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가 작곡자 안익태, 나치당원 아니고 부역행위 없었다"

이재훈 2019. 6. 19. 13:54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김형석 안익태기념재단 연구위원장 반박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1906~1965)를 둘러싼 논쟁이 가열되고 있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인 올해 나온 이해영 한신대 교수의 책 '안익태 케이스'가 방아쇠를 당겼다. 이 교수는 이 책에서 안익태가 친일 부역자일뿐 아니라 친나치 인사였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와 관련, 김형석 안익태기념재단 연구위원장이 22일 오후 3시 가평뮤직빌리지 음악역 1939뮤직센터의 1939뮤직홀에서 열리는 '제2회 음악역 1939 포럼 음담패설'에서 이 교수의 주장을 반박한다.

이 교수는 '안익태 케이스'에서 2차 대전 중 프랑스가 안익태를 기피인물로 선언했고, 미국은 안익태를 입국금지했다고 명시했다. 또 '불-일 베토벤 갈라 콘서트'를 소개하면서 전후 안익태는 프랑스에서 한 번도 공연 초청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허황된 거짓말"이라고 주장했다.

이 교수가 독일의 한국학자 프랑크 호프만이 발굴한 자료를 인용한 것과 관련, "오류투성이의 호프만 자료를 제외하면 프랑스가 안익태를 기피인물로 선언했다는 어떤 기록도 찾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더군다나 안익태는 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에 초청받아 출연한 적이 있는데, 1961년 2월2일 파리 샹젤리제극장에서 프랑스 최고 악단인 파리음악원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고 전했다.

또 "'안익태 케이스'에서 미국이 안익태에게 입국금지를 내렸다는 주장과 안익태가 한국에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스페인으로 도주했다는 주장 또한 거짓말"이라고 못 박았다. 1946년 1월3일 미국 국방성의 번즈가 바르셀로나 미국 영사관으로 보낸 문서를 증거로 제시했다.

1943년 7월 안익태가 제국음악원의 회원으로 선정된 것을 놓고도 이 교수와 김 위원장은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이 교수는 '안익태 케이스'에서 '에키타이 안', 즉 안익태는 나치 독일에서 유일한 조선 출신 제국음악원 회원이었다며 "게슈타포(나치스 정치경찰)의 관인이 찍힌 제국음악원 회원증을 그저 에키타이 안의 음악적 능력에 대한 인정의 증좌라고 보기엔 석연치 않다"고 의심했다."한때 '애국가'를 작곡할 정도로 애국자였던 안익태는 이제 '게슈타포의 신원 검증'을 통과한 동경 출신 일본인 에키타이 안으로 완벽하게 변신해 있었다"고도 했다.

이후 안익태가 나치정권의 고위직을 부여받은 것처럼 언론에 보도됐다.

안익태, 1960년 3월4일 교토에서 '한국환상곡' 지휘 ⓒ안익태기념재단

하지만 김 위원장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회원증의 실상은 독일에서 지휘자·작곡가로서 취업할 수 있는 공식적인 취업 허가증을 받은 정도의 의미"라는 것이다.

회원증의 내용도 공개했다. '제국음악원은 전국적으로 약 17만명의 회원이 가입됐고, '비 아리아계'로 분류된 회원도 1024명이나 됐다'는 내용이다. "더구나 안익태는 이 단체의 간부도 아니고 외국인 회원이었을 뿐이다. 그런 그를 친 나치주의자로 낙인찍는 것은 무지의 소치이거나 아니면 의도적인 모함이다."

이 교수는 언론 인터뷰에서 "안익태는 히틀러 생일 경축음악회를 지휘했으며, 지금껏 확인된 나치부역 만으로도 종전 후 프랑스에서였다면 사형감"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서도 김 위원장은 "허위사실 유포"라고 했다.

김 위원장은 "안익태는 '히틀러 생일경축음악회'를 지휘한 적이 없을뿐더러 나치 점령하의 프랑스에서 나치에 부역한 예술가 중에서도 집단학살 등의 명백한 범죄행위에 가담하지 않는 한 처형된 사례는 없다"고 설명했다. "하물며 나치 당원도 아니고, 전쟁 범죄도 없고, 구체적인 부역행위조차 없는 이방인 안익태에게 이런 억지 주장을 뒤집어씌우는 것은 분명 다른 의도가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1906년 평양에서 태어나 안익태는 1918년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 첼로 수업을 받았다. 1919년 3·1운동에 가담한 수감자 구출운동에 참여했다가 학교에서 제적당했다.

선교사 출신의 숭실학교 마우리 교장의 도움으로 일본에 음악 특기자로 유학, 이후 미국에서 음악 공부를 계속했다. 신시내티음악학교에서 유학했고 신시내티교향악단에 첼로 주자로 입단하기도 했다. 1938년께 유럽에 진출한, 한국에서 보기 드문 음악가였다.

1936년 '한국환상곡'을 작곡했는데, 애국가는 이 곡의 4악장이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사실상의 국가가 됐다. 안익태는 문화훈장 대통령장을 받고 국립묘지에 묻혔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여러 자료를 통해 일제에 부역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됐다. 이후 그를 둘러싼 논쟁이 지속되고 있이다.

이 교수는 애국가를 만든 작곡가는 최소한 애국적이어야 한다며 애국가에 대해 제고해야 할 때가 왔다고 본다. 애국가가 법으로 정한 국가는 아니라는 점을 짚으며 '국가제정위원회'를 구성해 공모형 국가를 만들자는 제안을 하고 있다.

여론조사업체 리얼미터는 올해 초 CBS 의뢰로 전국 19세 이상 성인 502명에게 애국가 교체에 대한 국민여론을 조사했다. 반대가 58.8%(매우 반대 28.7%·반대하는 편 30.1%)로 집계됐다.

한편 이날 포럼에는 이 교수도 참석해 김 위원장과 함께 '애국가, 대한민국 국가(國歌)로서 정당한가?'를 논한다.

realpaper7@newsis.com

Copyright © 뉴시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