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간병살인' 남의 집 일이 아니네

김태훈 기자 2019. 5. 6.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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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경기 남양주 치매안심센터에서 예방 프로그램에 참여한 노인들이 태블릿 PC를 보며 문제를 풀고 있다./보건복지부 제공

아버지는 ‘센터’를 싫어했다. 치매에 걸린 아버지는 가까운 돌봄센터인 데이케어센터에 다니고 있었지만 직원들이 그다지 친절하지 않다고 불만을 표하는 날이 많았다. 아들 이모씨(48)는 고민에 빠졌다. 치매 진단을 받기는 했지만 정기적으로 병원에 들러 확인한 결과 아버지의 치매 정도는 인지·행동능력이 심각하게 저하된 상태는 아니었다. 그런데 데이케어센터에서는 말이 조금 달랐다. 아버지가 요양보호사나 직원, 같이 돌봄을 받는 환자들에게 위협적인 행동을 보일 때가 잦아졌다는 것이다.

긴 시간 간병하다 몸도 마음도 지쳐

이씨는 아버지가 10여년 전 사업에 실패한 후 한동안 술에 빠져 집에서도 폭력과 막말을 일삼던 때를 떠올렸다. 이전의 다정한 모습과는 정반대로 돌변해 집안 물건을 마구 부수고 던지던 아버지의 모습은 1년 가까이 이어졌다. 가족들의 간곡한 설득과 권유로 아버지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시간이 흘러 치매 진단을 받을 무렵엔 다시 아버지가 집에서도 목소리를 높이는 날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누구보다 내가 아버지의 돌변한 모습을 잘 알고 있으니 센터 사람이 걱정하는 부분도 이해할 것 같다”는 이씨는 “보다 전문적인 요양기관에 보내지 않으면 언젠가 이 문제가 가족이나 간병인에게 돌아올 것도 예상되지만 (아버지) 본인이 극구 입원은 싫다고 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4월 22일 전북 군산에서 80세 남편이 치매에 걸린 아내를 10년간 돌보다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증상이 점차 심각해지는데도 아내는 요양병원에 들어가지 않겠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남편 ㄱ씨는 갈등이 잦아지던 아내를 살해한 뒤 자신도 뒤따라 극단적 선택을 하려 유서까지 작성했다. 그러나 ㄱ씨의 전화를 받고 도착한 아들이 경찰에 신고해 붙잡혔다. 긴 시간의 간병으로 지친 상태에서 돌보는 가족과의 갈등까지 심각해지거나 생활고에 시달리는 등 여러 문제가 겹칠 경우 발생하는 ‘간병살인’의 단면을 보여준 사건이다.

친밀한 가족이 치매를 앓으면서 간병을 도맡은 이에게 신체적·정신적·경제적 부담이 가해지는 상황은 고령화 추세에 따라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지난 2월 20일에도 충북 청주의 한 아파트에서 40대 아들이 10년간 돌보던 아버지를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발생했다. 아들 ㄴ씨(49)는 치매를 앓던 85세의 아버지 병간호를 위해 10년 전 가족과 떨어진 채 홀로 청주에 와서 아버지를 돌보고 있었다. ㄴ씨는 아버지의 건강이 점점 더 악화되자 견디지 못하고 안타까운 결정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12월에는 역시 치매를 앓고 있던 70대 노모와 40대 딸이 나란히 숨진 채 발견됐다. 지난해 7월에도 70대 노모를 부양하던 아들이 오랜 투병생활로 인한 생활고 때문에 어머니의 목숨을 끊은 뒤 자신도 극단적 선택을 하려 했으나 경찰에 붙잡혔다. 결혼도 미루고 어머니를 돌본 상황 등이 참작돼 1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가 2심에서 8년으로 감형된 상태다.

일본은 1980년대부터 사회문제화

이미 한국보다 20년 가량 앞서 초고령사회로 진입한 일본은 1980년대부터 간병살인이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일본 후생노동성이 2006년부터 집계하기 시작한 간병살인 실태를 보면 2006년부터 2015년까지 일본 내 간병살인은 247건 발생했다. 치매 외에도 장기간 투병하며 돌봄에 전력을 쏟아야 하는 질병이나 장애 때문에 견디지 못하고 간병살인을 저지른 사례까지 포함된다. 때문에 일본 정부는 2012년 치매대책 5개년 계획을 세운 데 이어 2015년에는 ‘신오렌지플랜’이라는 이름의 종합대책을 내놨지만 치매라는 병의 특성과 빠른 고령화의 여파 때문에 문제는 여전히 심각한 상황이다.

