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대로 선생', 5·18을 말하다

송화선 기자 입력 2019. 5. 13.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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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우 화백 네 컷 만화로 돌아본 그날

[신동아]

이홍우 상명대 특임교수는 1980년부터 2007년까지 동아일보에 네 컷 만화 ‘나대로 선생’을 그렸다. 명실상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사만화가인 그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의 아픔을 신문 지면을 통해 최초로 세상에 알린 인물이기도 하다. 5·18 39주년을 앞두고 이홍우 화백을 만나 당시 이야기를 들었다.

이홍우 상명대 특임교수 [홍중식 기자]
1980년 5월 20일 전남일보는 이색적인 네 컷 만화를 실었다. 제목을 제외하고는 글씨 한 자 찾아볼 수 없다. 마지막 칸에 주인공 '미나리 여사'가 눈물 흘리는 모습이 담겨 있을 뿐이다. 소주를 앞에 놓고 담배를 피워 문 채 울고 있는 아내를 보며, 남편 또한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남편의 텅 빈 눈빛이 그가 느끼는 참담한 심정을 생생히 보여주는 듯하다. 

이 만화의 작가는 이홍우(70) 상명대 특임교수. 당시 그는 광주에 본사를 둔 신문 '전남일보'(현 광주일보)에 '미나리 여사'를 연재하고 있었다. 이 교수는 "바로 이때 광주에서 5·18 민주화운동이 시작됐다. 수많은 광주시민이 계엄군의 총칼 아래 고통받았다. 그러나 철저한 검열 때문에 어느 언론도 그 참상을 보도하지 못했다. 눈물이 솟구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미나리 여사 처지가, 그때 바로 내 모습이다. 이 만화를 그리며 나도 무척 마음이 아팠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시위는 불법, 기사 검열은 합법

1980년 5월 20일자 전남일보에 실린 그의 만화 ‘미나리 여사’.
이 교수가 당시 광주에 있었던 건 아니다. 그는 서울 중구 배재빌딩에 입주해 있던 전남일보 서울지사에서 일했다. 전남일보는 그 시절 일간지와 더불어 '전일방송'이라는 라디오방송까지 가진 큰 언론사였다. 이 교수를 비롯해 청와대 및 국회 출입기자 등 20명 넘는 사람이 서울에서 근무했다. 광주 본사와 서울지사는 신문 제작을 위해 전화와 텔렉스, 정기 행낭 등을 주고받으며 수시로 취재 내용을 공유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계엄군과 시민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서울지사로 곧장 생생한 현장 소식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시 정국을 잠시만 돌아보자. 1980년 5월 18일 0시 최규하 대통령이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선포했다. 꼭 한 시간 뒤인 같은 날 오전 1시,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계엄포고'를 냈다. 이것으로 △모든 정치활동 중지 △정치 목적의 옥내외 집회 및 시위 금지 △언론·출판·보도 및 방송 사전 검열 △대학 휴교 등이 결정됐다. 하루아침에 모든 시위는 '불법', 기사 검열은 '합법'인 세상이 열린 것이다. 

곧 광주에서는 비상식적 조치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시위가 시작됐다. 계엄군은 폭력으로 이를 제압하려 나섰다. 그 과정에서 유혈 사태가 발생했지만, 신군부가 신문·방송을 통제해 광주 바깥으로는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다. 서울에서 광주 상황을 전달받은 전남일보 서울지사 구성원들 또한 관련 기사는 한 줄도 쓸 수 없었다. 

바로 그때 최승호 전남일보 편집국장이 서울에 있는 이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지금 광주에서는 계엄군의 만행을 기록한 모든 기사가 휴지통에 들어가고 있다. '미나리 여사'를 통해 은유적으로 이 상황을 전달할 방법이 없겠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이 교수 또한 같은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는 "검열을 통과해 신문에 실리면서 동시에 광주의 아픔을 세상에 알릴 수 있는 만화를 그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고 밝혔다. 그 결실이 1980년 5월 20일자 '미나리 여사'인 셈이다.

