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누명 '수상한 사람'이 살던 그 집,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기억공간' 됐다

글·사진 박미라 기자 2019. 6. 25.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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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31년 고통’ 제주도 강광보씨, 재심 통해 2017년 무죄 확정
ㆍ빼앗긴 삶 기록 전시실 조성…“피해자들 사연 알리며 소통”

국가폭력 피해자를 위한 기억공간 ‘수상한 집’은 강광보씨의 옛 집 위에 새 집을 지은 ‘집 위의 집’ 구조다(위 사진). 강씨가 ‘수상한 집’에서 자신과 같이 간첩 누명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한 이들의 사연을 소개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 집에 간첩이 살고 있다고 수군댔다. 강광보씨(78)는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기까지 31년간 이웃과 사회가 기피하는 ‘수상한 사람’이었다. 간첩이라는 누명을 안고 감옥에 있을 동안 그의 부모님은 출소 후 아들이 누울 자리는 있어야 한다며 작지만 정성스레 집을 지어 아들을 기다렸다. 그 집이 조작간첩과 같이 국가폭력 피해자들을 위한 기억공간 ‘수상한 집’으로 거듭났다.

25일 제주시 도련3길 14-4 ‘수상한 집’에서 만난 강씨는 “1962년 친척들이 자리잡은 일본으로 밀항했다”고 했다. 제주에서는 4·3을 전후로 많은 이들이 죽음과 이념을 피해, 생계를 위해 일본으로 갔다. 강씨는 일본에서 가방, 플라스틱 공장 등에서 일하며 가정도 꾸렸다. 하지만 1979년 불법체류자로 적발돼 제주로 강제송환되면서 불행이 시작됐다. 제주 도착과 동시에 중앙정보부, 경찰에 끌려다니며 간첩 아니냐는 고문을 받다가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후에야 풀려났다.

친척들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소속이라는 이유가 컸다. 7년 뒤인 1986년 다시 보안사로 끌려갔고, 허위로 조작된 범죄사실(국가보안법 위반)에 의해 7년형을 살아야 했다.

강씨는 출소 후 간첩이라는 사회적 낙인 속에 제대로 된 직장 한번 갖지 못하고 막일을 전전했다. 강씨는 “인생을 망치고 가정까지 파괴된 것이 억울했지만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며 “시대를 원망하고 있을 때 2009년 재심을 통해 무죄를 받았다는 뉴스를 보고 재심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강씨는 국가폭력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비영리단체인 ‘지금 여기에’와 함께 2012년부터 재심을 준비해 2017년 무죄확정 판결을 받았다.

‘수상한 집’은 강씨처럼 국가기관으로부터 삶을 빼앗긴 피해자들의 삶을 기록하고, 피해자들의 안전한 쉼터로 조성한 공간이다.

변상철 ‘지금 여기에’ 사무국장은 “국가폭력 피해자는 많은데 이를 알리고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은 없다”며 “죄인처럼 위축될 필요 없이 평범하게 이웃들과 소통하고, 자신들을 알리는 공간을 제주에 꼭 만들고 싶었는데, 이 사정을 알고 있던 강 선생님이 자신의 집을 내놨다”고 말했다. 강씨는 의미 있게 쓰고 싶다며 무죄 판결 후 받은 국가배상금까지 내놨고, 시민의 모금까지 더해졌다.

‘수상한 집’은 강씨가 살던 옛집 위에 집을 하나 더 지은 ‘집 위의 집’ 구조다. 옛집은 피해자들의 사연을 담은 전시실이 됐고, 1층과 2층의 카페와 게스트하우스는 다음달 중순부터 본격적으로 운영된다.

글·사진 박미라 기자 mr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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