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부치지 못한 '정규직 지원서'

글·사진 정대연·이효상 기자 2019. 5. 15. 06:0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ㆍ과로로 스러진 서른다섯 집배노동자 이은장씨의 못다 이룬 꿈

지난 13일 새벽 어머니와 살던 세종시 자택에서 과로로 숨진 30대 비정규직 집배노동자 이은장씨가 이른 출근을 위해 전날(12일) 밤 거실에 미리 준비해 둔 집배원 조끼. 조끼 안에는 업무에 필요한 잔돈, 우편물도착안내서, 볼펜, 매직, 자동차 키, PDA 배터리 등이 들어 있었다.

“정규직 집배원이 된다면 성실하게 일하며 행복과 기쁨을 배달하는 집배원이 되는 것이 제 꿈입니다.”

지난 13일 새벽 어머니(66)와 단둘이 살던 세종시 자택에서 숨진 집배노동자 이은장씨(35) 방 프린터 위에는 ‘우정 9급(집배) 공무원 경력 경쟁채용시험’ 응시원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씨가 숨지기 전날 작성해 서명까지 해둔 것이다. 이씨가 정규직 지원서류를 내려던 ‘2019년 5월14일’이 그의 발인일이 됐다. 가족들은 2일장을 치르고 이날 이씨가 열 살 때 세상을 떠난 아버지 곁에 그를 안장했다.

12일 오후 9시가 넘어 집에 들어온 이씨는 다음날 이른 출근에 대비해 준비물을 미리 챙겨놨다. 이씨가 거실 소파에 놓아둔 집배원 조끼 호주머니에는 고객에게 거슬러줄 잔돈, 우편물 도착 안내서, 개인휴대정보단말기(PDA) 배터리, 업무용 차량 키, 볼펜, 매직 등이 들어 있었다. 소파 밑 가방에는 일하다 땀 흘린 뒤 중간에 갈아입을 여벌 옷과 일하느라 생긴 상처를 가려줄 드레싱 밴드, 소독제, 연고 등을 넣어뒀다.

이씨가 작성해 자신의 방 프린터 위에 놓아두었던 정규직 채용시험 응시원서의 작성 날짜는 숨진 다음날인 5월14일로 되어 있다.

이씨 어머니는 오전 7시20분이면 출근하던 아들이 출근시간이 지나도 방에서 나오지 않자 아들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대답이 없었다. 방문을 열고 아들을 흔들어봤지만 이미 몸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어머니는 “며칠 전 어버이날 아침 아들이 머리 맡에 놓아둔 꽃과 10만원 봉투가 마지막 선물이 됐다. 생전 사고 한번 친 적 없는 아들이었다”며 울먹였다.

부검 결과 사인은 ‘돌연사’였다. 대표적인 청장년 과로사 형태다. 술·담배를 전혀 하지 않은 이씨는 지난해 건강검진에서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3년간 공주우체국에서 무기계약직인 ‘상시계약 집배원’으로 일해온 이씨는 경력이 오래돼 올해 7월 정규직 채용이 유력했다. 장시간 중노동에도 불구하고 정규직 채용에 대한 기대감을 주변에 숨기지 않았다. 그의 동료들은 “일이 너무 많아 힘들다고 자주 얘기했지만 곧 정규직이 될 것이니 버티고 있다고 했다”고 말했다. “항상 미소와 친절함으로 고객님께 인정받는 집배원이 되겠습니다.” 이씨가 정규직 응시원서에 쓴 말이다.

이씨의 원래 꿈은 요리사였다.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조리학을 전공했다. 대학 졸업 후 유명한 셰프가 되겠다는 포부를 품고 상경해 몇 년 동안 여러 음식점을 찾아다니며 일을 배웠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단칸방 객지생활에 연이은 임금체불, 불안정한 노동조건과 턱없이 낮은 월급 등을 겪고 나서 고향으로 내려왔다. 공장에서 일하기도 했지만 친구 권유로 2016년 집배원 일을 시작했다.

■ “행복 배달하는 집배원이 꿈”이었는데… 싸늘한 그의 곁엔 밴드·파스·연고뿐

집배노동자 이은장씨의 삶

고 이은장씨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다른 사진을 구할 수 없어 이 사진이 영정으로 쓰였다. 유족 제공

이씨 방에는 여기저기에 쓰다 만 파스가 굴러다녔다. “파스와 빨간약(소독약)을 늘 달고 살았다”는 게 이씨 어머니의 말이다. 집배원이 되면서 처음 탄 오토바이로 험한 산길을 오가다 넘어진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장시간 운전과 무거운 택배물로 인해 목, 어깨, 허리, 다리 등의 근육통과 디스크는 만성이 됐다.

