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됐던 광주의 친구들.."참상 세계에 알렸다"

우종훈 2019. 5. 17.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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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데스크] ◀ 앵커 ▶

1980년 5월, 광주는 계엄군의 봉쇄로 완전히 고립된 상태였습니다.

우리 언론마저도 사실을 보도하지 않았던 당시 상황에서 5.18의 실상을 외부로 알리기 위해 헌신했던, 외국인들이 있었는데요.

우종훈 기자가 만나고 왔습니다.

◀ 리포트 ▶

1980년 미국 평화봉사단원으로 광주에 와 있던 폴 코트라이트 씨.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끔찍했던 광주의 5월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폴 코트라이트/당시 미국 평화봉사단원] "제가 돌보던 환자들과 있을 때, 그 곳(버스터미널)에서 어린 남자가 (계엄군에) 죽임을 당했어요. 광주에서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게 명백했죠."

당시 24살이던 코트라이트씨는 계엄군의 잔악 행위를 목격하고, 다른 단원 3명과 함께 부상자 이송과 시신 수습을 도왔습니다.

외신기자들을 병원 등으로 안내하며 광주의 참상을 외부로 알려달라 부탁했습니다.

계엄군의 폭압이 극에 달했던 5월 25일, 코트라이트씨는 광주를 에워싼 군을 피해 산길로 6시간을 걸어 광주를 빠져나갔습니다.

그는 바로 서울에 있는 미국 대사관을 찾아 광주의 참상을 알리려 했지만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습니다.

[폴 코트라이트/당시 미국 평화봉사단원] "참상을 전하려고 2시간을 대사관에 앉아 기다렸어요. 하지만 아무도 안 왔어요. 대사관의 어느 누구도 제 이야기를 들으러 오지 않았어요."

당시 일본에 머물고 있던 미국인 데이비드 새터 화이트 씨도 광주의 실상을 알리는 데 힘을 보탰습니다.

광주의 선교사가 보내온 사진과 정보들을 일본 잡지에 싣고, 뉴욕타임즈 등 외신기자들에게도 제공했습니다.

영화 '택시운전사'의 주인공인 고 힌츠페터 씨도 이 과정에서 정보를 얻어 광주에 들어왔습니다.

[데이비드 새터화이트/도쿄 템플대학교 교수] "우리는 그저 도움을 줬을 뿐입니다. (민주화를 향한) 한국인의 열정이 우리를 감동시켰기 때문에 우리는 침묵할 수 없었습니다."

자국 군대가 총칼을 겨누고 언론도 제 역할을 못했던 상황에서 광주를 지키고 진실을 알리고자 했던 외국인들의 헌신은 39년이 흐른 지금도 진한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MBC뉴스 우종훈입니다.

우종훈 기자 (hun@kjm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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