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공장 이달말 멈출 수도 있다"

오상헌/김형호/좌동욱 입력 2019. 7. 5. 17:26 수정 2019. 7. 6.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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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SK 등 정부에 우려 전달
에칭 가스 재고 2~4주 남아
"맞보복으로 韓·日 전면전 땐
기업 피해 너무 크다" 반대

[ 오상헌/김형호/좌동욱 기자 ]

일본 정부가 지난 4일부터 주요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수출규제에 나서면서 ‘반도체 강국’인 한국에 비상등이 켜졌다. 서울 영등포구 여의대로에 세워 놓은 반도체 기판 너머로 여의도의 야경이 보인다. /김범준 기자 bjk07@hankyung.com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업체 최고경영자(CEO)들이 “일본이 수출 규제를 풀지 않으면 당장 이달 말부터 공장 가동이 중단될 수 있다”는 우려를 정부에 전달했다. “경제 보복 조치를 강구하고 있다”는 정부의 강경 대응 방침에 대해선 “한·일 간 전면전으로 확전되면 우리 기업의 피해가 너무 커진다”며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5일 정부에 따르면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 등 정부와 청와대 고위 관계자들은 최근 김기남 삼성전자 부회장 등 반도체업체 경영진을 만나 이 같은 의견을 들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반도체업체 CEO들은 ‘에칭 가스(고순도 불화수소) 등 일부 소재의 재고가 2~4주 분량에 불과해 이르면 이달 말 공장이 설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고 말했다. 전체 수백 개 공정 중 단 하나의 공정만 이상이 생겨도 반도체 라인은 가동을 중단해야 한다.

정부도 ‘맞보복’보다는 국제공조를 통해 일본을 압박하는 데 주력할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의 반도체 생산에 차질이 생기면 자국 기업들도 큰 타격을 받는 미국(구글, 애플, 아마존) 중국(샤오미, 오포, 비보) 등과 함께 일본에 수출 규제 해제를 공동으로 요구한다는 전략이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정책의 1순위는 일본에 최대한 타격을 주는 게 아니라 우리 기업 피해를 줄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재근 한양대 교수는 “삼성전자 공장이 멈춰서면 애플 퀄컴 등 기존 고객사들이 모두 대만 TSMC 등 경쟁사로 옮겨갈 것”이라며 “정부가 더 전향적으로 일본과 과거사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공장 1시간만 서도 兆단위 손실…'반도체 큰손' 경쟁사에 다 뺏길 것"

국내 반도체, 디스플레이업계가 강경 대응 기조로 돌아서고 있는 청와대와 정부를 ‘놀란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지난 4일부터 시작된 일본 정부의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수출 규제에 대해 정부 고위 관계자들의 입에서 “국제법을 명백히 위반했다” “보복 조치를 강구하겠다”는 강경 발언들이 쏟아지고 있어서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업체들은 한·일 갈등이 장기화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감산, 공장 가동 중단 등 시나리오별로 위기 상황에 대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안덕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양국 정부가 ‘강 대 강’으로 대치하면서 전선이 확산하면 한국 기업들이 더 큰 피해를 볼 것”이라며 “확전은 자제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日 수출 규제로 반도체업계 ‘초비상’

5일 업계에 따르면 지난 4일부터 시작된 일본의 수출 제한 조치로 포토레지스트(감광액), 에칭가스(고순도 불화수소),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 3개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의 일본 내 통관이 이틀째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과거 3년 단위로 허가를 받아 수입해온 이들 물품을 건별로 허가 받아야 하기 때문에 통관 절차에 최소 한 달 이상 소요될 것으로 업계는 추정했다. 국내 반도체업계의 한 관계자는 “수출 규제 대상 소재를 하루 단위로 관리하고 있다”며 “공급처를 다변화하려 노력하고 있지만 단기적으로 공급 부족 사태를 피하기는 어렵다”고 털어놨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의 광범위한 공정에 불순물을 제거하는 용도로 사용되는 에칭가스는 일부 기업의 재고가 2~4주치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독성이 강하고 변질될 우려가 있어 재고를 많이 쌓아두기 어렵기 때문이다. 반도체 웨이퍼에 회로를 인쇄하는 노광 공정에 쓰이는 포토레지스트도 업체별 재고가 두세 달치뿐인 것으로 전해졌다. LG디스플레이, 삼성디스플레이 등 디스플레이업체들도 에칭가스와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을 확보하느라 ‘비상’이 걸렸다. 업계 관계자는 “일본 기업이 100년 이상 관리하면서 쌓은 노하우가 담긴 소재”라며 “대체하는 데 상당한 시일이 걸리거나 대체가 힘들 수도 있다”고 털어놨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주요 반도체업계 경영진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이 같은 위기 상황을 정부에 전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부처의 한 고위 관계자는 “일부 반도체 라인은 이르면 이달부터 가동을 중단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는 설명을 들었다”고 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도 “지금은 비상시국”이라며 “‘기업 편들기’라는 일각의 지적에 신경 쓸 때가 아니다”고 말했다.

반도체 라인 가동 중단되나

24시간 돌아가는 반도체 공장은 한 번 가동을 멈추면 엄청난 피해가 난다. 지난해 3월 평택 반도체 공장에서 발생한 30분의 정전 사고로 삼성전자는 400억~500억원대 손실을 입었다. 정전과 동시에 비상 발전기가 가동되면서 일부 설비만 전력이 끊겨 그나마 더 큰 피해를 막았다는 게 삼성 측 설명이다. 이런 대규모 반도체 라인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각각 두 곳이 더 있다.

국내 반도체업계는 일본의 수출 규제가 장기화할 경우 D램, 낸드플래시, 모바일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등 주력 반도체 제품 생산이 전면 차질을 빚을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국내 기업들은 우리 정부의 강경 대응으로 한국과 일본의 갈등이 전면전으로 확전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노심초사하는 분위기다. 디스플레이업계의 한 관계자는 “산업통상자원부 등 정부 부처들이 일본 정부에 타격을 줄 수 있는 보복 조치에 대한 아이디어를 묻더라”며 “전선이 더 넓어질까 봐 경영진이 좌불안석”이라고 전했다. 양국 간 무역전쟁이 본격화하면 한국 기업의 타격이 더 클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일본 내수 시장이 한국보다 크고 일본 수출품엔 대체불가능한 제품이 다수 있어서다. 국내 4대 그룹 계열사의 한 최고경영자(CEO)는 “매출 9조원 안팎인 일본전산의 산업용 정밀모터 수출만 규제해도 한국 내 상당수 공장 가동이 중단될 수 있다”며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고 말했다.

오상헌/김형호/좌동욱 기자 ohyea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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