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석·김창호.. 주례도, 장례도, 내 몫이었죠"

이혜운 기자 2019. 5. 18.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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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이혜운 기자의 살롱] '산악계 대부' 이인정 태인 회장
산악인이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언제나 백발의 그가 손을 내밀었다. 히말라야를 등반하던 김창호 대장이 구르자히말에서 눈사태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을 때도, 안나푸르나에서 실종된 박영석의 기념관 건립 비용이 부족할 때도 ‘산악계의 대부’ 이인정 태인 회장이 나섰다. 강원도 속초 국립산악박물관에서 만난 그는 “난 히말라야 정상을 밟을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며 “정상에 오르는 후배들을 도와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쁘다”고 했다. / 속초=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강원도 속초 국립산악박물관에서는 지난달부터 '오, 축복받은 히말라야'라는 제목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네팔 현대미술 아버지로 불리는 레인 싱 방델의 작품 등 히말라야만을 주제로 한 작품 90점이 걸려 있다. 전시는 오는 8월 31일까지 열린다.

이 90점의 소유주는 이인정(74) 태인 회장. 전기 차단기와 반도체 부품을 만드는 연매출 400억원대 중소기업이다. 하지만 그는 회장님보다 '산악계 대부(代父)'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대한산악연맹 회장만 12년으로 최장수, 한국등산학교 2대 교장을 역임했으며, 국립산악박물관 건립에도 기여했다. 전 한국대학산악연맹 회장, 아시아산악연맹(UAAA) 회장, 박영석탐험문화재단 고문 등 산 관련 직함만 10여개다.

하지만 정작 이 산악계 대부는 히말라야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피 끓던 31세의 이인정을 좌절시킨 고산병 때문이었다. 이후 그는 세계관을 바꾸었다. 자신 대신 후배들을 돕는데 평생을 보냈다. 박영석·고미영·김창호 등이 그의 지원으로 정상에 올랐다. 그리고 후배들이 산에서 목숨을 잃었을 때 그들의 시신을 수습해 돌아왔다. 주연배우가 아니라 조연배우, 평생 조력(助力)의 인생이었다.

정상에 오른 적 없는 산악인

―전시 일부 주제가 '네팔을 거닐다'입니다.

"아마 제가 한국에서 네팔을 가장 많이 갔을 거예요. 지금까지 한 70~80번 다녀왔으니깐. 주한 네팔 명예영사도 6년간 했어요. 네팔 근로자들도 수백명 한국에 취직시켰죠."

―그렇게 자주 네팔을 갔는데도 정작 히말라야 정상은 오른 적 없다면서요.

"1976년 처음으로 네팔 쿰부히말에 갔을 때예요. 여권을 만드는 것도 어려운 시절이었죠. 그러니 아마다블람의 정수리가 보이는 3000m 지점부터 흥분해 뛰어다니기 시작했어요. 그 때문인지 이틀 만에 고산병이 왔어요. 거의 실려 가다시피 내려왔죠. 그때부터 3000~4000m만 올라가면 몸이 아파요. 정상을 밟을 능력이 없는 거지요. 이번에도 6000m 등반하는 후배들 모양새(재정 지원)를 만들어줬습니다. 전 그걸로 만족해요."

―어떻게든 올라가고 싶지는 않나요.

"마음은 늘 그렇지요. 도봉산 만장봉, 북한산 인수봉만 봐도 여전히 가슴이 뛰어요. 히말라야 정상 등반에 실패하고 느낀 점이 있어요. '산이라는 게 만만치 않구나.' '항상 겸손해야겠구나.' 제가 작년부터는 바위를 안 타요. 애들한테도 해가 되는 거 같아서. 산에 다니며 좋은 추억도 많지만 아픈 기억이 많습니다. 1969년 산악인 18명이 설악산에서 훈련하다 눈사태로 10명이 죽었어요. 전 생존자 중 한 명이었죠. 그들 시신을 찾아 설악산 기슭에 묻으면서 매일 울었어요."

―산악인의 목표는 정상 등반 아닌가요.

"저는 정상 등반에만 집착하는 사람들을 진정한 산악인이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제가 등산학교 교장을 할 때 강조했던 것도 '제일 약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움직여라'였어요. 제 모교인 중동고 산악회가 개교 100주년 기념으로 에베레스트 등반을 한 적이 있어요. 정상을 목전에 두고 다른 산악회의 조난당한 여성을 발견했습니다. 등반을 포기하고 그 여성 산악인을 데리고 내려왔어요. 그게 진정한 산악인 정신이지요."

―당신에게 산은 무엇입니까.

"박정희 대통령이 쓴 휘호(揮毫)가 있어요. '산은 인생의 도장(道場)'이라는. 제게 산은 그런 곳이에요. 전 산 때문에 1967년 월남전 지원도 했어요. 누가 '전쟁 중인 미군 창고에 가면 등산 장비가 많다'고 하더라고요. 올 때 로프, 이런 거 갖고 와서 대학 산악회 후배들에게 나눠 줬지요."

―산 덕분에 대학 입학도 했다면서요.

