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님 PPT와 학생식당 메뉴판의 공통점, 정말 부끄럽네요
[오마이뉴스 글:박동주, 편집:김혜리]
우리 사회는 장애인을 배려하고 도와주어야 한다면서도 실제 그들이 일상에서 겪는 어려움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한다. 언론도 대개 비장애인의 시선으로 장애인을 바라보는 일회성 보도를 내보내는 데 그친다. 시각장애인 대학생이 겪는 캠퍼스의 하루를 동행 취재했다. - 기자 말
지난 5월 21일 오전 10시 A대학교 한 강의실, 수업이 시작되자 담당 교수가 갑자기 쪽지 시험을 치겠다고 했다. 여기 저기서 원망 섞인 학생들의 탄식이 흘러 나왔다. 교수는 웅성대는 학생들을 진정시키며 "나눠주는 텍스트를 읽고 간단히 답만 써내면 된다"고 했다. 잠시 뒤 학생들은 교수가 준 시험지를 읽고 답을 쓰기 시작했다.
"교수님!"
그때 강의실 뒤쪽에서 한 여학생이 교수를 불렀다. 강의실 맨 뒤편 출입문 옆에 앉은 서연주(가명·20)씨였다.
"어머, 어머, 미안, 내가 깜박했다."
교수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연주씨의 옆에 앉아 있던 기자에게 "시험 치르는 걸 좀 도와주세요"라고 부탁을 해왔다. 연주씨는 자기 앞에 놓인 텍스트를 읽지 못한다. 그는 시각장애인이다.
▲ 점자정보단말기. 시각장애인이 음성과 점자를 기반으로, 학습이나 여가 생활에 사용할 수 있는 시각장애인용 휴대용 컴퓨터다. 점자 키보드와 기능키를 이용해 문서작업, 이메일, 녹음, 라디오, SNS 등의 응용 프로그램을 사용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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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지시험 하나 보기도 힘들어요"
연주씨의 시험을 치르기 위한 낭독이 시작됐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은 꿈같이 찾아왔다. 그러나 이날도 해방된 줄 모르고 지낸 한국인이 아주 많았다. 15일 오전 서울 시내 여러 곳에..."
"죄송한데 조금만 빨리 읽어 주시겠어요?"
최대한 발음에 신경을 써 또박또박 읽었는데 연주씨가 더 빨리 읽어 달라고 재촉한다.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고 다시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낭독을 마치자 연주씨가 "시험문제가 뭐였냐"고 물었다. 문제를 다시 읽어주기가 무섭게 '연주씨가 어느 부분에 이런 내용이 있지 않았냐'며 그 부분을 다시 읽어달라고 한다. 말해준 내용을 텍스트에서 빨리 찾아 다시 읽었다.
"'라디오를 가진 한국인도 많지 않았다'고 답 좀 써 주세요."
연주씨는 텍스트를 읽은 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내용을 숨도 쉬지 않고 말했다.
"웬만하면 한 번 듣고 다 기억해야 돼요. 한 번 지나가면 다시 들을 수 없으니까요. 집중 안 하면 수업 끝나고 교수님께 매번 찾아가야 해요. 저도 힘들지만, 교수님도 피곤해 하시는 게 느껴져요."
▲ 다른 사람과 부딪히지 않으려고 인도 가장자리 연석을 따라 걸어 가는 연주 씨. 인도로 바짝 붙어 빠르게 달리는 대형 버스나 트럭이 지나갈 때마다 그의 몸이 휘청거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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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수업을 마치고 우리는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으로 가는 길이 위태로워 보였다. 중간중간 점자블록이 끊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연주씨는 인도 가장자리로 가서 시각장애인용 흰 지팡이(케인·Cane)로 보도와 차도를 구분하는 연석을 훑어 길을 찾았다. 연석 가까이 걷다 보면 중간중간 세워져 있는 전봇대에 부딪힐 때도 있었다.
"케인으로 타법을 더 촘촘히 하면서 앞을 살펴야 하는데 그것도 계속하면 피곤해서 가끔 이렇게 부딪혀요."
전봇대는 그래도 나은 편이다. 차도와 보도 경계에 있는 연석을 따라 걷다 보면 빠르게 지나가는 차량들 때문에 휘청거리기 일쑤였다.
▲ 캠퍼스 안에 있는 버스정류장에는 정류장임을 알려주는 점형 블록이 없고 선형블록으로만 돼 있어 지나치기 쉽다. 버스 운행정보 안내용 음성단말기도 없어 소리로만 버스인지, 그냥 지나가는 승용차인지 판단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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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에 도착했다고 끝난 게 아니다. 처음 가는 장소에 아는 사람이 제때 나오지 않으면 그곳은 이들에게 '어둠' 그 자체다. 어디에 방지턱이 있는지, 볼라드(보행자용 도로나 잔디에 자동차 진입을 막기 위해 설치되는 장애물)가 있는지 몰라 혼자 움직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화요일 점심만 '학식' 먹는 날
▲ 연주(왼쪽) 씨가 점심을 같이 먹기 위해 모인 친구들과 함께 아직 오지 않은 친구를 기다리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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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안으로 들어갔는데 이들의 식사를 늘 도와주던 직원이 안 보였다. 시각장애 학생들은 식당 사무실에서 일하는 그 직원에게 먹고 싶은 메뉴와 결제를 부탁해왔다고 했다. 그런데 이날따라 5분, 10분, 15분을 기다려도 그 직원이 나타나지 않았다.
"화요일만 점심 먹는 날이에요. 사람 많은 식당에 오기 귀찮기도 하고 맨날 직원분이 날라주는 것도 죄송해서…"
▲ 학생식당에는 메뉴판에 다양한 메뉴가 적혀 있지만 시각장애인들은 점자 메뉴판이 없어 누군가 메뉴를 불러 주기 전에는 어떤 메뉴가 있는지 알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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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은 냄비 김치찌개, 김치 돈가스나베, 치즈 김치 돈가스나베가 있고 면 종류는 제육매콤 볶음우동, 곱빼기가 있어요."
"라면 종류는 없나요?"
"라면은 해장라면이 있어요."
"전 해장라면으로 주세요."
▲ 식권을 뽑는 키오스크(무인정보단말기)에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나 버튼이 없다. 음성 지원도 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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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 기사 ''혼자 잘 다닐 수 있잖아?'... 시각장애인 방치하는 대학들'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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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이 만드는 비영리 대안매체 '단비뉴스'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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