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고했다는 말 한 마디만 듣고 싶어요"..팔순 노인이 된 소년소녀병들의 마지막 '꿈'

이종호 기자 입력 2019. 6. 25. 09:43 수정 2019. 6. 25.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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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후 60여년 동안 '잊혀진 전사'였던 소년소녀병
학도병과 달리 학업 끊겨 더욱 힘든 삶 보내
참전 수당 외 국가유공자 예우 없어.. 전우회도 접기로
"'수고했다'는 말과 명예 회복이 유일한 소원"
윤한수 6.25참전 소년소녀병 전우회장(뒷줄 오른쪽)이1951년 12월 25일 고랑포 1·4후퇴 후 전우들과 함께 찍은 사진./사진=윤한수 회장
[서울경제] 북한군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수세에 몰렸던 한국전쟁 초기, 최후 방어선이었던 낙동강 전선에는 어린아이 티도 벗지 못한 소년소녀병이 있었습니다. 소년소녀병들은 전쟁이 무엇인지도, 이념이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나라와 가족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자신의 키보다 더 큰 총을 부여잡고 싸웠습니다.

약 70년이 지난 2019년 그들은 전쟁의 상흔보다 더 아픈 ‘외면’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이것만은 꼭 고쳐졌으면 좋겠다며 눈시울을 붉힙니다. 과연 백발이 성성한 팔순 노인들이 고쳐지는 것이 소원이라며 토로한 ‘외면’은 무엇일까요?

■나라 지키겠다는 숭고한 마음 60년이나 외면한 국가

소년소녀병은 한국전쟁 기간 병역 의무가 없는 18세 미만 청소년이 정규군에 배속돼 전투를 치른 이들을 가리킵니다. 전우회에 따르면 국방부가 공식적으로 집계한 소년·소녀병의 수는 총 2만9,604명입니다. 이중 전쟁 중에 전사가 확인된 사람은 2,573명입니다. 생존이 확인된 소년소녀병은 1,000~2,000명 정도가 남아 있을 것으로 전우회는 추정하고 있습니다.

앳된 나이에 전쟁터로 가면서도 소년소녀병들은 두려움보다는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더 컸다고 합니다.

윤한수 6.25참전 소년소녀병 전우회장은 “국가를 옹호하고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계속됐기 때문에 6.25전쟁에도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아주 단순한 생각에서 뛰어든 거예요. 그 당시에도 피하는 사람들 많았어요. 손가락을 자른다든가 해서···. 우리도 전쟁터에 가면 죽는다는생각도 했지만 그게 전체를 차지하지는 않았죠”라고 말했습니다.

이렇듯 열심히 전장을 누볐던 소년소녀병들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불과 10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해방 이후 국가는 소년소녀병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18세 미만의 청소년을 강제 징집했다는 사실이 국제법 위반으로 비칠 소지가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소년소녀병들은 자신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뭉쳤습니다. 지난 2004년 지금의 전우회를 결성하고 존재를 인정해달라며 국가를 상대로 싸웠습니다. 그리고 2010년 정부는 국민권익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소년소녀병의 실체를 인정했습니다.

■끊겨버린 학업, 소년소녀병들의 ‘전후 복구’는 더 어려웠다

소년소녀병이 입대한 나이는 15~17세입니다. 한창 학업을 지속할 나이죠. 하지만 전쟁 초기 입대해 휴전 후에도 일정 기간 복무한 후 전역한 소년소녀병들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을 놓쳐버렸습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펴낸 ‘6.25전쟁 소년병 연구’에 따르면 소년소녀병은 대부분 신설부대의 창설 요원이 되거나 만기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해 적게는 휴전 후인 1954년, 길게는 1956년까지 군에 남아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1954년 6월 1일 자로 만기 제대하고 보니 공부도 못하고 어린 나이에 시달리고 보니 몸에 병만 들고 사회적으로 낙오자가 되고 보니 소년병들은 누구나 다 같이 억울하게 됐네요.” (소년병 김인선의 ‘어찌하여 소년병이 되었는가’라는 제목의 수기)

이렇듯 소년소녀병이 오랜 기간 군에 남아 활동해야만 했던 이유는 학도병과 달리 정규군에 배속돼 현역 군인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규군의 예하 부대에서 독립적으로 활약했던 학도병들은 1951년 2월 28일 이승만 대통령의 학도의용군 해산명령과 같은 해 3월 16일 내려진 귀환 조치령(학생 복귀지시 담화)에 의해 다시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지만 소년소녀병은 상황이 달랐던 것이죠.

인터뷰 하고 있는 윤한수 회장./이종호기자
학업이 중간에서 끊긴 소년소녀병들의 삶은 고단했습니다. 제대 후 곧바로 생업 전선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더 나은 직업과 보수를 받을 수 없었던 것이죠. 그 영향은 그들의 2세들까지 미쳤습니다. 윤 회장은 “3년이 넘는 군 생활 후 복학이 어려워 생업 전선에 곧바로 뛰어들었어요. 운이 좋게도 대구시청 촉탁으로 선발돼 근무하게 됐죠. 하지만 학력이 다른 이들에 비해 뒤떨어져 승진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셨어요. 자연스럽게 가족까지 피해를 입었어요. 돈을 벌 능력이 부족하다 보니 생활과 자녀들의 교육에도 영향이 갈 수밖에 없죠”라고 당시 어려움을 토로했습니다.

