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연구기자재 외상장부에 과학기술계 발칵

원호섭 입력 2019.06.24. 17:18 수정 2019.06.24. 17:4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o i

번역할 언어 선택
글자 크기 조절 레이어
경찰, 연구자 200명 적힌
기자재업체 외상장부 발견
정부 '외상'거래 원천금지
과기계 "터질게 터져" 반응
3~6개월 몰아서 결제 관행
외상 불법화 범법자만 양산
정부 연구비를 받는 국내 대학과 정부출연연구원 소속 연구자 200여 명의 외상 내역을 기록한 '외상장부'가 경찰 손에 넘어가면서 과학기술계가 발칵 뒤집혔다. 외상으로 과학 기자재를 구입한 게 무슨 대수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현행 연구개발(R&D) 제도상 연구 기자재를 외상으로 구매하는 것은 불법이다. 과거에도 몇몇 교수나 출연연 연구원들이 정부 연구비를 이용해 외상으로 기자재를 사용한 내역이 드러나면서 법적 제재를 받은 적이 있다. 하지만 연구자 약 200명 명단이 포함된 외상장부가 발견된 것은 처음인 만큼 이번 사건이 학계에 미치는 파장이 클 것으로 보인다.

24일 과학기술계에 따르면 최근 충남천안서북경찰서가 연구 기자재 판매 업체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국내 연구자 200여 명의 이름이 적힌 외상장부를 찾았다.

외상장부에 따르면 연구 기자재를 구입한 뒤 3~6개월 후에 정산했고, 일부는 돈을 먼저 업체에 건네놓고 기자재가 필요할 때마다 갖다 썼다. 연구자 1인당 적게는 수십만~수백만 원에서 많게는 수천만 원까지 외상으로 기자재를 산 것으로 알려지면서 장부상에 기록된 외상 규모가 수억 원에서 많게는 수십억 원에 달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수도권 소재 대학의 한 교수는 "외상장부 때문에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대학교수들이 경찰 조사를 받았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고 있다"고 과기계 분위기를 전했다.

정부는 거래가 오가는 과정에서 실제로 구매하지 않은 기자재를 샀다고 허위신고를 하고 연구비를 착복할 우려를 방지하기 위해 외상거래를 원천 금지하고 있다. 정부 R&D 자금을 받은 연구자가 외상으로 연구비를 사용하는 게 불법인 만큼, 외상장부에 이름을 올린 연구자는 해당 연구비를 정부에 반납해야 한다.

특히 외상거래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연구비를 착복한 사실까지 밝혀진다면 정부 연구비 신청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법적 책임까지 져야 한다. 이번 정부가 들어선 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연구자들을 위해 불필요한 행정 처리를 완화하는 등 R&D 제도 등을 꾸준히 손보고 있지만 이번 사태로 규제가 강화될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외상장부가 발견됐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과기계는 "터질 게 터졌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불법인 줄 알면서도 연구 기자재를 구매할 때마다 결제하고 영수증을 첨부해 보고해야 하는 불편함 때문에 연구자 중 상당수가 외상으로 실험 기자재를 구입한 뒤 나중에 한꺼번에 정산하는 것을 관행처럼 행해왔기 때문이다. 외상구매를 불법화한 것 자체가 실효성이 없는 규제로 범법자를 양산할 수밖에 없다는 게 과기계 하소연이다.

정부 R&D 사업에 선정되면 연구비가 대학의 경우 산학협력단으로, 출연연은 연구지원팀 등을 통해 연구자에게 전달된다. 연구자는 계획서에 따라 이 돈을 인건비와 실험 기자재 구매에 사용한다. 실험 과정에서 필요한 기자재가 생기면 연구책임자의 결제하에 업체에 구매를 요청하고, 구매한 뒤에는 영수증을 정부에 제출해야 한다. 이 같은 행정절차가 복잡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만큼 상당수 연구실에서는 외상으로 기자재를 구매하고 영수증을 모아 3~6개월마다 한 번에 결제를 처리하고 있다. 국내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한 연구자는 "실험할 때 1만~3만원짜리 장갑이나 값싼 기자재가 필요한 경우가 많은데 실험 기자재를 살 때마다 연구책임자의 결제를 받으려면 행정 업무 부담이 가중될 수밖에 없다"며 "어쩔 수 없이 외상한 뒤 나중에 한꺼번에 결제하는 경우가 많다"고 밝혔다.

또 현재 제도하에서는 연구자들이 연구비를 융통성 있게 활용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예를 들어 연간 3000만원씩 총 3년간 정부 지원을 받는 연구자가 4000만원짜리 연구 장비를 구매하려면 정부의 까다로운 승인 절차를 거쳐야 한다. 연간 3000만원에 한해서만 연구비 지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도 연구자들은 어쩔 수 없이 부족 자금만큼 외상으로 실험장비를 구입한 뒤 연구비가 들어오면 영수증 처리를 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과기계는 현실적으로 외상거래를 허용해줘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또 과기계는 "연구 현장에서 현실적으로 외상장부를 활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비일비재한데 이번 외상장부 발견 여파로 연구자들을 옥죄는 또 다른 규제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원호섭 기자]

이 시각 추천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