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레기: 언론은 왜 혐오의 대상이되었나

정용인 기자 2019. 5. 18.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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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5월 9일 KBS가 생방송으로 진행한 ‘문재인 정부 2년 특집 대담 - 대통령에게 묻는다’ 대담 프로그램을 진행한 송현정 KBS 기자에게 “대통령의 말을 끊고 질문하는 등 편파적이고 무례한 태도로 일관했다”는 비난이 집중적으로 쏟아졌다. / KBS 유튜브 캡처

송현정 KBS 기자. 5월 중순 포털 검색 실검을 장악했다. 5월 9일 생방송으로 진행된 대통령과의 대담 진행자였다. 비난 글이 쏟아졌다. 대담과 관련해 ‘언론 밥’을 먹고 있는 정치평론가와 현직 KBS 아나운서가 공개된 페이스북 댓글에서 주고받은 대화도 ‘박제’(수정하지 못하도록 캡처해 온라인에 올린다는 의미)되었다.

기자보다는 총괄 PD의 책임 더 커
“그쪽 파워가 예전만은 못하다” “송현정에게 정규재를 기대했나”라는 평론가의 말에 네티즌들이 발끈했다. 정규재 전 <한국경제> 논설위원은 지난 탄핵정국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을 만나 그의 일방적인 입장을 듣는 대담을 진행했다. 언론계 용어로 속칭 ‘빨아주는’ 대담이었다. “비판 없이 일방적으로 찬양하는 대담을 기대했느냐”는 정도의 뜻으로 읽힌다. ‘그쪽 파워’에서 ‘그쪽’은 맥락상 문재인 지지자다. 비난 댓글이 폭주했다. 이광용 KBS 아나운서는 이날 밤 사과문을 자신의 소셜미디어(SNS)에 올렸다.

비난은 대담을 진행한 송 기자에게 집중됐다. 개인 신상에 관한 정보까지 나돌았다. 사실이 아닌 주장도 제기됐다. JTBC 태블릿 보도 이후 박근혜 대통령과 청와대 출입기자 간담회장에서 구석에서 수첩을 들고 받아적고 있던 여기자가 송 기자가 아니냐는 캡처 사진이다. 사진 속 인물은 송 기자가 아니다. 송 기자가 자유한국당 출입기자라는 이야기도 사실처럼 돌았다. 송 기자가 맡은 역할은 국회반장이다. 여야를 망라하는 자리다. 비난이 집중된 것은 송 기자의 발언 내용과 시종일관 찡그린 것처럼 보이는 표정이다. 한마디로 ‘애티튜드’ 문제라는 것이다.

왜 송 기자에게 비난이 집중된 것일까. 대통령과 대담을 나눈 것은 송 기자이지만 방송 연출은 팀플레이다. 질문지 작성부터 카메라 앵글, 당일 대담자 동선 설정까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다. 이날 취임 2주년 방송은 KBS ‘심야토론’ 제작팀이 주관했다. 책임의 무게를 따진다면 대담에 출연한 송 기자보다는 연출을 지휘한 CP(해당 프로그램 제작 전체를 지휘하는 총괄 PD)의 책임이 더 크다. 비유하자면 <그것이 알고 싶다>의 방송 내용을 좌우하는 것은 그날 방송을 맡은 PD이지, 화면의 중심에서 내용을 전달하는 배우 김상중씨가 아니라는 얘기다.

약 50일 전 심야토론팀은 청와대에 제안서를 제출했고, 2주의 검토를 거쳐 제안서는 승인됐다. “대담 형식으로 진행하자”는 데 더 적극적인 것은 청와대 쪽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최초 기획안은 ‘300인 국민 대토론회’라는 형식이었다. 대담 프로그램을 보면 각계각층 시민의 의견 영상을 보고 문재인 대통령이 평가하는 식으로 짧게 삽입되어 그 흔적이 남아있다. 대담 형식에 대해 청와대 측은 “사전 질문지를 전달하지 않아도 되며, 민감한 사안이나 정치쟁점을 피해갈 생각은 없다”는 뜻을 밝혀왔다.

