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끝뉴스] 가까워서 멀어지는 나라, 일본

권경성 입력 2019. 6. 17.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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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한류 건재하지만 매체 통해 증폭되는 反韓정서도 엄연

저출산 고령화ㆍ미중 패권 각축 등 한일 협력 대응 긴요

5일 일본 도쿄 한인 타운 신오쿠보 내 치즈 핫도그 가게인 '아리랑 핫도그' 앞이 손님들로 붐비고 있다. 도쿄=권경성 기자

5~8일 일본 도쿄(東京)에 다녀왔다. 한국언론진흥재단과 한일미래포럼, 게이오대 현대 한국연구센터 공동 주최로 7일 게이오대에서 열린 제7회 한일 언론인 심포지엄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어차피 교류가 목적이었던 만큼 주최 측은 한국 기자 9명을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일본 정부ㆍ언론 관계자들과의 만남을 주선했다. 이달 말 오사카(大阪)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때 문재인 대통령이 의장국 정상인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를 못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양국 관계가 냉랭한 터여서 혼네(本音ㆍ본심)가 어땠는지 알 수 없지만 이웃나라 손님들을 일본인들은 차분하게 환대했다.

도쿄 도착 직후인 5일 오후 찾은 곳은 한인 타운인 신오쿠보(新大久保)였다. 사실 이 지역은 뜨겁지 않을 도리가 없다. 어디에나 이국풍에 매혹된 이들이 있게 마련이고, K팝 열기는 세계적이다. 한국 연예인 캐릭터 상품을 파는 점포가 심심찮게 보였다. 거리에 즐비한 ‘연탄 불고기’나 ‘구들장 삼겹살’, ‘돈짱 포차’, ‘수미네 밥집’ 같은 한국어 간판들 중 특히 ‘아리랑 핫도그’ 앞이 붐볐는데, 분명 K팝 팬들일 교복 차림 학생들이 다수였다. 치즈 핫도그와 치즈 닭갈비는 요즘 그들이 가장 즐겨 찾는 한국 음식이라고 한다.

1990년대까지 지역 내 한국인으로 한정됐던 신오쿠보 상권의 범위가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계기로 도쿄 전체로 확장된 뒤 부침이 있었다. 2004년 드라마 ‘겨울연가’로 1차 한류 열풍이 불면서 전국 일본인이 신오쿠보로 몰려왔고 2010년대 ‘소녀시대’와 ‘카라’ 등이 중심이 된 2차 한류가 열기를 지속시켰다. 하지만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 이후 형성된 반한(反韓) 기류로 분위기가 식더니 2015년부터 문 닫는 점포가 속출했다. 그러다 2년 전부터 ‘엑소’, ‘방탄소년단’(BTS) 등이 K팝 인기를 재차 견인하면서 다시 거리가 북적이기 시작했다는 전언이다.

‘신(新)한류’는 제법 견고해 보인다. 현재 핵심 소비층인 10, 20대가 첫 한류 당시 주류를 이뤘던 30~50대 여성보다 정치의 영향을 덜 받기 때문이다. 신오쿠보에서 한국어학원을 운영하는 이승민 원장은 “치즈 핫도그 하나 사먹고 가기도 하는 젊은 사람들이 주요 소비층이 되면서 객단가(고객 인당 평균 구매액)가 4,000엔(약 4만4,000원)에서 반으로 줄었지만, 고객 수 자체가 두 배 넘게 늘었고 앞선 세대와 달리 한일 관계가 아무리 나빠도 발걸음을 끊지 않기 때문에 전반적 상황은 더 좋아진 셈”이라고 말했다.