2017년부터 치매 국가책임제를 시행하고 있는 한국에서도 가장 우선적으로 치매안심센터를 설립하고 환자 규모를 정확하게 파악한 뒤 등록하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전국 256곳에 설치될 예정인 치매안심센터 중 177곳(69.1%)이 문을 열었고, 전체 추정 치매환자 75만여명 중 절반 수준인 37만여명이 등록했다. 그러나 치매 등의 이유로 일어나는 간병살인에 관한 공식적 집계는 여전히 이뤄지지 않고 있어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고령화 추세를 따라잡으려면 다각도의 대책이 추가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2018년 기준 65세 이상 전체 노인인구 738만여명 중 추정 치매환자는 75만명(10.16%)에 달한다. 전체 인구의 20% 이상이 65세 이상 노인인 초고령사회가 될 것으로 추정되는 2026년쯤에는 치매환자가 100만명을 넘어설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여기에 현재의 중증 치매환자 비율인 15.5%를 적용해도 약 15만명, 중등도 이상 비율 41.2%를 적용하면 40만명 이상의 심각한 치매환자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시대가 닥친 셈이다. 치매를 확실히 치료할 수 있는 신약 등의 치료법이 개발되지 못한 상황이 이어지면 2050년에는 국내 치매환자 수만 302만명에 달할 것이라는 추정까지 나왔다.

치매국가책임제 광고 영상 캡쳐

환자 가족이든 사회 전체든 경제적인 부담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2017년 기준 치매 관리비용은 연간 14조6337억원을 기록했다. 치매환자 1인당 관리비용은 2100만원에 달한다. 치매 국가책임제 이후 보장범위와 액수 모두 늘어나 돌봐야 하는 가족의 경제적 부담이 전보다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특히 노년 부부들만 함께 살면서 혼자서 치매 배우자를 돌보는 ‘노노 돌봄’이나 자녀 1명밖에 돌봐줄 사람이 없는 경우 간병에 드는 비용 외에도 기본적인 생활비 자체를 조달하기 힘든 문제가 있다. 치료와 요양기관의 관리를 통해 치매의 진행속도는 최대한 늦추고 보호자가 생업에 종사할 수 있는 시간은 최대한 늘리더라도 전적으로 보완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해 발행한 ‘노노 돌봄 현황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노인들이 서로를 돌볼 주체로 배우자를 꼽는 비율이 가장 높았다. 노인 돌봄의 가장 큰 책임자가 배우자라고 응답한 비율이 39.1%로 가장 높았고, 노인인 자녀를 꼽은 응답자도 24%나 됐다. 때문에 노인들이 돌봄을 제공할 때의 어려움도 컸다. 건강 악화에 대한 우려(45.9%)와 정서적 스트레스(25.6%), 생계활동 제약(20.8%) 등 복합적인 어려움을 호소한 것이다. 때문에 치매안심센터 등 현장에서 치매환자들을 마주하고 있는 전문가들은 보다 진전된 치매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전국 치매안심센터가 역할 더 해야

양동원 마포구치매안심센터장(서울성모병원 신경과 교수)은 ‘치매에 대한 이해와 성공적인 국가정책을 위한 토론회’에서 무엇보다 현재 ‘치매 발굴과 치료’에 중점을 둔 국가 치매정책을 ‘치매 예방’ 중심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각 센터들이 의료기관 등과 경쟁하며 발굴 실적에 매달리는 대신 각자의 역할을 분담하는 방향이 되어야 더욱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양 센터장은 “정밀 인지기능검사는 의료기관으로 의뢰해 여기에 들어가는 인력과 시간을 다른 사업에 투입하고, 이를 통해 의료기관과 치매안심센터 간 갈등도 해소할 수 있다”며 “그러면 치매안심센터에서 지원과 인지 관련 치료를 경도인지장애까지 확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국가책임제에 따라 전국에 설립된 치매안심센터가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려 치매환자와 간병 가족에게 보다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지원을 마련하는 역할을 더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박건우 강북구 치매지원센터장은 “치매안심센터는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들까지도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는 곳이 돼야 한다”며 “지역사회 커뮤니티 내에서 치매 전문가들의 경쟁과 비난이 있어선 안 되는데, 현재 그런 낌새가 보이고 있는 것이 문제이므로 이에 대한 대책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치매 A to Z

