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코파이도 중년.. 올해 45세다

이용재 음식 평론가 2019. 5. 25. 03:0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주말- 이용재의 필름위의만찬] (2) '공동경비구역 JSA'와 초코파이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한국의 이수혁(이병헌) 병장은 북한의 오경필(송강호) 중사에게 "초코파이 배 찢어지게 먹을 수 있다"며 귀순을 권유한다. 기원을 찾자면 1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초코파이. 이 '국민 과자'가 올해로 45세가 됐다. 내가 군대 훈련병 시절을 떠올리는 것처럼, 초코파이와 얽힌 추억은 누구에게나 하나씩 있을 듯하다. / 영화 캡처

"형, 안 내려올래? 초코파이, 배 찢어지게 먹을 수 있잖아." 이수혁(이병헌 분) 병장의 제안에 오경필(송강호 분) 중사가 씹던 동작을 멈춘다. 정색하며 입안 초코파이를 통째로 뱉어낸 뒤 준엄하게 말한다. "거 이수혁이, 내 딱 한 번만 얘기할 테니까 잘 들어두라우. 내 꿈은 말이야, 언젠가 우리 공화국이 남조선보다 훨씬 더 맛있는 과자를 만드는 기야. 알갔어? 기때까진 어쩔 수 없이 이 초코파이를 그리워할 수밖에 없어."

완전 늦깎이로 넷플릭스에 가입해 '공동경비구역 JSA(2000)'를 다시 보았다. 역시 훌륭하군. 영화만큼이나 초코파이가 그랬다는 말이다. 그날 밤, 논산훈련소에서 조교로 복무하던 대학 동기를 우연히 만나 초코파이를 얻어먹었던 훈련병 시절의 꿈마저 꾸었다. 내친김에 다음 날 아침, 오리온제과의 소비자 상담 센터로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공장 견학이 가능한가요? 누군가 블로그에 올린 초코파이 청주 공장 견학기를 본 뒤였다. 아뇨, 공장은 외부에 공개하지 않습니다. 본사 홍보실까지 연결되어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야 인터넷의 견학기는 기업 공식 블로그에서 올린 것이라는 답을 들었다.

조금 아쉬웠다. 비공개 이유는 충분히 헤아릴 수 있지만 분위기만 맛보는 견학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전주의 하이트맥주 공장이 그랬고, 미국 북서부 오리건주 꼭대기의 틸라묵(tilamook) 치즈도 견학 전용 공장을 별도로 운영한다. 공장 바깥만 돌거나 포장처럼 기업 비밀이 드러나지 않는 공정만 살짝 보여주고 제품이나 기념품 등을 판다. 초코파이는 세계적 과자인데 문화 공간 같은 것도 없나요? 네, 마트에서 쉽게 살 수 있는 익숙한 과자이므로 딱히 없습니다.

영화 캡쳐

베트남에서는 제사상에도 올라간다는 초코파이에도 '오리진 스토리'가 있다. 1973년, 미국 출장길에 동양제과(현 오리온제과)의 김용찬(1990년 퇴사) 개발실장이 조지아주에서 초콜릿을 입힌 과자를 먹고 착안해 개발했다는 이야기다. 말하자면 본관이 미국이라는 사실만 밝히고 끝인 셈이다. 1974년에 출시되었으니 올해로 마흔다섯 살, 세계로 뻗어 나간 중년 과자치고는 다소 빈약하고 위상에도 맞지 않는다. 초코파이의 계보는 좀 더 길고도 재미있는데 어째서 이만큼만 소개되는지 의아할 지경이다.

개발자인 김용찬 실장이 '그 과자'를 먹은 곳은 애틀랜타의 호텔이었다. 마거릿 미첼의 소설이자 영화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배경이면서 미국 동남부의 거점 도시인 조지아주의 도시 말이다. 거기에서 북서쪽으로 두 시간쯤 올라간 테네시주에는 채터누가라는 도시가 있다. 인구가 17만 남짓이니 충남 서산 규모인데, 명물이 둘 있다. 수족관 해마와, 초코파이의 조상인 그 과자 '문 파이(Moon Pie)'이다. 1917년 4월 29일 처음 발매되었으니 문 파이의 역사는 백 년도 넘는다. 개발자인 얼 미첼 주니어에 말로는 아버지가 켄터키주 광부들 이야기를 들은 것이 계기였다고 한다. '그레이엄 크래커 사이에 마시멜로를 넣은 간식'을 먹고 싶다는 바람이었다. 그래서 그레이엄 크래커 사이에 마시멜로를 끼우고 전체에 초콜릿을 입힌 문 파이가 탄생했다. 나이로 치자면 초코파이는 문 파이의 손주뻘이다.

