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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7일만에 날림심사, 한국인 수두룩..수상한 필리핀 학술지

김희래,문광민,신혜림 입력 2019. 05. 09. 17:42 수정 2019. 05. 09.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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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실의혹 해외학술지 논란
인용지수 0점으로 꼴찌수준
학술분야 전문성 없이 '잡탕'
3년여간 한국인 362명 게재
SKY大 연구자도 13명 발표
게재료 비싸..논문장사 의혹
정부는 "단속기준 無" 손놓아
국내 학계가 '부실학회·부실학술지' 주의보로 몸살을 앓고 있는 가운데 올해 4월까지도 국내 연구자들이 부실 의혹을 받고 있는 해외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한 사례가 무더기로 확인돼 파장이 예상된다. 특히 이번에 도마에 오른 A학술지는 세계적 인용색인 데이터베이스인 '스코퍼스(SCOPUS)'에 등재돼 있어 그동안 국내 학자들의 연구업적 평가에 적잖은 왜곡을 초래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학계 일각에서는 게재 논문의 수에 따라 연구업적을 평가하는 현행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9일 매일경제가 입수한 해외 A학술지의 최근 3년간 발간 내역에 따르면 2016년부터 올해 4월까지 국내 연구자 총 362명이 이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한 것으로 확인됐다. SCOPUS 홈페이지 기준 A학술지의 인용지수는 0점, 관련 분야 학술지 순위는 184위(187개 학술지 중)로 최하위권이다. 필리핀에서 발행되는 이 학술지에는 최근 3년간 총 163개 국내 대학(국공립 39개교, 사립 124개교, 전문대 포함) 교수와 연구자들이 논문을 게재한 것으로 집계됐다. 서울대에서 7명, 연세대와 고려대는 각각 3명이 이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했다. A학술지의 전문성이 의심스러운 대목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A학술지는 대외적으로 생화학·유전학·분자생물학 분야 학술지를 표방하고 있지만 정작 게재되는 논문의 학문 분야는 부동산학·치의학·간호학·건축학 등 대부분의 분야가 망라돼 있다. 세계적 학술지 '네이처'처럼 정상적인 학술지는 특정 학문 분야 논문만 전문적으로 싣는다는 것이 학계 의견이다.

또 최근 수년간 논문을 투고한 저자들 중 한국인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것으로 파악됐다. 1년에 두 차례 발간되는 이 학술지는 정식 볼륨(Volume) 외에 증보판(Supplement)을 여러 권 함께 발간하고 있다. 증보판에 논문을 투고한 저자들을 보면 한국인으로만 채워진 경우도 많았다. 익명을 요구한 한 교수는 "저자 국적의 다양성은 저널의 전문성을 판단하는 중요 기준"이라며 "저자의 100%가 한 국적인 경우는 상당히 드물다"고 설명했다. 더 나아가 현재 한국연구재단과 대다수 대학에서는 '정규 논문 인정 기준'으로 해외 학술지 정식 볼륨에 게재된 논문과 증보판에 게재된 논문을 구분하지 않고 있다. 부실 학술지 증보판에 논문을 게재하고 이를 연구실적으로 인정받는 구조가 가능한 셈이다.

논문 심사 기간이 지나치게 짧다는 사실도 수상한 점으로 거론된다. 2016년부터 올해 4월까지 A학술지에 게재된 한국인 저자의 논문은 총 297건으로 평균 심사기간은 19.6일에 불과했다. 논문에 따라 심사기간이 7일밖에 걸리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각기 다른 저자가 투고한 논문의 접수일과 게재확정일이 겹치는 사례가 다수 확인됐으며 그중에는 실제로는 있지도 않은 '2019년 2월 29일'에 게재가 확정된 논문도 있었다.

학계 관계자는 "일반적으로 논문 심사는 3~4개월에서 길게는 1년 이상 걸리는 경우도 있다"며 "학술지의 심사 기간이 한 달이 채 되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히 이상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논문 게재료를 비싸게 받고 엄정한 심사 없이 논문 게재를 승인하는 '논문장사' 의혹을 배제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실제 A4용지 15장 분량 논문 한 편을 A학술지에 게재하는 데 드는 비용은 2000달러(약 235만7000원)로 30만~40만원 수준인 일반 학술지 게재료와 비교해 6배나 비싼 것으로 확인됐다.

눈길이 가는 대목은 또 있다. 지난해 가족기업형 가짜 학회를 운영한 의혹에 휩싸이며 학계를 떠난 김 모 전 B대학 교수 이름이 이 학술지의 편집위원 명단에서 확인됐다는 점이다. 지난 1월 말 B대학에 사표를 제출한 김 전 교수는 올해 4월에 발간된 이 학술지 증보판에도 여전히 B대 교수로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김 전 교수가 한국인 저자들과 A학술지를 연결하는 데 모종의 역할을 한 게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된다. 김 전 교수는 이에 대해 "A학술지에서 먼저 편집위원을 해달라고 했고 그쪽에서 금전적으로 이득을 본 것은 없다"며 "(교수 신분이 아닌 것은) 출판사에 미처 연락하지 못해 출판사가 업데이트를 하지 못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학계 관계자들은 세계적인 인용색인 데이터베이스의 검증 시스템에 아직 드러나지 않은 구멍이 더 많을 것으로 보고, 논문 수에 따라 연구업적을 평가하는 현행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A학술지의 부실이 사실로 드러난다면 학술지에 논문을 올린 실적을 근거로 국가에서 연구비를 지원받거나 교수들 승진 심사에 영향을 미치는 현 상황에서 상당한 왜곡이 초래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는 국가가 나서 부실 학술지를 규정하고 단속하기는 조심스럽다는 입장이다. 김해도 한국연구재단 연구윤리실장은 "학술 생태계의 관점에서 민간이 운영하는 학술지의 부실 여부를 정부가 판단해 규제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매일경제는 짧은 심사 기간과 한국 저자 비율이 높은 점 등에 대해 A학술지 측 해명을 듣기 위해 이메일을 보냈으나 A학술지 측은 "우리가 해명할 필요는 없다"며 거부했다.

[김희래 기자 / 문광민 기자 / 신혜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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