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노벨상 받아오라고?..'프리츠커 프로젝트'에 화난 건축업계

반기웅 기자 2019. 6. 1.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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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정부가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 수상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명칭은 ‘넥스트 프리츠커 프로젝트(이하 NPP사업)’. 청년 건축가 30인을 선발해 해외 유수의 설계사무소에서 선진 설계기법을 배울 수 있도록 1인당 최대 3000만원의 연수비를 지원하는 사업이다. 프리츠커 상은 하얏트 재단이 ‘건축예술을 통해 재능과 비전, 책임을 실천하고 인류와 건축환경에 중요한 기여를 한 건축가’를 기리기 위해 만든 상이다.

정부의 NPP사업계획 발표 이후 정작 건축업계 내부에서는 NPP사업에 대한 냉소 섞인 비판이 나오고 있다. 건축업계를 위한 지원사업에 건축가들이 반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도 건축가 발크리슈나 도시(2018 프리츠커 상 수상)가 설계한 아라냐 공동주택. (인도 인도르) / 프리츠커위원회 홈페이지 www.pritzkerprize.com

국토교통부가 5월 21일 발표한 NPP사업계획에서 밝힌 ‘프리츠커 상’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프리츠커 상(Pritzker): 건축설계분야 노벨상으로 불리는 국제건축상으로 1979년부터 전세계 건축가를 대상으로 시상. 총 43명 시상자 중 아시아에서는 중국 1명, 인도 1명, 일본 8명이 수상하였으며 우리나라는 아직 수상자 없음. 아울러 국토부는 “우리나라도 프리츠커 상을 수상할 수 있는 세계적인 건축가를 배출하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행간을 이어보면 ‘중국과 인도, 일본이 프리츠커 수상을 하는 동안 한국은 수상 경력이 없으니 정부가 직접 프리츠커 상을 따낼 인재를 육성하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왜 우리는 프리츠커 상을 받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에 정부가 ‘국내 건축가들이 해외 선진 건축설계를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답한 셈이다.

건축업계는 프리츠커 상을 바라보는 국토부의 시각이 왜곡됐다고 본다. 최근 프리츠커 상의 심사기준은 ‘건축물’의 우수성에서 건축의 ‘공공성’으로 옮겨가고 있다. 건물에 묶였던 건축의 영역이 도시와 사회로 확장되는 추세다. 올해 프리츠커 상을 수상한 일본 건축가 이소자키 아라타(87)에 대해 프리츠커 상 심사위원단은 “이소자키의 건축에서는 환경과 사회적 요구에 대한 섬세한 배려가 돋보인다”고 평가했다. 도시 빈민들을 위한 집합주택으로 명성을 얻은 인도 건축가 발크리슈나 도시(2018 수상) 역시 공공성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심사위원단은 발크리슈나 도시의 수상 이유를 “사회와 인간에 기여하겠다는 책임감, 사회·경제·환경을 고려한 지속가능한 건축”을 꼽았다.

정부 ‘건축계의 노벨상’ 수상 프로젝트

반면 NPP사업의 목표는 ‘해외 선진 설계기법’과 ‘우수한 건축가 양성’에 맞춰져 있다. 국토부 관계자는 “건축가들이 국내에서만 있으면 시야가 좁아질 수 있다”며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는 걸 돕기 위해 마련한 정책”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건축업계의 입장은 다르다. 국토부의 발상이 시대착오적이라고 본다. 요컨대 엘리트 ‘선수’를 육성해 올림픽 금메달을 따오도록 하는 1980년대 엘리트 체육인 육성계획과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건축가 장지훈씨는 “프리츠커 상을 목표로 건축가를 양성한다는 것도 어이없지만 해외연수를 갔다오면 프리츠커 상을 받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논리도 형편없다”며 “국내 건축가가 프리츠커 상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해외 경험이 부족해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사업 취지에 대한 논란과 별개로 NPP사업은 연수자 선정과정에서부터 잡음이 나온다. NPP사업 혜택을 받으려면 모집기간(7월 29일~8월 2일) 내 해외 유수의 건축설계사무소와 연구기관으로부터 연수자로 선정돼야 한다. 2개월 안에 지원자가 직접 해외 설계사무소로부터 연수 허가를 받아야 하는 구조다. 해외 유학생들은 현지에서 여러 업체에 접촉할 기회가 있지만 국내파는 현실적으로 해외 업체에 접근하기가 어렵다.