"제가 대학 갈 형편이 못 됐어요. 동국대에 다니던 고교 산악부 선배들이 장학금을 받게 도와주셨죠. 그렇게 간 대학의 산악부 후배가 박영석이었습니다. 아직 안나푸르나에서 돌아오지 못한 친구지요. 시신을 아직 못 찾았어요. 그와의 만남은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한없이 슬픈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국내 최초로 히말라야 8000m 이상 14좌를 무산소 등정한 김창호도, 고미영도 산에서 세상을 떴고. 제겐 다 아들딸 같은 친구들인데. 김창호는 결혼할 때 주례도 섰는데, 장례위원장까지 지내게 됐지요."

“내겐 모든 인연이 아름다워요. 인연이 악연이 돼 헤어지는 것을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그는 산이 맺어준 인연으로 대학을 갔고, 결혼을 했으며, 창업을 했다. 이인정 회장은 “인생은 도박. 내게 온 인연은 의심 없이 모두 믿는다”고 말했다. / 속초=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무례한 질문이지만, 후배들 장례를 치를 때의 심정은.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나’ 싶어요. 장례위원장이 하는 일이 유족에게 소식을 전하는 거예요. 창호 때는 네팔 셰르파(등산 안내자)도 네 명이나 죽었어요. 그때 셰르파 유족들에게도 찾아갔어요. 네팔은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태우죠. 새벽에 맡게 되는 송장 태우는 매캐한 냄새는 정말 괴롭습니다. 그러고 나면 산을 떠나고 싶어져요. 그런데 또 좀 시간이 흐르면 다시 산에 가고 싶어요. ‘내가 왜 이런 짓을 하나’ 싶지만, 운명인 것 같아요.”

―다른 운동은 안 좋아하시나요.

“스키는 많이 탔어요. 골프는 안 좋아해요.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게 골프장에서 돈내기하는 거예요. 산에서 만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 없어요. 요즘 마약으로 사고 치는 젊은 친구들, 자기들끼리 골프만 치지 말고 산에서 놀았으면 좋겠어요. 예로부터 우리 조상은 산에 오른다고 하지 않았어요. 입산(入山)한다고 하지. 그런 철학을 배웠으면 좋겠어요.”

재벌가 사위의 삶

이 회장의 아내는 고 구태회 LS전선 명예회장의 둘째딸이다. 그가 1987년에 창업한 태인의 30년 사사(社史) 초기 사진엔 구 명예회장 부부가 회사를 방문한 사진이 담겨 있다.

―아내는 어떻게 만나셨나요.

“1969년 가을 신세계백화점 등산 장비 코너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손님으로 온 집사람을 만났죠. 첫 만남은 별거 없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노산 이은상 선생(당시 한국산악회장)이 저보고 ‘이대 산악회 좀 도와주라’고 하더라고요. 집사람이 이대 법정대산악회 산악부장이었거든요. 그래서 지도해주다가 결혼까지 하게 된 거죠. 같이 인수봉도 올라가고. 당시에는 바위 타는 여자가 많지 않았거든요. 그때는 여자랑 산에 다니는 게 금기(禁忌)였어요. 그래서 몰래 만나곤 했죠. 집사람이 나 때문에 고생을 참 많이 했어요. 결혼식도 제대로 못 했고. 사람들이 제가 거짓말하는 줄 알고 안 왔거든요(웃음). 당시 사진 찍어주기로 한 동아일보 기자는 장마 취재 간다고 못 오고. 그래서 주례 선생이 ‘신부는 신랑을 사랑하나’라고 묻는데 신부가 대답도 안 하더라고. 지금도 ‘이 결혼은 무효다’라고 해요.(웃음)”

―처가의 반대는 없었나요.

“집사람이랑 연애할 때 난 산에 미쳐 있었어요. 대학 공부도 다 때려치우고 산으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할 때라고. 그런데 집사람이 ‘난 산에만 다니는 남자와는 결혼 안 하겠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대학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시작했어요. 처가에서도 딱히 날 좋아하지는 않았는데 둘째 처남이 많이 도와줬지.”

―아내가 흔히 말하는 금수저이신데요.

“금수저가 나 때문에 구리 수저가 됐지. 남편이 매일 산만 타고 다니는데 생활이 제대로 됐겠어요? 어느 날 제가 히말라야 마나슬루 등정 때문에 네팔을 다녀왔더니 쌀독에 쌀이 없는 거예요. ‘내가 이래 가지고는 안 되겠구나. 자식들부터 먹여 살려야겠구나’라고 시작한 게 태인이에요. 직장 다닐 때 알게 된 지인들과 창업했어요. 그때부터 생활 전선에 뛰어든 거지.”

―LS 사위 집 쌀독이 비었다니, 사람들이 안 믿을 것 같은데요.

“제가 그래서 장인·장모에게 고맙게 생각해요. 만약 제가 그분들께 빌붙어서 살았다면 이렇게 제대로 사업도 못했을 거예요. 창업할 때도 안 도와주셔서 산에서 만난 친구들이 돈 빌려주고 그랬어요. 많은 사람이 제가 처가 덕 봤다고 하는데 그런 거 하나도 없습니다. 그게 저를 더 위해 주신 거지요. 우리 애들도 처가 쪽으로는 취직 안 했어요. 군대도 좋은 데로 안 빠지고 최전방에 갔어요. 아들들이 하도 눈을 많이 치워서 스키장도 안 좋아해요.”

