽이 불편하면 유산균과 해독주스를, 아래쪽이 불편하면 키위를 세 알 먹으라는 이경제의 강연에 대해 ‘개인차가 있으므로 정확한 진단 후 섭취를 바랍니다’라는 당부 자막을 달았다. 하지만 <나 혼자 산다>는 주의를 요하는 자막은커녕 오히려 그의 미심쩍고 논거도 부실한 심리 진단에 대해 권위를 부여하고, 더 나아가 공황장애를 호소하던 기안84의 증상을 조롱하는 수준의 자막을 달았다. 최소한의 절제도 고민도 없었다.

4월 초 같은 방송에서 배우 성훈이 출연한 런웨이에서 이름을 크게 불렀다가 논란이 되거나, 방송 안에서 종종 엉뚱함과 무례함의 경계를 오가는 기안84의 행동들을 공황장애라는 이유로 정당화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의 행동들을 비판하려면 남성 출연자가 덜 사회화된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것을 재밌거나 순수한 캐릭터로 포장하고 부추겨온 방송이 함께 반성해야지, ‘주제파악 필요’라는 자막과 함께 공황장애를 단순히 마음가짐에서 오는 꾀병처럼 비웃을 일은 결코 아니다. 기안84가 비판받아 마땅한 다른 수많은 이유에도 불구하고 그러하며, 기안84 외에 수많은 공황장애, 우울증 환자들이 마음의 병을 단순히 개인 의지의 문제 정도로 보는 사회적 시선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을 떠올리면 더더욱 그러하다. 물론 이경제의 거침없는 입담과 기안84의 시무룩한 표정, 나머지 패널들의 호들갑이 재밌을 수는 있다. 문제는 재미로 소비해도 될 것과 아닌 것을 <나 혼자 산다>가 구분하지 못했다는 거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런 상황을 재미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방송이 더 건강한 방송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정도는 귀를 안 눌러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위근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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