이씨는 지난해 말부터 업무용 소형차량을 배정받았지만 담당지역에 좁은 산길이 많아 중간에 차를 세우고 걸어서 짐을 나를 때가 많았다. 이씨 형(40)은 “동생이 ‘하루에 1만보 이상은 걷는다’고 했다”면서 “그래도 차를 타니 바람은 안 맞아도 돼 감기는 덜 걸린다며 좋아했다”고 말했다.

상처를 가리는 데 쓴 드레싱 밴드
배달 중 갈아 입으려 준비한 옷들
이은장씨 방 컴퓨터 옆 뜯겨진 파스

주52시간제? 현실은 ‘딴판’ 업무 과다에 조출·야근 일상 근무시간 같지만 급여는 줄어 상사는 “주말 이삿짐 날라라”

집배노동자에게 ‘주 52시간제’ 적용이 예고되면서 상시계약 집배원들에게도 ‘서류상’ 주 52시간 이내 노동이 지켜졌다. 하지만 현실은 딴판이었다. 업무량은 그대로인데 인력은 전혀 충원되지 않으면서 퇴근 후 무급봉사를 해야 했다.

오전 8시부터 시작해 오후 6시에 공식 업무를 마치고 늦으면 오후 9시까지 다음날 배달할 우편물 분류 등 근무시간으로 인정되지 않는 추가 노동을 하는 식이다. 토요일이나 명절 등 ‘휴무일’에 출근한 적도 많았다. 실제 일하는 시간은 전과 같지만 인정되는 노동시간이 줄어들면서 이씨가 받는 시간외수당은 되레 줄었다. 과로에 시달리며 이씨가 받은 돈은 월 190만~200만원가량이었다.

이씨 동료들은 “이씨가 워낙 성실하고 착해서 다른 직원이 출근하지 못하면 일을 나눠 맡았다. 아플 때도 ‘내가 쉬면 다른 사람 일이 많아진다’며 출근했다”고 전했다.

이씨는 정규직 채용에 지장이 있을까 봐 우체국에 배당되는 명절용 선물세트 실적을 채우기 위해 자신이 대신 사서 집으로 가져오는 일도 많았다. 그런 동생이 안쓰러워 형과 누나 등 가족들이 선물세트를 나눠 사주기도 했다.

업무와 관련 없는 일도 이씨가 떠맡았다. 휴일에 우체국 간부 집에 가서 이삿짐을 나르기도 했다. 우체국에서 키우는 개의 밥을 주고 변을 치우는 일도 이씨가 전담했다.

정규직 하나 보고 버텨왔는데 건강하던 청년이 ‘돌연사’

14일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전국집배노동조합과 정의당 윤소하 의원은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잇따른 집배노동자 사망을 근절하기 위해 노동조건 개선과 고용노동부 특별근로감독을 촉구했다.

집배노조 최승묵 위원장은 “우정사업본부가 정부의 주 52시간 정책과 경영위기를 핑계로 꾸준히 집배원들의 노동 강도와 무료 노동을 늘려왔다”며 “인력 증원이 이뤄지지 않은 채 노동시간만 줄이려고 하다 보니 지난해에만 2010년 이후 최다인 25명의 집배원이 사망했다. 노동시간 단축이 본래 취지에 맞게 실현되기 위해서는 이에 맞는 인력 증원이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우정사업본부는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지난해 집배 인력을 총 1112명 증원했다”며 “일평균 근로시간도 40분을 단축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근래 공주우체국 집배원은 충원된 사실이 없다는 게 동료들 증언이다. 집배노조 관계자는 “일하다 다친 직원이 생겨도 인력 충원을 해주지 않아 남은 직원들이 일에 허덕였다”고 말했다.

우정사업본부 노사 등이 구성한 ‘집배원 노동조건 개선 기획추진단’의 지난해 10월 발표에 따르면 집배노동자 장시간 노동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정규직 2000명 증원이 필요하다. 30대 청년의 정규직 꿈은 영원히 이뤄질 수 없게 됐다.

글·사진 정대연·이효상 기자 hoan@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