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불 독립운동가 홍재하, 사후 60년 만에 공적 인정

2019. 7. 5.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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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계신 부친께서 너무나 영광스러워하실 겁니다."

100년 전 일제의 탄압을 피해 러시아·영국을 거쳐 프랑스에 정착해 임시정부 파리위원부를 도운 독립운동가 홍재하 선생(1898∼1960)이 작고한지 약 60년 만에 우리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정식으로 인정받게 됐습니다.

그는 당시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에 자금을 대고 3·1운동의 정신을 프랑스에서 기리는 활동을 하는 등 활발히 독립운동을 했지만, 그 존재와 활약상은 최근까지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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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계신 부친께서 너무나 영광스러워하실 겁니다."

100년 전 일제의 탄압을 피해 러시아·영국을 거쳐 프랑스에 정착해 임시정부 파리위원부를 도운 독립운동가 홍재하 선생(1898∼1960)이 작고한지 약 60년 만에 우리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정식으로 인정받게 됐습니다.

현지시간으로 어제(4일) 국내 독립운동사학계와 홍재하 선생의 차남 장자크 홍푸안(74·프랑스 생브리외 거주)씨에 따르면, 정부는 홍재하 선생의 프랑스에서의 독립운동 공적을 심사해 최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홍재하는 독립운동을 하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러시아, 북해, 영국을 거쳐 1919년 프랑스로 건너와 프랑스 최초의 한인 단체인 '재법한국민회'(在法韓國民會)의 2대 회장을 지냈습니다.

그는 당시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에 자금을 대고 3·1운동의 정신을 프랑스에서 기리는 활동을 하는 등 활발히 독립운동을 했지만, 그 존재와 활약상은 최근까지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장자크 씨와 우연히 친분을 맺게 된 재불동포 부부와 국내외 역사학자들의 도움이 있었고, 연합뉴스가 작년 10월 장자크 씨의 사연을 처음 보도하면서 홍재하의 독립운동 공적을 재조명하는 작업이 국내에서도 본격화했습니다.

최근 밝혀진 사료들에 따르면, 홍재하는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위험에 처하자 1913년 만주를 거쳐 러시아 무르만스크로 건너갔습니다.

무르만스크의 철도공사 현장 등지에서 노동자로 일하던 홍재하 등 한인들은 1차대전 당시 이곳을 점령한 영국군을 따라 우여곡절 끝에 에든버러까지 흘러 들어갔습니다.

이에 임시정부 파리위원부(대표 김규식)는 황기환 서기장을 영국에 급파했습니다. 당시 영국과 일본은 영일동맹으로 묶인 동맹국이었는데, 임시정부는 일제 치하의 한국으로 송환될 뻔한 이들 중 홍재하 등 35인을 1919년 프랑스로 데리고 들어오는 데 성공했습니다.

홍재하는 이후 프랑스 최초의 한인 단체인 '재법한국민회' 결성을 주도해 이 단체의 2대 회장을 지냅니다. 프랑스에서 동료 한인들과 함께 1차대전 전후복구 노동으로 힘들게 번 돈을 갹출해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에 보내는 등 자금책 역할도 했습니다.

작년 말에는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황기환 서기장이 돈을 모아 보내준 것에 대해 홍재하에게 감사를 표하는 친필편지가 장자크 씨가 보관 중이던 홍재하의 유품에서 발견된 바 있습니다.

또 이 유품에서는 이승만이 임시정부 대통령에서 탄핵당한 사실을 알리는 '독립신문'의 호외본이 최초로 실물로 확인되는 등 역사학계가 주목할 만한 자료도 다수 발견됐습니다.

차남 장자크 씨는 최근 부친이 남긴 각종 서신과 임시정부 자료 등 독립운동 관련 유품 일체를 국사편찬위원회에 기증했습니다.

파리에서 미국인 사업가의 집사 등으로 일하며 프랑스 여성과 결혼해 2남 3녀를 둔 홍재하는 해방만 되면 가족 모두를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꿈을 간직했지만, 해방정국의 혼란과 한국전쟁이라는 격랑을 맞게 됩니다. 고국의 전쟁구호 활동까지 돕던 그는 전란이 지나간 뒤에도 고국 땅을 끝내 밟지 못하고 1960년 암으로 타계했습니다.

그의 유해는 현재 파리 근교 소도시 콜롱브의 공동묘지에 묻혀 있습니다.

차남 76살 장자크 씨는 국가보훈처의 초청으로 이번 광복절에 즈음해 부인과 함께 한국을 찾습니다.

그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하셨던 일들이 고국에서 이렇게 인정됐다는 것을 아시면 무척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우실 것"이라면서 "곁에서 도와주신 모든 분에게 깊이 감사드린다"고 말했습니다.

[MBN 온라인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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