―기업을 경영하며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전 힘든 거 없었어요. 직원들이 힘들었지. 난 기업을 운영할 그릇이 못 돼요. 지금 사장 하는 김재덕같이 좋은 사람들을 만난 게 행운이었지. 하지만 문제가 생기면 책임을 지려고는 했어요. 난 기업의 회장은 의사처럼 회사가 병에 걸릴 경우 그것을 치료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아버지 같은 마음을 갖고 있어야 직원들도 회사를 믿고 일을 하지.”

산타 비르 라마(왼쪽) 네팔등산협회 회장과 악수를 하고 있는 이인정 태인 회장. 이 회장은 주한네팔명예영사를 6년간 지냈다. / 속초=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체육인들의 아버지로

그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다섯 살 때 6·25전쟁으로 아버지를 여의었기 때문이다. 그의 부친은 일본에서 학교를 나와 영화계에서 일했다고 한다. 일찍 과부가 된 어머니는 일곱 남매를 키우느라 바빴다. 형·누나들도 각자도생(各自圖生). 홀로 남은 그에게 산은 놀이터이자 현실 도피처였다. 당시 그의 집은 인왕산 앞 서울 종로구 누상동.

그는 ‘마당발’로도 유명하다. 이인정을 통하면 대한민국 누구나 만날 수 있다는 게 그의 자부다. 인터뷰하는 동안에도 전화벨이 계속 울렸다. 휴대폰은 2G 구형이었다.

―스마트폰을 안 쓰시네요.

“전화는 오는 거, 가는 것만 되면 됐죠. 정보는 신문 보고 뉴스 보는 걸로 충분해요. 제가 제일 꼴 보기 싫은 게 만나는 사람마다 이거 들여다보는 거예요. 그럼 대화를 제대로 할 수가 없어요.”

―인간관계에 지쳤던 순간은.

“전 사람이 좋아요. 그들을 만나고 도와주는 건 즐거움이고 보람이에요. 물론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 ‘원수를 사랑하라’… 그건 참 어려워요. 저도 사람 만나면서 후회를 많이 해요. 내가 저 친구를 미워하지 않아도 될 것을 가지고 미워했구나. 사람을 용서한다는 표현도 참 건방진 거예요. 세상에 태어나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집니까. 전 채용도 직원들에게 다 맡겨요. 그렇게 제게 온 사람은 100% 믿습니다. 의심하고 어찌 살아요. 회사 슬로건도 ‘인간 존중’이에요.”

―양아버지, 양아들이 많기로도 유명하십니다.

“손기정 선생이 제 양아버지, 황영조가 제 양아들이에요. 영조는 제가 데리고 에베레스트 가려고 해외 훈련도 시키고 했는데 주변에서 말려서 못 갔어요. 손 선생은 제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에요. 15년 넘게 아버지로 모시면서 해외나 백두산도 모시고 가고. 선생은 저희 집 와서 낮잠도 주무시고 그랬어요. 저를 자식처럼 예뻐해 주셨어요. 세상을 뜨시기 전 가지고 계시던 물건들도 주고 가셨는데. 저기 보이는 로마 투구도 손 선생이 제게 주신 거예요.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금메달 땄을 때 독일 정부에서 준 로마 투구래요. 진품은 기증하고, 카피 본만 만들어서 갖고 있지요.”

―어떻게 두 분을 처음 만나셨나요.

“체육회에서 만났어요. 내가 살면서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회사 차리고 체육 유망주들한테 주는 장학금 만든 거예요. 올해로 딱 30년 됐어요. 모두 500여 명, 금액은 4억5000만원이에요. 손 선생님이나 황영조가 선정위원이 돼 손자 같은 아이들에게 상장·상금도 주고. 장미란이, 유승민이도 다 격려 차 참석했지요. 그렇게 장학금 받은 아이들이 커서 국가대표도 되고. 그게 제일 큰 보람이에요.”

―그래서, 지금 행복한가요.

“대화할 친구, 산에 갈 친구가 있는데 제가 뭘 더 바라겠어요. 제게 모든 인연은 아름답고, 인연이 악연이 돼 헤어지는 걸 가장 아프게 생각합니다. 노년에 들고 있는 나는 추억을 먹고 살지요. 평범 속에 진리가 있는 겁니다. ‘아임 베리 해피(나는 정말 행복해요)’.”

그는 사람을 볼 때 인간관계를 가장 먼저 본다고 말했다. 남을 이해하는 사람인지, 자기 몫을 줄일 줄 아는 사람인지, 남을 믿고 도울 수 있는 사람인지를 살펴본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주례를 섰다고 했다. 하지만 항상 하는 말이 있다. “인생은 산과 같다. 무조건 빨리 가려고 하지 말고 돌아갈 수 있으면 돌아가라. 언젠가는 정상에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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