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와 성찰]사드에 대한 미국의 '업보'

원익선 원광대학교 정역원 교무 2019. 5. 10.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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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우리 삶은 잃고 나서 소중함을 알게 되는 모순으로 이뤄져 있다. 사드 배치 주변지역인 성주의 소성리·월곡리·용봉리, 김천의 월명리·노곡리·연명리·입석리 주민들은 아직도 어안이 벙벙하다. 어쩌다 이 천혜의 무공해 지역에 전쟁무기 사드가 들어와 혼돈의 우주가 집어삼킨 것처럼 고통을 주는지. 이들은 애초에 평화가 무엇인지 몰랐다. 절대적 고요가 파괴된 지금, 이웃과 오순도순 지낸 지난날들이 평화였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눈뜬 그들은 지구에서 가장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미국과 맞짱 뜨고 있다. 그들의 대응방식은 민중의 무기이자 권력인 해학과 웃음이다. 전쟁에 반대하는 레지스탕스임을 자부하는 나도 완전히 무장해제된다. 저번 주 소성리 토요문화축제는 어버이날을 앞당겨 치렀다. 사드반대운동의 선두에서 고생하시는 연로한 부모님들을 위로하는 오카리나, 트럼펫, 기타, 피아노 연주와 노래에 대한 감탄은 물론 분장과 춤으로 망가지는 자식들의 모습에 배꼽 잡고 웃었다. 슬픔을 온몸으로 털어내는 이들의 몸부림을 지켜보며 나는 속으로 눈물을 삼키지 않을 수 없었다. 2년 전 이맘때 사드가 들어간 마을도로 위에서 절치부심하던 한밤중에 광주시민들이 차를 몰고 달려왔다. 그들은 사드의 불법배치는 5·18광주와 다름없다고 했다. 국가권력이 마을을 둘러싸고 주민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저지른 것과 그 뒤에 미국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는 것이다.

사드 문제의 본질은 무엇보다도 한 국가의 법체계가 무너졌다는 점이다. 강도가 집에 들어와 자녀의 방에 눌러앉아 “법적인 판결이 날 때까지 여기에서 나가지 않겠다”는 것과 다를 것이 있는가. 남북·북미·중미 간의 복잡한 국제적 이해관계를 주범으로 지목하지만, 사드는 애꿎은 백성들에게 가해지는 일상적 폭력임을 보여준다. 촛불혁명은 사드 배치를, 권력을 사유화한 한 줌의 정치인과 정치군인들에 의한 국기문란으로 고발했다. 기회를 노리던 미국은 냉전 때 추구해온 중·러에 대한 미사일 방어망을 한반도에서 구축했다. 동맹국의 법을 휴지처럼 짓밟은 그들에게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미국은 정녕 한반도 평화의 주역인가. 필리핀과 한반도의 식민통치를 서로 인정한 1905년 미·일의 가쓰라·태프트 조약, 1945년 9월 미군의 남쪽 점령과 군정의 상해임시정부 부정, 제주 4·3사건의 배후이자 공범, 노근리 등 곳곳에서 자행된 미군의 양민학살, 박정희와 전두환의 쿠데타 비호, 그리고 이제는 남북한의 주체적 평화건설마저 사사건건 미국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수천발의 핵무기와 끊임없는 무기실험, 세계 800여곳의 미군기지, 더구나 미군은 부산 한복판에 생화학무기실험실마저 들여놓았다. 미국의 군산복합체는 전쟁 없이는 하루도 지탱할 수 없다. 냉전종식 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대한 침략은 물론 지금의 베네수엘라나 이란에 대한 미국의 간섭은 세계 경제를 불안하게 한다. 군사패권으로 살아가는 미국, 그 앞에서 희생당하는 힘없는 한국의 시민들, 사드 배치는 이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소성리는 원불교의 성지다. 2년 전 박근혜 정부는 원불교의 가장 큰 경절인 대각개교절 이틀 전인 4월26일, 8000명의 경찰을 동원해 사드 배치를 강행했다. 미국이 종교성지에 군사시설을 설치하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다. 3.6㎞ 이내에 허가 없이는 들어갈 수 없다는 사드교범에도 불구, 이미 주민 2000명이 살고 있다. 미국은 문제가 없다 한다. 원점검토는커녕 2차로 사드 배치를 완료한 현 정부는 졸속 환경영향평가로 이 땅을 미국에 넘길 작정이다. 아, 누구를 위한 정부인가.

위기의 시대에 나라를 구한 것은 백성이었다. 사드에 반대하며 분신한 조영삼 선생을 비롯하여 일선에서 온몸으로 항거했던 김판태 선생, 가슴 뜨거운 평화지킴이 조현철 청년의 고귀한 죽음은 그 역사를 환기시킨다. 한 세기 전 에밀 졸라가 드레퓌스 사건을 조작한 프랑스의 집단적 비도덕성에 대해 “나는 고발한다”며 통렬히 비판하던 것처럼 이들 열사는 목숨을 던져 한반도의 부조리를 고발했다. 섬세한 영혼을 지닌 이들 평화의 불보살들은 이웃에 대한 측은지심을 온몸으로 실천했다. 그들의 종교는 정의와 평화였다. 이제 인류 최후의 안식처인 지구의 모든 종교는 함께 연대하여 이기심과 탐욕의 수렁에 빠진 미국을 구할 의무가 있다. 불교의 초기경전 <숫타니파타>에서 석존은 “그 어떤 업(業)도 사라지지 않는다. 반드시 되돌아와 그 주인이 그것을 받는다. 어리석은 자는 죄를 짓고, 내세에 그 괴로운 과보를 받는다”고 설한다. 미국 또한 평화로운 마을과 그 주민들, 그리고 선량한 종교인들을 괴롭히는 업보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원익선 원광대학교 정역원 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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