■대부분 80세 이상 노인이 된 소년소녀병, 외쳐볼 힘도 점점 사라져

정부가 소년소녀병의 실체를 인정했지만 그들이 누구인지도 어떤 역할을 하고 전선에서 산화했는지 알고 있는 시민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여전히 ‘소년소녀병’이라는 이름 자체로 국가유공자 예우를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구의 한 택시기사에게 소년소녀병의 존재를 알고 있었는지 물었습니다. 그 기사는 “네? 소년소녀병이요? 그게 뭐예요? 학도병은 알겠는데···”라며 얼버무렸습니다. 전우회 중앙회가 대구에 있지만 알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한 것이 현실입니다.

전우회 사무실 한켠에 자리하고 있는 소년소녀병 전우회 깃발./이종호기자
현재 소년소녀병은 자원입대와 징집 등으로 전쟁에 참여했던 정규군과 똑같은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매달 지급되는 보상도 전쟁에 참여하기만 하면 주어지는 참전명예수당 30만원을 ‘위로금’ 형태로 받고 있습니다. 국가유공자로 대우받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소년소녀병들의 희생을 기리는 충혼탑이나 위령비는 전국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매년 6월 치르는 위령제도 대구 앞산공원 낙동강승전기념관을 빌려 열고 있죠. 하지만 생존해 있는 소년소녀병들은 먼저 세상을 떠난 동료들을 볼 낯이 점점 없어진다고 말합니다. 15년 전 처음으로 전우회를 결성하며 받고 싶었던 국가유공자 예우를 아직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타국에서 조국의 전쟁 소식을 듣고 참전했던 재일학도의용군에 대한 예우와 비교되는 대목입니다. 재일학도의용군은 한국전쟁에 참여한 일본 거주민과 유학생으로, 병역의무가 없었다는 점에서 소년소녀병과 같습니다. 정부는 68년 한국에 눌러앉은 재일학도의용군에게 정착수당 명목으로 1인당 50만원을 지급했으며, 일본에 돌아간 재일학도의용군 69명에게 매월 100~122만원을 차등지급하고 있습니다. 소년소녀병들이 예우의 기준으로 재일학도의용군을 제시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상황은 점점 나빠지고 있습니다. 소년소녀병들 대부분이 팔순을 넘긴 고령이다 보니 15년 동안 명맥을 이어왔던 전우회 활동마저 접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전우회는 위령제 때 지급되는 국가 지원금 외에는 모두 회원들에게 매년 5만원씩 걷어 운영해 왔습니다. 최근에는 이마저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회원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죠. 당시 참전했던 소년소녀병들 대부분 80세를 넘어선 고령이라 노환 등으로 참여할 수 있는 회원 수가 점점 줄어들면서 존폐의 위기에 처했다가 결국 올해를 끝으로 활동을 종료하기로 했습니다.

전우회 활동을 접으려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전우회 회원들이 원하는 것은 국가를 위해 젊음을 바쳤다는 것을 국가가 인정해주는 명예 회복입니다. 하지만 장기간 활동을 해오다 보니 전우회가 돈을 받기 위해 이렇게까지 싸움을 지속해 오고 있다는 시선이 우려돼 활동을 접기로 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윤 회장은 “잘못 보면 국가를 상대로 노인들이 돈을 구걸하는 걸로 비칠 수 있어요. 늙은이들이 돈을 받으면 어디다 쓸 건데···. 명예 회복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한 활동에 대해 국가가 인정해주고 국민이 인정해주고 하는 건데 늦게까지 활동을 이렇게 해오다 보니 그렇게 비치는 것 같아서 그게 싫어요”라고 말했습니다.

■18년째 국회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소년소녀병 예우 법안

소년소녀병들에게 국가 유공자 예우를 해주기 위한 노력은 꽤 오래전부터 이뤄졌습니다. 이미 18년 전인 2001년 16대 국회부터 소년소녀병을 국가 유공자로 인정하자는 법안은 계속 발의됐지만, 여전히 처리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번 20대 국회에서도 19대 때 발의된 법안이 전해졌지만 본회의에 상정되지도 못한 채 계류 중입니다. 20대 국회의 회기가 얼마 남지 않아 법안이 처리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태입니다. 법안의 처리는 소년소녀병들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동아줄과 같습니다. 장기간 활동을 해오면서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국가를 설득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죠.

소년소녀병이 바라는 것은 단순합니다. ‘고생했다’는 국가의 말 한마디와 희생을 국가유공자라는 예우로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윤 회장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 겪고, 이명박, 박근혜 정부까지 겪었지만 다 똑같아요. 국가를 위해서 활동했으니 당연한 말 한마디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으니깐 섭섭하죠”라며 아쉬움을 토로했습니다.

구순을 바라보는 노병들은 국가와 가족의 안녕만을 바라보고 싸웠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내려진 건 60년간의 차가운 외면이었죠.

이들의 눈물과 바람을 외면한 우리가 과연 국가의 의미를 묻는 누군가의 물음에 적절한 답을 줄 수 있을까요? /이종호기자 phillie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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