가뜩이나 NPP사업이 아니더라도 유명 해외 설계사무소에는 무보수로 일하겠다는 지원자들이 몰린다. 이미 ‘공짜 인력’이 넘치는 상황에서 연수자들에게 설계기법 전수와 같은 ‘특별대우’를 해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NPP사업 관계자는 “유능한 건축가가 어렵게 심사를 통과해 연수를 간다고 해도 결국 바쁠 때 잠깐 쓰였다가 버려질 것”이라며 “이미 내부에서도 이번 사업이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제기됐다”고 말했다.

인도 건축가 발크리슈나 도시(2018 프리츠커 수상)가 설계한 생명보험조합 공동주택. (인도 아마다바드) / 프리츠커위원회 홈페이지 www.pritzkerprize.com

최저가 입찰·로비 공모전 등 먼저 개선을

국내 건축가들이 NPP사업을 놓고 반발하는 가장 큰 이유는 대한민국 건축업계가 처한 현실에 있다. 프리츠커 상은 공공건축의 테두리 안에서 탄생한다. 상당수 프리츠커 수상자들은 공공건축을 통해 사회적 소임을 다했고 명성을 쌓았다. 하지만 국내 공공건축 환경은 건축가들이 역량을 키우기에 턱없이 열악하다.

당장 공공건축 설계발주부터 건축가들의 발목을 잡는다. 이제껏 공공건축 설계용역은 가장 저렴한 설계비를 제시한 업체의 몫이었다. 실제로 전체 공공건축물의 80.9%(건축도시공간연구소 2007~2012년 기준)는 가격입찰 방식으로 진행된 것으로 집계됐다. 그동안 공공건축물은 최저가 설계비를 들여 지어온 셈이다. 이후 제정된 건축서비스산업진흥법에서 설계비 2억원(공사비 50억원) 이상의 공공건축물 설계용역은 설계 공모를 하도록 했지만 대다수 소규모 건축물들은 여전히 싸구려 설계비로 짓고 있다.

설계 공모 방식도 대안으로는 부족하다. 당장 공모 방식은 공정성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공모과정에서 발생한 비리는 공공건축 시장을 어지럽혀 왔다. 이 때문에 지난 4월 국토부가 비리에 적발된 심사위원은 자격을 영구 박탈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공공건축 디자인 개선방안’을 내놨지만 그동안 업계에 뿌리내린 불신을 해소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건축가 전보림씨는 “공정하게 보이려는 온갖 시늉이 난무하지만 우리나라 공공건축 공모전이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건축가는 없다”며 “여전히 공모는 로비에 좌지우지되는 판”이라고 말했다.

공모를 통해 설계 기회를 얻는다 해도 또 다른 난관에 부딪힌다. 설계기간이다. 2000㎡ 규모의 공공건축물에 부여된 설계기간은 평균 3개월 정도다. 3만3000㎡ 규모가 넘는 건물에는 6개월 정도의 설계기간이 주어진다. 대관·심의 업무를 하면서 계획·중간·실시 설계를 거쳐 도면을 그려내기엔 턱없이 부족한 기간이다. 현창용 공주대 건축학부 교수는 “1년에 4000개 넘는 공공건축물을 짓고 있으면서도 건축가들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은 마련되지 않았다”며 “공공건축만 해도 당장 손봐야 할 제도가 산더미인데 정부가 엉뚱한 프리츠커 타령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토부는 NPP사업 명칭을 바꾸는 한편 향후 제도 보완작업에 나서겠다는 방침이다.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위원인 박인석 명지대 교수는 “우수 인재 양성을 위해 준비한 사업이고 예산인데 어떤 방식으로 집행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다”며 “이번 사업은 국건위와 무관하게 진행됐지만 다음 사업에는 국건위가 참여해 사업을 재설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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