초콜릿이야 당연히 익숙한 식재료이고 마시멜로도 수입된 지 오래라 아주 낯설지는 않다. 원래는 아욱(mallow) 뿌리의 즙액이 주재료라 마시멜로라는 이름이 붙었으나 요즘은 설탕과 물엿 위주로 만든다. 두 재료를 끓인 뒤 거품기로 공기를 불어 넣은 상태에서 젤라틴으로 굳히면 스펀지처럼 사뿐하면서도 씹으면 적당한 탄력이 느껴질뿐더러, 녹이면 모차렐라 치즈처럼 쭉쭉 늘어나는 사탕이 된다.

초콜릿과 마시멜로가 단맛을 통해 즐거움을 주는 음식 혹은 식재료인 반면 그레이엄 크래커의 족보는 좀 다르다. 주재료인 그레이엄 밀가루는 식이요법을 통한 치료의 핵심이었다. 역사는 1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의 목사 실베스터 그레이엄은 지방을 먹으면 살이 찌고 동물의 고기를 먹으면 난폭해진다고 주장했다. 정식 의학 교육도 받지 않았으면서 치유적 채식의 중요성을 설파했고, 그 일환으로 그레이엄 밀가루를 개발했다.

그레이엄 밀가루는 통밀가루의 일종인데 배젖은 곱게, 겨와 눈은 거칠게 간 뒤 한데 합쳐 만든다는 점이 다르다. 현미보다 겨와 쌀눈 등을 전부 깎아 내고 배젖만 남긴 백미가 더 매끄럽고 부드럽듯, 빵이나 과자류도 통밀가루로 만들면 아무래도 더 딱딱하고 뻣뻣하다. 따라서 그레이엄 크래커로 만든 문 파이도 초코파이보다는 더 부슬부슬하고 뻑뻑하다. 국내에 정식으로 출시된 그레이엄 크래커가 없는 가운데, 다이제스티브(영국 맥티비사)의 질감이 가장 흡사하다.

그레이엄 목사의 믿음을 19세기에는 존 하비 켈로그 박사와 동생 윌 키스 켈로그가 계승했다. 차와 커피 탓에 미국인이 심각한 신경쇠약증에 시달리므로 식생활을 개선해 치료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며 미시간주에서 배틀크리크 요양원을 운영했다. 성이 낯익다면, 그렇다. 이 형제가 켈로그 시리얼의 창립자다. 콘플레이크는 1894년 치료식으로 발명되어 여전히 현역으로 팔린다. 한편 사업가 찰스 포스트가 신경쇠약증 치료를 위해 이곳에 입원한 뒤 만들어 판 시리얼이 업계 2인자인 포스트(Post)의 기원이다.

세월이 흘러 그레이엄 밀가루와 크래커의 팔자는 완전히 바뀌었다. 종교적 색채와 효능은 씻겨 나갔고 별미 취급을 받으며 명맥을 유지한다. 뉴욕식 치즈 케이크의 밑받침(크러스트)으로 빠져서는 안 될 재료가 되어 쾌락의 세계에 자리를 굳게 잡았다. 시리얼의 사정은 좀 다르다. 종교적 색채와 치료 효과는 씻겨 나갔지만 아직도 건강, 특히 다이어트식처럼 포장되어 팔린다. 계보를 더듬어 올라가면 18세기의 약재(藥材)까지 딸려 나오는 초코파이는 2016년, 42년 만에 처음으로 신제품인 바나나 초코파이를 내놓아 돌풍을 일으켰다. 요즘은 개당 2500원짜리 프리미엄 초코파이를 내놓았는데 가격에 비해 고급화 흔적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별맛이 없다는 말이다.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