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간 방치된 송현동 부지, 숲으로 다시 태어나나 [밀착취재]

권구성 2019. 6. 23.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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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낮 서울 종로구 안국동 사거리. 여느 때와 다름없이 관광객들로 붐비는 이곳에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 높은 담장이 눈에 띈다. 4m 높이의 담장은 동십자각이 있는 경복궁 사거리까지 이어져 있다. 담장 안에 가려진 일대의 부지는 조선 말까지 고관대작의 집터가 모여 있던 자리다. 하지만 지난 17여년간 나대지로 방치되어 온 탓에 잡초만이 무성하다. 주변을 지나던 직장인 정모(34)씨는 “오래 전부터 담장에 둘러싸여 보안시설인가 싶었다”며 “관광객이 많이 오가는 곳인데 너무 흉물스러운 것 같다”고 말했다. 
 
최근 한진그룹이 매물로 내놓은 서울 종로구 송현동 부지의 활용 방안을 두고 활발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부지 활용에 가장 적극적인 것은 서울시와 종로구다. 이들은 송현동 부지에 박물관 건립과 숲 조성 등을 내세우고 있는데, 구체적인 방안과 5000억원 정도로 추정되는 매입 대금 등의 문제로 실제 부지가 어떻게 활용될지는 불투명하다.
 
◆조선시대 고관대작 터였다가 광복 후 미 대사관 숙소
 
송현동 부지는 서울 종로구 송현동 49-1번지에 위치한 3만6642㎡ 규모의 나대지다. 이곳은 송현(松峴)이라는 이름처럼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소나무가 많았던 곳이다. 오늘날에는 서울의 대표 관광명소인 경복궁과 인사동, 창덕궁을 잇는 ‘율곡로 관광벨트’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 경복궁과 인접한 이곳은 조선시대 고관대작들의 집터로 위세를 떨쳤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의 사택 부지로, 광복 후에는 미국대사관 직원들의 숙소로 쓰였다.
 
이 부지의 소유권이 민간으로 넘어온 것은 2002년부터다. 당시 삼성생명이 국방부로부터 1400억원에 부지를 매입했다. 그로부터 6년 뒤에는 한진그룹이 2배가량 높은 2900억원에 토지를 사들였다. 
 
최근 송현동 부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것은 한진그룹이 부지를 매물로 내놓으면서다. 당초 한진그룹은 이곳에 7성급 관광호텔 건립을 구상했다. 이곳에 호텔을 짓는 것은 얼마 전 타계한 조양호 전 한진그룹 회장의 숙원이었다. 하지만 학교 인근에 호텔을 지을 수 없도록 한 학교보건법에 부딪혀 계획이 무산됐다. 한진그룹은 호텔 건립을 위해 행정소송까지 제기했지만 패소했다. 이후에는 호텔을 포함한 복합문화센터 건립을 추진했지만, 최순실이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며 무산됐다. 최근에는 한진그룹 내부 사정으로 이 부지를 매물로 내놨다. 
20일 서울 종로구 송현동 49-1번지의 부지가 담장에 둘러싸인 채 방치돼 있다.
◆종로구 “숲 조성해야”, 서울시 “민속박물관 이전”
 
송현동 부지가 매물로 나오자 가장 적극적인 것은 종로구다. 종로구는 한진그룹이 송현동 부지를 매물로 내놓기 전부터 관심을 보였다. 2010년에는 종로구가 한진그룹에 송현동 부지와 구청 부지를 맞바꾸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한진그룹은 구청 자리에 호텔을 짓고, 종로구는 송현동에 구청과 숲을 조성하겠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한진그룹 측의 거부로 무산됐다.  
 
종로구는 지난 11일 토론회를 갖고 송현동 부지에 소나무 숲을 조성하자는 구상을 발표했다. 이 자리에서 김영종 구청장은 “송현동 부지는 광화문광장, 인사동, 북촌, 서촌, 청와대, 경복궁과 인접한 아주 중요한 곳이고 관광객과 시민의 이동이 많은 중심지”라며 “몇몇만 사용할 VVIP 호텔보다는 누구나 올 수 있는 숲을 만들어서 ‘서울의 허파’로 조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시도 송현동 부지에 대한 구상을 언급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지난 12일 서울시의회 시정질문에서 “서울시장으로 이렇게 중요한 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며 “서울시가 (송현동 부지) 옆에 풍문여고를 매입해서 공예박물관을 만들고 있다. 국립민속박물관이 세종으로 가는 것보다는 (송현동 부지로) 옮겨오는 게 좋겠다”고 제안했다. 현재 경복궁 내에 위치한 국립 민속박물관은 경복궁 복원 계획에 따라 이전을 준비하고 있다. 
 
다만 서울시와 종로구 모두 부지 매입에 필요한 재원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방안을 내놓지 않았다. 현재 송현동 부지의 매입가는 5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종로구의 한해 예산이 4000억원 규모인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구 예산으로는 구입이 불가능하다. 이에 종로구는 정부와 서울시가 지원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박 시장도 송현동 부지 매입에 대해 “이곳은 시가로 5000억원 정도 될 것이라 판단되는데 중앙정부가 매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송현동 부지가 갖는 역사성·공공성 고려해야
 
전문가들은 송현동 부지의 역사성과 공공성을 고려해 활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토론회에 참석했던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승효상 위원장은 “송현동 부지는 한양도성에 남아 있는 빈 땅 중에 가장 중요한 땅으로 볼 수 있다”며 “이 땅이 가져야 할 가치는 서울의 공공적 가치에 부합해야 한다”고 말했다.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홍순민 교수는 “송현동 부지가 갖는 위치, 위상, 의미 등 본연의 가치를 지키면서 활용하는 방향으로 가야한다”며 “종로구만의 사업이 아닌 서울시 전체 또는 대한민국 전체를 바라보면서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활용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송현동 부지를 숲으로 조성하겠다는 구상에 대해 종로구 관계자는 “종로구에 산이나 궁은 많지만 시민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숲은 많지 않다”며 “최근의 미세먼지 문제를 예방하는 등의 차원에서 시민들을 위한 숲을 조성하자는 것을 큰 틀에서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글·사진=권구성 기자 k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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