어느 집안에건 치매를 앓는 식구가 한 명씩 있을 정도로 치매는 흔한 병이다. 하지만 의사들조차 발생 원인과 기전에 관해 명확히 밝혀진 것이 적어 치료에 어려움을 내비치는 병이기도 하다. 일단 치매의 원인 중에서 알츠하이머병과 같이 퇴행성 뇌질환으로 발생하는 비율이 높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퇴행성 뇌질환에 의해서만 생기는 것도 아니다. 다만 다양한 원인 가운데 뇌세포가 줄어들거나 인지와 판단, 행동에 필요한 뇌신경들이 제대로 연결되지 않는 증상이 공통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이를 묶어 치매로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전문적인 진단과 치료는 전국 보건소에 설치되는 치매안심센터나 의료기관에서 받을 수 있다. 노화에 따른 퇴행성 질환이 원인이 될 경우 급격한 변화는 없기 때문에 이미 증상이 의심돼 센터를 방문할 경우 진행이 시작된 이후일 수도 있다. 게다가 반드시 노년이 아니더라도 알코올 등 약물로 인해 발병하는 치매의 경우, 나이와 상관없이 빠르게 진행될 수 있기 때문에 검진을 통해 미리 상태를 파악하고 최대한 예방하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

치매도 치료를 일찍 시작할수록 많은 효과를 볼 수 있다. 단순 건망증과 가장 구별되는 점이 건망증은 기억하던 내용을 다시 떠올리기를 어려워하는 수준인 데 비해, 치매는 애초에 기억해야 할 사건이나 경험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며칠 전 나눴던 대화내용이나 최근 주변에서 일어났던 일 같은 단기기억이 아예 사라져버렸다면 병원을 찾을 필요가 있다.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늘 다루던 가전이나 생활용품 사용법 같은 장기기억이 사라진 경우는 더 심각하다.

치매 예방에 고스톱이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전문가들은 이미 고스톱의 룰에 익숙해지면 뇌를 활용하는 정도도 낮아지므로 효과가 그리 크지 않다고 지적한다. 대신 몸을 사용하는 운동이나 산책, 그리고 독서 등으로 뇌에 지속적이면서도 새로운 자극을 가해야 한다. 인간관계를 넓히며 뇌의 활용도를 높이는 일상도 소홀히해서는 안 된다. 종일 방 안에서 TV만 보는 습관을 교정하고 치매에 악영향을 주는 음주는 되도록 삼가야 한다. 흡연 역시 치매 발병률을 높인다는 통계가 나와 있다.

무엇보다 노년층에서 발병률이 높은 만큼 노인들의 사회적 환경에도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최신 연구결과 치매 전 단계로 간주하는 경도인지장애 초기에 자살 위험이 높다고 나온 점도 이를 시사한다. 적극적인 예방을 위해선 치매라는 병을 관리하는 한편 환자 주변의 사회적 관계까지 고려해야 하는 셈이다. 경도인지장애는 같은 또래에 견줘 인지기능과 기억력이 떨어진 상태다. 이 진단을 받은 환자의 약 80%가 5년 이내에 치매 판정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홍진표 교수 연구팀이 경도인지장애 환자 1만169명의 사인을 추적 관찰해 발표한 논문에서도 연구결과 경도인지장애 초기에는 상대적으로 자살률이 높았다가 인지장애가 심해져 치매 말기로 갈수록 사고사가 늘어나는 것으로 분석됐다. 홍진표 교수는 “갑작스러운 죽음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경도인지장애 초기 단계부터 자살과 사고를 부르는 잠재적 위험성을 알 필요가 있다”며 “인지장애가 치매로 악화한 그룹에서는 운동력, 상황판단력, 단기기억력이 나빠지면서 사고사가 증가하는 것으로 보이므로 고령사회로 진입한 우리 사회에서도 ‘웰다잉’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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