물론 신오쿠보의 호황에만 의존해 한일 관계가 의외로 무사하다고 판단하는 건 성급하다. 다만 부정적 현상을 매체가 과대 반영해 현실을 왜곡하는 경향이 있다는 건 언론 연구자ㆍ종사자의 공통된 지적과 반성이다. 7일 심포지엄에서 오이시 유타카 게이오대 교수는 여론조사를 통한 제도권 언론의 체계적인 프레이밍(틀 짓기) 현상을 소개했다. 그는 “한일 관계 경색의 요인으로 작용하는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일본 언론들은 결과가 예상되는 설문조사를 실시, 한국에 비판적인 의견을 재확인한다”고 분석했다. 같은 자리에서 이케하타 슈헤이 NHK 앵커는 선별적 접촉이 가능하도록 만들어 편견과 동질성 강화를 유도하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특성을 짚었다. “젊은 세대 사이에서 SNS를 통해 읽고 싶은 정보만 걸러 접하는 ‘필터 버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고 그는 우려했다. 심지어 신구 매체 간에는 상승 효과가 나타난다. 오이시 교수는 “SNS 등 뉴 미디어와 신문ㆍ텔레비전 같은 올드 미디어가 캐치볼 하듯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한국에 비판적인 사회 분위기를 일본 내에서 증폭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7일 일본 도쿄 게이오대에서 제7회 한일 언론인 심포지엄이 열리고 있다. 한국언론진흥재단 제공

그러나 반한이 매체 탓만일 수는 없다. 개연성 없는 가상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한국에 대한 일본인의 전반적 정서는 서운함인 듯했다. 덩치가 커지고 먹고 살 만해지니까 전후(戰後) 복구를 도운 일본에 느끼던 고마움을 잊어버리고, 덮고 넘어가기로 국가끼리 약속했던 과거사를 새삼 끄집어내 추궁한다는 배신감 같은 거였다. 엄연한 일제 강점 피해자인 우리로서는 터무니없는 적반하장이겠지만 말이다. 더욱이 역내 경쟁자인 중국에게 보이는 한국의 저자세도 일본인에게는 불쾌하다. 오쿠조노 히데키 시즈오카현립대 교수는 심포지엄에서 “일본은 중국을 동북아시아 안보 환경을 악화시키는 위험 요소로 보는 반면 한국에게 중국은 한반도 정세를 안정시키기 위해 필요한 존재”라고 설명했다. 조양현 국립외교원 교수도 “중국이 일본에게는 위협이지만 한국에게는 기회”라고 했다.

한일 과거사 분쟁은 시비(是非)가 아니라 호오(好 )의 문제로 변질되고 있었다. 한 일본 언론인은 일본 기업에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 피해를 배상할 것을 명령한 지난해 10월 한국 대법원의 판결에 대한 문 대통령의 대응과 관련해 “문 대통령이 판결을 존중한다는 언급과 더불어 일본 기업의 정당한 투자는 보장하겠다고 한마디만 했어도 사태가 이렇게 악화하지 않았을지 모른다”고 했다. 문 대통령이 일본을 홀대하고 있다는 인식은 재일(在日) 한국인에게서도 드러났다. 신오쿠보의 한 상인은 “박근혜ㆍ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한국 대통령이 한 번도 교민과 간담회를 한 일이 없을 정도로 우리에게 무관심했다”고 토로했다.

8일 귀국길 비행기에서 본 당일 아사히(朝日)신문의 1면 톱기사는 지난해 일본 연간 자연 감소 인구가 최고치를 기록했고 처음 40만명을 넘었다는 내용이었다. 도쿄 여성 2명 중 1명은 50대 이상이라고 한다. 어쩌면 일본은 한국의 미래인지 모른다. 저출산 고령화 현상은 두 나라가 함께 맞닥뜨리고 있는 공통 과제다. 양국은 격화하는 미중 패권 각축이 행여 우격다짐으로 흐를까 봐 노심초사하는 동병상련 처지다. 하지만 지금 양국은 너무 가까이 붙어 사는 바람에 일어난 일과 생겨난 감정이 빌미가 돼 서로 밀어내는 형국이다.

이명찬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이제 비로소 그간 잠재해 있던 양국의 혼네가 떠올라 부딪치고 있다”며 “지금 해결한다면 앞으로 한일 관계가 더 이상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낙관했다. 냉정을 되찾아야 한다. 상생하려면 방법은 경쟁이 아니라 공조다. 대중영합주의(포퓰리즘) 정치가 기층 문화 교류나 경제 협력의 발목을 잡는 일을 양국 시민이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지원으로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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