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현장 떠도는 '유령', 엘리베이터 노동자

반기웅 기자 입력 2019. 5. 25.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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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엘리베이터 설치 공사 현장. 본 사진은 본문 현장과 관련 없음.

5월 21일 밤 9시 서울의 한 아파트 건설현장. 분주했던 낮과 달리 밤을 맞은 건설현장은 잠잠했다. 건설사 직원은 이미 오후 6시를 전후해 퇴근했고, 일용직 건설노동자들은 그보다 앞서 현장을 빠져나갔다. 입구를 통과해 간이 경비실을 지나자 인기척이 끊겼다. 곳곳에 멈춰선 중장비가 보였다. 지하주차장에 들어서자 습한 콘크리트 바닥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페인트 냄새가 코를 찔렀다. 목적지는 109동. 간이 표지판이 설치돼 있었지만 좀처럼 길을 찾기 어려웠다. 통신설비 설치 전이어서 전화도 인터넷도 먹통이었다.

20분 가까이 헤맨 끝에 109동을 찾았다. 공사 중인 엘리베이터 문을 두드리며 “계십니까” 소리치자 위에서 “누구세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잠시 뒤 작업용 엘리베이터(카)가 내려와 문이 열렸다. “무슨 일입니까.” 얼굴에 먼지를 뒤집어쓴 ㄱ씨(39)가 나왔다. ㄱ씨는 5층에서 홀로 엘리베이터 문을 달고 있던 참이라고 했다. 다른 동 엘리베이터에도 자신과 같은 작업자들이 흩어져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ㄱ씨를 비롯한 엘리베이터 설치 노동자들은 왜 모두가 떠난 건설현장에 남아 일을 하고 있을까.

아무도 없는 현장에 남은 노동자들 ㄱ씨는 매일 오전 7시30분에 현장에 나온다. 엘리베이터 제조사로부터 받은 부품과 기자재를 조립하고 설치하는 게 ㄱ씨의 일이다. 설치일을 한 지는 10년이 됐다. 처음 한동안은 ‘사수(선임자)’를 따라다니며 일을 배웠다. 5년차에 접어들자 일이 손에 익었다.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게 되자 ㄱ씨의 일상에서는 저녁과 휴일이 사라졌다. 엘리베이터를 ‘빨리 또 많이’ 설치해야 일감이 끊기지 않는 구조여서 밤낮으로 엘리베이터를 레일에 걸었다. 제조사가 요구한 공기(工期)는 늘 촉박하다. 일단 통보하면 그 기간에 맞춰야 한다. 기한을 넘기면 새 일감을 주지 않는다. 이 때문에 ㄱ씨는 따로 퇴근시간을 정해두지 않는다. 이번 주 내내 밤 11시까지 작업을 했다. 자정을 넘기는 날도 부지기수다. 종종 밤을 새우기도 한다.

지난 2월 아파트 건설현장에 투입된 이후 오롯이 쉰 휴일이 없다. 그나마 노동절에 반나절 쉰 게 전부다. 수면시간을 쪼개 작업을 하다보니 늘 잠이 부족하고 집중력이 떨어진다. ㄱ씨는 “건설현장에서 밤에 일하는 사람들은 엘리베이터 설치하는 사람뿐이다”라며 “피로가 쌓인 상태에서 작업을 계속하기 때문에 사고가 자주 난다”고 말했다. ㄱ씨는 이날도 11시를 넘겨 퇴근했다.

엘리베이터 노동자들의 강도 높은 노동은 건설사의 명령과 이를 따르는 엘리베이터 제조사의 지시에서 비롯된다. 건설사들은 승객용 엘리베이터를 먼저 설치해 공사용으로 쓰기를 원한다. 승객용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건설 자재·부품·인력을 나르고 작업을 한다는 얘기다. 별도의 공사용 리프트를 세우는 비용을 아낄 수 있고, 아파트 마감 공정 기간을 줄일 수 있기 때문에 건설사들은 승객용 엘리베이터 선(先) 설치를 제조사에게 강요한다. 수주 경쟁을 해야 하는 제조사의 입장에서는 건설사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다. 엘리베이터 설치공사 기간이 짧아진 이유다.