댓돌을 뚫는 물방울

광주를 둘러싼 상황이 하루가 다르게 악화하면서 전남일보는 1980년 5월 21일부터 신문을 발행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광주에 있는 이 교수 동료들은 신문에 단 한 줄도 싣지 못할 내용을 취재하고자 위험을 무릅쓴 채 현장을 뛰어다녔다. 피 흘리는 광주 시민들의 모습은, 그들의 취재수첩과 사진필름 안에 담겨 계속 서울지사 사무실에 도착했다. 당시 갓 서른 살 넘은 청년이던 이 교수는 그것들을 보며 분노와 무력감에 몸을 떨었다고 한다. 

전남일보가 복간된 건 광주시민의 항쟁이 완전히 진압된 뒤인 6월 4일이다. 계엄군의 언론 검열은 한층 강화됐고, 신문 기사를 통해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시민이 겪은 고통을 세상에 알리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때 이 교수가 다시 나섰다. 그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던 참혹한 현장, 힘없이 당한 시민들의 아픔을 지면에 담고 싶었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소재로 삼은 건 6·25전쟁이었다. 

전남일보 6월 4일자에 실린 '미나리 여사'를 보자. 주인공은 6월 달력을 보다가 문득 6·25를 떠올린다. 그러고는 국민 대부분이 가사를 아는 '6·25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서슬 퍼런 신군부라도 문제 삼기 어려운 내용 전개다. 그러나 그 시절 광주시민이라면 누구나 알아차리지 않았을까. '미나리 여사' 부부가 끝내 눈물까지 흘리며 기억하는,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이 과연 언제인지 말이다. 

이 만화를 보면 검열을 교묘히 피하면서도 원하는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하는 이 교수의 능력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그는 "어떤 사람은 그때 정작 '5·18'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못 하고 '6·25'를 대신 내세운 나를 비겁하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다"며 "그러나 당시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신문에 실릴 수 있는 만화를 그리는 거였다"고 밝혔다. 이 교수의 말이다. 

"언론 검열 상황에서 '게재 불가 판정'을 받을 게 뻔한 만화를 그리면 뭐하나. 그건 일종의 자위행위라고 봤다. '나는 군부독재에 강력히 저항했다'는 자기만족 말고 아무것도 남지 않을 테니 말이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메시지를 다소 순화하고, 때로는 은밀히 감추더라도 어떻게든 신문에 실릴 수 있게 그리고 싶었다. 그게 당시 내가 생각한 저항이다." 

이 교수는 이 대목에서 '낙숫물' 얘기를 했다. 단단한 댓돌을 깨뜨리는 건 한순간 거칠게 쏟아지는 소나기가 아니라 끊임없이 댓돌을 두드리는 작은 물방울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이 교수는 언론탄압이 거세던 시절에도 검열 때문에 만화를 신문에 내지 못한 일이 한 번도 없다고 한다. 

"검열 당국이 게재를 불허할 게 분명해 보이는 주제가 있다. 그런 걸 선택한 날은 만화를 여러 편 그렸다. 뒤로 갈수록 메시지를 조금씩 순화했다. 검열관이 첫 번째 만화에 '게재불가' 도장을 찍으면 두 번째 만화를 내밀고 또 '게재불가' 도장을 찍으면 세 번째 만화를 내밀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하다 여덟 번째 만화로 마침내 검열을 통과한 적도 있다. 독자들은 그 만화를 '맹탕'으로 여겼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아예 아무것도 그리지 못한 것보다는 낫지 않았을까." 

