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 칼럼] 光州와 봉하마을, 누가 불편하게 만드나

최보식 선임기자 입력 2019. 5. 24. 03:17 수정 2020. 11. 12.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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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낙연 의원의 국회 연설
"군사독재 정권보다 더 빈부 격차 키운 반서민 정권 됐다, 노무현 정부에 서민은 배신당했다.."
최보식 선임기자

지난달 하순 ‘노무현과 바보들’ 영화를 보고 나서 이낙연 총리는 “노무현 하면 떠오르는 것은 희망(希望)”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번 호(號) 월간조선에 따르면 2004년 이낙연 의원의 대정부 질문은 이러했다.

"지난 주말 서울에서는 각종 시위가 끊이질 않았다. 매일 음식점 190곳이 문을 닫고 실업자 950명이 생긴다고 한다. 음식점의 85%가 적자를 보거나 현상 유지에 급급하다. 노동자, 농민, 노점상, 택시 기사만 시위에 나선 게 아니라, 종교인, 교육자, 사학 재단 관계자, 사회 원로, 재향군인, 음식점 주인, 집창촌 여성까지 시위에 나섰다. 급기야 공무원들이 총파업을 선도하는 형국이 됐다. 이 정도면 거의 '민란(民亂)' 직전 상태라고 보아야 옳지 않겠나."

노무현 정부 출범 3년이 됐을 무렵 그의 국회 연설도 '노무현 희망'과는 무관했다.

"국민의 자살이 사상 최다 기록을 해마다 경신하고 있다. IMF 때보다 훨씬 많다. 빈곤층이 800만명에 육박하고 있다. 군사독재 정권보다 더 빈부 격차를 키운 반서민 정권이 됐다. 주택 공급을 늘린다면서 규제를 강화하고 균형 발전의 이름으로 전국을 개발 광풍에 몰아넣었다. 최대 실패는 양극화 확대와 사회 분열이다. 서민들은 노무현 정부에 배신당했다고 느끼고 있다."

노무현 10주기를 맞아 봉하마을에 집결한 당정청 핵심 인사, 현직 광역단체장, 과거 정부 인사 중에도 당시 이 총리 같은 발언을 했던 이가 꽤 섞여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희망' '가치 추구' '원칙 소신' '반칙 특권과의 싸움' '새로운 정치의 씨앗' 등 좋은 말만 넘쳐나고 있다. 노무현과 대립각을 세웠던 보수 언론조차 그가 얼마나 훌륭한 정치인이었는지를 전달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때와 지금 노무현 평가가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 설령 그때 안 보였던 것이 지금 보이게 됐다 해도, 이낙연 총리처럼 갑자기 180도 사람이 달라질 수는 없다. 단지 지금의 권력과 시세(時勢)에 편승해 입장을 그렇게 바꿨을 뿐이다. 문재인 정권이 안 들어섰으면 이 총리도 봉하마을에 안 갔을 거고 지금처럼 성대한 10주년 추모 행사가 되진 않았을 것이다.

물론 노무현은 이런 대접을 충분히 받을 만하다. 그는 우리 정치사에 큰 정신적 유산(遺産)을 남겼고, 보수 진영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가 던진 '지역주의 타파'는 여전히 이념과 진영 논리를 떠나 함께 풀어야 할 과제다. 실제 그의 안타까운 죽음으로 반대 입장에 섰던 사람들도 연민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현 정권과 지지 세력이 주도하는 노무현 10주기나 각종 문화 축제에 대해 보수 쪽 사람들 마음속엔 어떤 불편함이 있다. 현 정권 사람들은 "노무현은 보수·진보 진영을 떠나 소중한 가치"라며 이렇게 떠들썩한 행사를 벌이면서, 왜 보수의 상징적 인물에 대해서는 그렇게 야박했느냐는 것이다. 2년 전 '박정희 탄생 100주년'을 맞았을 때 현 정부의 개입으로 기념우표 발행은 취소됐고 동상(銅像) 건립은 무산됐다. '박정희' 이름을 걸고는 기념 음악회 장소를 빌리기도 어려웠다고 한다. 현 정권에서 '박정희 가치'는 한낱 조롱거리로 여겼다.

이는 자기들만 가치 있고 대접받을 수 있다는 도덕적 오만(傲慢)과 같은 것이다. 얼마 전 광주 민주화 운동 기념식에서 문 대통령이 "독재자의 후예가 아니라면 5·18을 다르게 볼 수가 없다"고 한 발언도 그렇다. 천안함 피격은 북한과 무관하다든가, 세월호 침몰에는 정권이 개입됐다는 주장에 대해 침묵하던 대통령이 왜 이 부분에만 민감했나. 그의 머릿속에는 자신의 세력은 민주화 가치를 지키는 쪽이고 한국당을 비롯한 안보 보수 쪽은 독재 정권 잔당으로 입력돼 있는 것 같다.

'광주 사태'를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공식화하고 특별법으로 보상해준 쪽은 문 대통령이 폄하한 '독재자 후예'인 보수 정권이었다. 그렇다 해도 개인은 다른 각도에서 광주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게 민주화를 거쳐 획득한 사상과 표현의 자유다. 이를 '독재자의 후예' 운운하는 게 바로 독재자적 발상이다.

문 대통령은 학생운동 전력으로 도덕적 우위에 있어 그렇게 말해도 된다고 믿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민주화 운동으로 9년간 옥살이했던 장기표씨는 필자와 통화하면서 “사실 나는 데모할 수 있는 대학생이어서 특혜를 받았다. 나 같은 사람만 있었으면 대한민국은 벌써 망했다. 농사 안 짓고 공장에서 일 안 하고 기업도 안 하고 전부 다 데모만 했으면 나라 안 망했겠나. 사회는 다양한 부문에서 다양한 노력이 총화를 이뤄 발전한다”고 말했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과거 운동 경력을 더 이상 팔아먹지 말라는 뜻으로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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