“‘성역 없는 날카로운 질문을 통한 허심탄회한 답변, 다시 말해 다른 언론도 받아 적을 특종’에 대한 집착이 참사를 불러왔다.” KBS 내부인사 ㄱ씨의 말이다. 기자를 만난 이 인사의 답변에는 고민이 잔뜩 묻어 있었다. “변명처럼 들릴 줄 안다. 대담이 이뤄진 날 우연히 송 기자를 봤다. 아직 몇 시간 남아있는데도 너무 얼어 있었다. ‘표정이 왜 그랬느냐’는 말이 많은데 진짜로 너무 긴장했다.” 그 역시 연출 문제를 이야기했다. “얼굴이 굳어 있다면 문 대통령이 답변할 때 살짝 가서 ‘얼굴 풀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내가 보기엔 연출자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대통령 인터뷰라도 누군가는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 쪽 스튜디오도 아니고, 청와대에 들어가 상춘재에서 인터뷰를 하다보니 연출도 긴장해 타이밍을 놓친 것 같다.”

그는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덧붙였다. “송현정 기자를 비롯해 지난 정권에서 임명한 사장과 이사장에게 맞서 싸웠던 것이 새노조였다. 지난 정권에서 제작현장에서 쫓겨나 핍박받은 사람들이다. 정권이 바뀐 후 양승동 사장을 비롯한 새노조 측 인사들이 KBS 요직을 장악했다. 그런데 지난 강원도 산불 때 <오늘밤 김제동> 편성 논란 등 악재가 잇따르고 있다. 문제는 현 경영진이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결국 시청자나 국민들에게 ‘바뀌어봤자 달라진 것은 없더라’가 된 것 아닌가.” KBS는 복수노조 체제다. 통칭 새노조로 지칭되는 ‘전국언론노조 KBS지부’가 전 정부의 낙하산 인사 논란을 일으켰던 고대영 사장 체제에 맞서 파업을 주도한 노동조합이다.

또 다른 내부인사 ㄴ씨는 이렇게 말했다. “문제가 된 대담 프로그램을 실시간으로 보면서 ‘아, 이거 욕먹겠구나’ 생각했다. 공급자와 수용자로 나눈다면 프로그램 제작은 당연히 수용자 중심으로 해야 한다. 제작을 하거나 보도할 때 공급자의 관심사나 이해에 너무 초점을 맞추면 안 된다. 송 기자의 문제가 아니라 결정적인 실수는 기본 콘셉트가 뭔지 불분명했다는 것이다. 수용자의 관심에 초점을 놓고 프로그램의 기획의도를 본다면 당연히 취임 2주년을 맞이한 문재인 대통령이 여러 사안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런데 기획된 것을 보면 디베이트(논쟁) 내지는 토론 프로그램처럼 되었다. 기획의도가 불분명한 상태에서 기자에게 그냥 맡겨놓은 것일 수도 있다. 공급자 마인드에서는 기자정신도 중요하고 저널리즘으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인데, 시청자 입장에서는 생뚱맞은 것이다.”

이 인사는 “실제 대담을 보는 시청자 입장에서는 방송 진행자의 질문이나 리액션은 전혀 궁금해하지 않는다”며 “그럼에도 카메라를 잡는 방식을 보면 질문자인 기자에게 상당히 많이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덧붙였다.

한·경·오 역시 기득권 ‘기레기’ 집단이라는 비난을 담고 있는 웹자보. / 인터넷커뮤니티

KBS 내부인사들의 고민
이 인사 역시 이번 사태가 누적된 어떤 ‘원인’ 때문에 촉발된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가 파업한 시기(2017년 8월~2018년 1월)는 문재인 대통령 취임 이후였다. 솔직히 말해, 그 이전 최순실 국정농단 국면 때부터도 프로그램 제작에 제약은 없었다. 시쳇말로 완전히 ‘해방구’였다. 보통 대통령이 새로 취임하면 어젠다 기획 관련 협조요청이 엄청 들어온다. 돌이켜보면 새 정부의 복지나 경제, 예컨대 소득주도성장과 같은 어젠다는 검증할 만한 좋은 프로그램 주제였다. 그런데 파업을 핑계로 안 했다. 근본적으로 따져보면 ‘실력 문제’다. KBS의 문제를 전 정권 인사의 전횡 탓으로 돌려 핑계를 댄 것은 아니었을까.”