이 교수 얘기다. 그는 이렇게 펜으로 끊임없이 물방울을 그렸다. 그가 만들어낸 낙숫물은 1980년 6월에도 끊임없이 군부독재의 댓돌 위로 똑똑 떨어졌다. 6월 6일엔 '현충일'을 소재로 삼았다. 이날 만화 주인공은 백합 한 송이를 들고 누군가의 무덤을 찾아가 엎드린다. 6월 7일, 6월 8일자 신문에 실린 '미나리 여사' 또한 '아는 사람 눈에는 분명히 보이는' 행간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나대로 선생

‘미나리 여사'가 이처럼 연거푸 '광주의 눈물'을 다루자 전남일보 편집국에는 독자들의 응원과 격려 메시지가 답지했다. 반면 검열 당국의 눈초리는 날로 날카로워졌다. 이 교수는 "1980년 6월 초부터 검열을 담당하는 고위층이 '조심하지 않으면 '미나리 여사'를 없애버리겠다'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내게 전해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전남일보 편집국장도 '곧 언론인 숙청이 있을 예정이라는 정보가 돌고 있으니 조심하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군부가 눈엣가시였던 기자들을 골라 해고하는 이른바 '언론인 해직 사태'가 벌어졌다. '사이비 언론 정리' 등의 미명하에 신문·방송도 통폐합됐다. 이런 상황에서 이 교수는 1980년 11월 전남일보를 떠나 동아일보로 자리를 옮겼고, 새로운 네 컷 만화 '나대로 선생'을 시작했다. 

‘나대로 선생'을 그리면서 이 교수의 시사만화가로서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전두환 정부의 언론 통제를 물 흐르듯 타고 넘으며, 기발한 아이디어로 독자의 숨통을 틔워준 덕분이다. 1985년 2월 8일 동아일보에 실린 '나대로 선생'을 보자. 

표면적으로는 싱겁기 그지없어 보인다. 2·12 총선을 앞두고 전국 각지에서 정치 연설회가 활발히 열리던 시절이다. 그때 '나대로 선생'이 대중가요를 듣는 게 전부 아닌가. 

그러나 내막을 알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해 2월 8일은 신군부가 미국으로 강제 추방했던 김대중 씨가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한 날이다. 전두환 정부는 당시 야권 유력인사이던 김씨가 주목받는 것을 막으려 했다. 모든 언론에 관련 기사를 싣지 말도록 보도지침을 내렸다. 

이 교수는 '나대로 선생'을 통해 바로 그것을 무력화했다. 만화 세 번째 칸 '대중가요나 듣자' 문장에서 '대중'을 유난히 큰 글씨로 썼고, 라디오에서는 '돌아오네 돌아오네 고국산천'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으로 묘사했다. '행간의 의미'를 통해 정부가 금지한 뉴스를 독자에게 전달한 것이다.

"오늘 같은 날이면"

이 교수가 가진 '은유와 상징' 능력은 당시 드러내놓고 이야기하는 게 불가능했던 5·18 민주화운동을 만화 소재로 다룰 때도 빛을 발했다. 

동아일보 1985년 5월 18일자에 실린 '나대로 선생'이 한 사례다. '푹푹 찌는 날씨'에 우리의 주인공은 '시원한 무등산 수박'을 떠올린다. 

1986년 5월 19일에는 '나대로 선생'과 지인이 낚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광주 거리 풍경이 그림으로 등장한다. 

그 장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얼굴에 상처를 입은 채 거리를 걷는 시민과, 모자를 쓰고 위압적인 자세로 서서 그들을 지켜보는 이들 사이의 대비가 분명하다. 작가가 5월 19일에 이 만화를 지면에 실음으로써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아는 사람 눈에만' 보이는 것이다. 

전두환 정부가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르던 시절, 국내 주요 신문 지면을 통해 이처럼 지속적으로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관심을 환기한 사람은 이 교수가 유일하다. 이 교수는 그 까닭을 묻는 질문에 "전남일보 시절 알게 된 5·18의 진실이 내내 마음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이 교수 얘기다. 