엘리베이터 설치 공사 현장. 본 사진은 본문 현장과 관련 없음.

이미 줄어든 설치공사 기간은 현장에서 추가로 단축된다. ㄱ씨가 당초 통보받은 엘리베이터 설치기간(15~24인승 1대 기준)은 75일이었지만 두 차례에 걸쳐 재공지가 내려오면서 45일까지 공기가 줄었다. 승강기설치협회 등 업계에서 정한 엘리베이터 설치 적정 기간은(15~24인승 1대 기준) 최소 120일 이상이다. 엘리베이터 설치업계 관계자는 “예전에는 공사기간을 수주계약에 명시했는데 지금은 계약서에도 기간을 넣지 않는다”며 “개별 현장 상황에 맞춰서 공기가 단축되고 심지어 현장 소장 뜻에 따라 공기가 좌지우지된다”고 말했다.

서울의 또 다른 아파트 현장에서 만난 엘리베이터 설치 노동자 ㄴ씨(56)도 매일 연장근로를 한다. 일을 해온 지난 26년 동안 거의 매주 주말에 일을 했다. 6.25㎡(약 1.9평)의 비좁은 공간에서 반복되는 장시간 노동은 근골격계 질환을 불렀다. 추락과 감전사고 위기도 숱하게 겪었다. “허리 통증은 기본이고 잦은 드릴 작업 때문에 청력에 이상이 생긴 동료들이 많다”며 “몸 버려가면서 일을 하는데도 제조사들이 담합해서 설치 단가를 떨어뜨려 수입이 줄었다”고 말했다.

인정받지 못하는 밤샘노동 엘리베이터 설치 노동자에게 야간·휴일·연장 근로는 일상이지만 이들의 노동은 인정받지 못한다. 당연히 이들의 추가 노동에는 어떤 수당도 붙지 않는다. 이들은 매일 제조사 서버에 작업일지를 기록하는데 야간·휴일·연장 근로 내역은 제외된다. 공식적으로 이들의 근무시간은 평일 오전 8시30분부터 오후 5시30분까지다. 그 외 노동 내역에 대한 기록은 제조사 측에서 허용하지 않는다. 공식 서류상 이들은 주52시간제 적용을 받는 제조사 직원과 동일한 환경에서 일한다.

부산 엘리베이터 노동자 추락사건을 담당했던 산업재해 전문 윤경환 노무사는 “연장근로의 관리와 인지 여부는 불법파견 행위를 판단할 때 중요한 요소”라며 “낮에 이뤄진 불법 업무지시는 공동 도급사로서 권리라고 해명할 수 있더라도 연장근로 관리 기록이 나오면 제조사들은 법 위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했다.

ㄱ씨를 비롯한 엘리베이터 설치 노동자들은 엘리베이터 설치 협력업체 소속이지만 업계에서는 이들을 대형 제조사(현대엘리베이터·티센크루프엘리베이터코리아·오티스 엘리베이터·미쓰비시 엘리베이터 등) 소속 노동자에 가깝다고 본다. 근무일정과 근무시간 등을 작업일지에 적어 제조사에 보고하는 한편, 안전 관리 등 업무와 관련된 모든 지시를 대형 제조사로부터 직접 받기 때문이다. 지난 3월 발생한 부산 엘리베이터 설치 노동자 추락 사망사고를 담당한 최해영 부산 해운대경찰서 형사과장은 “대형 제조사가 설치 노동자에게 모든 업무지시를 하고 있어 실질적인 고용관계로 볼 수 있다”며 “엘리베이터 업계 자체가 위험·사고 책임은 하청업체에 돌리고 이윤은 대형 제조사가 독식하는 기형적인 구조로 이뤄져 있다”고 말했다. 그는 “심지어 제조사가 협력업체에 공사 현장 폐기물 처리 지시를 하고 처리과정에서 나온 수익을 제조사에서 챙긴 혐의도 확인했다”고 덧붙였다.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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