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백제 삼천궁녀 목숨 잃은 낙화암, 부소산 일대 아닌 백마강 옷바위"

유원모 기자 입력 2019.05.08. 03:02 수정 2019.05.08. 09:37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있어 아래로 강물과 접해 있다. 전하기를 의자왕이 모든 후궁들과 함께 서로 이끌고 와 강에 투신해 죽었다. 이를 타사암(墮死巖)이라 한다."

황 교수는 "삼국유사에는 백제의 패망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측면이 있는데 사실 의자왕은 패망 후 당나라의 낙양으로 끌려가 그곳에서 목숨을 잃었다"며 "당나라군을 피해 도망가던 당시 궁녀들의 긴박한 상황을 고려하면 도성의 끝자락에 위치하며 선착장 등을 갖추고 있던 옷바위가 낙화암일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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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덕 충남대 교수, 위치 새로 규명
삼천 궁녀의 설화가 전해 내려오는 충남 부여군 백마강 유역의 부소산 낙화암. 황인덕 충남대 교수는 “부여 지역 설화와 지형 등을 고려했을 때 부여 사비성의 남쪽 옷바위가 낙화암 전설과 더 부합하는 장소”라고 말했다. 동아일보DB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있어 아래로 강물과 접해 있다. 전하기를 의자왕이 모든 후궁들과 함께 서로 이끌고 와 강에 투신해 죽었다. 이를 타사암(墮死巖)이라 한다.”

고려 후기에 간행된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낙화암의 전설이 이같이 기록돼 있다. 이후 수백 년간 백마강 유역의 부소산 낙화암은 빼어난 자연경관과 함께 전국적인 명승지로 인기를 얻고 있다. 하지만 바위의 꼭대기에 있는 백화정에서 백마강을 내다본 이들이라면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된다. 과연 여기서 궁녀들이 빠질 수 있었을까?

최근 부여 지역의 설화와 지형을 분석해 낙화암의 본래 위치를 규명한 흥미로운 연구가 나왔다. 황인덕 충남대 교수가 학술지 백제연구에 실은 ‘부여 주정리 대왕포와 낙화암 전설―낙화암 전설 발단 지점 재고’ 논문이다. 황 교수는 7일 본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백제 무왕 때부터 의자왕 재위 시까지 수도인 부여에서 북대왕포(낙화암)와 함께 남대왕포로 불리며 가장 아름다운 절경을 자랑했던 현재 부여읍 중정리 옷바위 일대가 실제 낙화암의 무대”라고 말했다.

황 교수에 따르면 우선 현재의 낙화암은 지형적으로 설화의 주인공이 되기 힘들다. 높이가 30여 m에 이르지만 계단식 지형으로 인해 바위 정상에서 성인 남성이 있는 힘껏 돌을 던져야 겨우 물속에 빠뜨릴 수 있을 정도로 바닥면과 멀다. 투신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반면 옷바위의 경우에는 20여 m로 높이는 낮지만 암벽이 수직으로 바닥에 맞닿아 있다.

조선시대의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대왕포를 설명하면서 “부여현 치소로부터 남쪽으로 7리에 있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현재의 옷바위 위치와 정확히 일치하는 부분이다. 부여 지역의 설화에는 “적군에게 쫓기다 궁녀만 피신해 옷바위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내용이 전해지는데 삼국유사에서 “의자왕과 궁녀들이 함께 죽었다”는 기록과는 다르다. 황 교수는 “삼국유사에는 백제의 패망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측면이 있는데 사실 의자왕은 패망 후 당나라의 낙양으로 끌려가 그곳에서 목숨을 잃었다”며 “당나라군을 피해 도망가던 당시 궁녀들의 긴박한 상황을 고려하면 도성의 끝자락에 위치하며 선착장 등을 갖추고 있던 옷바위가 낙화암일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현재의 부소산 일대가 낙화암으로 비정된 배경에는 자연경관이 큰 몫을 했다는 게 황 교수의 분석이다. 현재 옷바위는 백제 때와는 달리 백마강의 유역 변화로 인해 강물이 말라 버렸다. 이로 인해 전설의 이야기에 대응할 만한 뛰어난 경관적 요소를 잃어버렸다.

황 교수는 “부소산 낙화암의 전설은 사실에 기반하기보다는 설화와 자연적 요소가 합쳐진 ‘관광전설’의 성격이 크다”며 “백제의 최후와 관련한 연구가 활성화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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