"당시 중앙일간지와 방송사는 계엄 당국 발표를 인용해 광주에서 '폭도의 난동'이 벌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우리 기자들이 취재한 내용은 달랐다. 계엄군의 가공할 폭력 앞에 시민들이 속수무책으로 스러지고 있었다. 1980년 5월 당시 전남일보 신복진 기자가 보내온 사진 중 한 장이 지금도 기억난다. 계엄군이 소총에 대검을 꽂은 채 시민들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1988년 12월 열린 5·18 민주화운동 청문회에서, 당시 계엄군 지휘관들은 하나같이 '시위진압에 대검을 사용한 일이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 지금까지도 수많은 거짓말 때문에 진실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이 교수는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만화를 계속 그렸다. 그렇게 그린 작품이 줄잡아 40여 편에 이른다(상자 기사 참고). 더불어 군사정권의 언론 기사 검열에 맞서 진실을 드러내려는 노력도 계속했다. 

1986년 3월 24일 동아일보에 실린 '나대로 선생'을 보자. 이른바 '국방위 회식 사건'을 다룬 만화다. 

사건 개요는 이렇다. 그해 3월 21일 군 고위 장성과 현직 국회의원들이 고급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 서로 치고받는 난투극을 벌였다. 그 현장에는 박희도 당시 육군참모총장 등 '하나회' 핵심 멤버가 다수 있었다. 박희도는 12·12 사태 당시 1공수여단장으로, 전두환 정권 출범의 '1등 공신'으로 꼽힌 인물이다. 이 사건이 세간에 알려지면 안 된다고 판단한 정부는 곧장 언론 통제에 나섰다. 어느 언론사도 이 내용을 기사화하지 못했다.

"눈앞에 별이 번쩍번쩍"

그러나 이 교수의 만화는 검열의 틈을 뚫고 들어갔다. 3월 24일 '나대로 선생'은 "회식하다 매를 맞았는데 눈앞에 별이 번쩍번쩍했다"고 말한다. '별'이라는 단어는 누가 봐도 술자리에서 폭력을 휘두른 장군들에 대한 은유다. 그때까지 소문으로만 떠돌던 사건은 이렇게 신문 지면에 등장하게 됐다. 

이 교수는 이 만화 때문에 '모처'에 끌려가 매를 맞는다. 그러나 이후에도 날카로운 펜을 꺾지 않았다. 

이 교수는 2001년 한국 시사만화의 대부 김성환 화백이 제정한 '고바우만화상' 1회 수상자로 선정됐고, 2007년에는 동아일보 '동아대상'을 받았다. 동아일보에서 국장급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다 퇴사한 뒤엔 상명대에서 후학을 지도하고 있다. 

5·18 민주화운동 39주년을 앞두고 그가 '신동아'를 만난 건 "이제는 5·18이 소모적인 논쟁의 대상에서 벗어나 한국 현대사의 의미 있는 사건으로 존중받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이 교수는 "얼마 전 몇몇 국회의원이 주최한 5·18 민주화운동 관련 공청회에서 참석자들이 5·18 폄훼 발언을 했다는 얘기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나는 경상도 사람이지만 1980년 5월 광주의 아픔이 우리나라 민주화의 밑거름이 됐다고 확신한다. 내년에 다가올 5·18 40주년에는 더 많은 사람이 뜻깊게 이날을 기념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고 밝혔다.

‘나대로'의 눈으로 본 5·18 민주화운동

이홍우 교수는 매년 5월이면 5·18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만화를 그렸다. 1989년 5월에는 프로야구 선수들의 등번호에 빗대 5·18에 대한 관심을 환기했고, 1990년에는 광주에 내리는 빗줄기 속에서 '광주의 발포'를 떠올렸으며, 1993년에는 '발포 책임자를 밝히라'고 명시적으로 요구하기도 했다. 

1996년 5월 18일 '나대로 선생'은 망월동을 비추는 달 위에 전두환 전 대통령 얼굴을 그려넣어 5·18 민주화운동 당시 최고 책임자였던 그의 책임을 강조했다. 2000년에는 미국의 책임을 물었고, 2005년에는 무등산 수박을 통해 광주의 아픔을 되짚었다. 이 교수는 "무등산 수박의 붉은 속이 광주에서 숨져간 영령들을 떠올리게 한다는 내용의 이 만화를 그린 뒤 전국 각지에서 많은 독자의 전화를 받았다"고 회고했다.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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