이는 비단 KBS만의 문제는 아니다. 최근의 언론에 대해 제기된 비판들을 보면 과거 DJ, 참여정부 시기 태동되었던 언론개혁시민운동과는 큰 차이가 있다. 당시 언론개혁운동이 ‘안티조선’, 조선·중앙·동아 기득권 언론에 대한 비판에 집중되었다면 최근, 특히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언론 비판을 상징하는 단어는 ‘기레기’다. ‘기자+쓰레기’의 합성어로 인터넷을 통해 광범위하게 공유되는 단어다. 신조어 ‘기레기’에는 과거 기득권 보수언론만 포함되지 않는다. 소위 한·경·오, 한겨레와 경향, 오마이뉴스 및 진보언론 역시 기득권과 무관하지 않다는 비판이다. 여기에 언론노조와 방송사 노동조합, 진보를 지향하는 언론인도 포함된다. 어떻게 보면 보다 근본적이고 심화된 비판이다.

그런데 간극이 존재한다. 재벌의 이해를 대변하거나 정파적 이해, 구체적으로 자유한국당의 입장에 선 보도나 언론인도 기레기라는 비판을 받지만, 대통령이나 정권 정책에 대한 진보적 입장에 선 비판 역시 같은 취급을 받는다. 박근혜 전 대통령 청와대 기자 사진 논란이나 ‘이번 대담을 진행한 송 기자는 KBS 내에 숨어 있는 자유한국당 지지자’와 같은 ‘가짜뉴스’도 기레기 비판에 편승해 사실처럼 유포된다.

“본질은 ‘정치권력과 거리를 두는 것이 공정한 방송’이라는 통념을 지나치게 적용하려 했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매우 불공정한 방송이 되고 말았다.” 김동민 한일장신대 신문방송학과 교수의 말이다. 김 교수는 “표정 논란은 그렇다치더라도 질문 내용은 혼자 짜지 않았을 텐데 북한 미사일이나 독재자와 같은 발언이 자유한국당의 일부 지지자를 제외하고 광범위하게 시청자들의 동의를 받을 수 있는 발언이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언론이 꼭 권력과 대척점에 서서 원수처럼 지내야 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잘한 것은 잘했다고 하고 못한 것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KBS가 과거와 차별화돼야만 정상 언론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는 조급함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냐”고 말했다.

공정함 경직되게 적용해 불공정해져
“논란이 기자 개인에 대한 공격으로 가는 것은 잘못된 방향”이라고 전제한 김언경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사무처장의 지적도 비슷하다. “예전에 자신들이 권력에 장악되었던 것 때문에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강박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질문 태도가 무례했다든지, 말을 끊었다는 것 등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당당하게 보이는 것과 적절하게 질문을 잘하는 것은 다르다. 예를 들어 대통령에게 많은 사람들이 갖는 불만, ‘촛불 대통령’을 자임하면서 왜 개혁이 이렇게 느린지에 대해 물었다면 그런 비판이 나왔을까. 자유한국당이 요구하는 안건을 두고 ‘대화를 할 거냐, 말 거냐’라고 묻는 질문은 국민들이 듣기에 불편하다. 그래서 화가 났다고 본다.”

<저널리즘 토크쇼 J>는 KBS의 언론 비평 프로그램이다. 5월 15일 녹화에서는 원래 계획되어 있는 프로그램을 변경, 자사가 개입된 문 대통령 취임 2주년 대담 논란을 다루는 꼭지를 긴급 편성했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최경영 KBS 기자는 “이미 대중들은 변하고, 기자들보다 훨씬 더 빨리 뉴미디어 환경에 적응하고 있다. 훨씬 더 광범위하고 포괄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이고 있다”며 “이미 바뀐 언론환경 속에서 적응하고 일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언론인이라는 직업의 숙명”이라고 말했다.

최근의 ‘기레기’ 비판 담론이 확증편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 최 기자는 “분명 그런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대중에 대한 신뢰를 잃어서는 안 된다”며 “한국에서 언론자유는 언론인 스스로의 힘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촛불혁명과 같은 시민들의 손에 의해 얻어낸 것이기 때문에 시민들의 이야기에 끝없이 귀를 기울이고 겸손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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