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일본제품 불매운동이 놓친 것들

전영선 2019. 7. 8.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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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선 산업1팀 기자
일본 정부가 ‘미운 짓’을 이어가고 있다. 일본은 대(對)한국 수출규제 조치 과정에서 의도를 숨기는 수고조차 하지 않았다. 한국 소비자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불매 포스터를 만들어 공유하고, 일제 필기구와 화장품 따위를 한데 모아 쓰레기통에 넣는 인증 사진이 속속 올라오고 있다. ‘일본 제품은 선물로도 받지 않겠다’는 선언, ‘위안부 할머니 때부터 미웠는데 계속 미운 일본’과 같은 자막을 넣은 영상도 눈에 띈다. 불매운동에 적극 동참하지 않더라도, 메신저 프로필을 ‘노 재팬(NO JAPAN)’ 이미지로 바꾸지 않아도 이런 사회적 분위기엔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럼 일본 제품을 쓰지 않기로 한 실천은 과연 어디까지 가능할까. 이건 생각보다 어렵다. 마치 외래어를 쓰지 않고 말하기에 도전하는 것과 비슷하다. 무엇보다 오랜 기간 이어가기 힘들다. 그만큼 한국과 일본은 경제·산업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제품명이 일어로 돼 있는 제품을 국산으로 바꾸는 것만으로는 불매 운동이 기대한 효과를 얻기 힘들다.

냉장고에서 아사히나 기린 맥주를 꺼내 싱크대를 통해 흘려 버린다고 치자. 그럼 쿠팡은 써도 될까. 잘 알려져 있듯이 쿠팡은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대표적 투자사다. 일본 자본이 조 단위로 투입된 전자상거래 업체를 통해 물건을 사는 것은 괜찮은 것일까.

5일 오후 서울 은평구의 한 마트에 일본 제품을 팔지 않는다는 안내문이 게시돼 있다. [뉴스1]
일본 제조사가 독점하고 있는 반도체 핵심 소재를 일본 정부가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려고 한 것이 이번 갈등의 실체다. 바꿔 말해 일본이 공급하는 소재 없이는 한국의 대표 상품인 반도체를 만들 수 없는 게 현실이다. 당장 쓰고 있는 스마트폰과 노트북을 내다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유니클로 불매 운동은 일본 유니클로를 향하는 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 한국도 찔린다. 유니클로가 한국에서 지난해 올린 매출 약 1조3000억은 상당 부분 한국 180여 매장 운영비와 고용 직원의 급여 등으로 지출됐다. 당장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만약 한국 유니클로 매출이 급격히 줄어 한국에서 망해 나간다고 하면, 함께 피해를 본다.

불매 운동의 불똥은 엉뚱한 곳으로 튀기도 했다. 며칠 사이 ‘우린 일본 제품이 아니다’는 해명이 쏟아졌다. 코카콜라가 만드는 조지아 커피, 생활용품점 다이소, 편의점 CU가 일본과의 관련성을 부인했다. 산업 체인이 여러 지역에 걸쳐 있는 것이 당연한 상황에서 죄가 아닌데도 낙인이 될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안타깝다. 롯데는 다시 한번 ‘롯데는 일본기업’이라는 댓글에 시달리고 있다. 세븐일레븐 등에 안 간다는 해시태그(#)가 “개념 있다”는 칭찬으로 이어진다. 급기야 ‘스파이더맨-파 프롬 홈’의 배급사가 소니픽처스인 것을 두고 벌어지는 논란은 피곤하기까지 하다.

소니픽처스가 실은 미국 기업(혹은 다국적 기업)인 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설령 한국에서 ‘스파이더맨’이 흥행에 참패해도 소비자가 겨냥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부에 가해질 타격은 없다. 그래서 지난 5일 한국중소상인자영업자총연합회가 “동네마트 점주들은 일본제품 판매를 중지하고 반품하기로 했다”고 했을 때 통쾌하다는 감정보다는 반품을 받아 처리할 업체 담당자의 고생부터 떠올랐다.

소비자 운동엔 여러 의미가 있다. 의식 있는 소비는 기업에 경고가 돼 경영 방침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아쉽게도 감정만 앞선 불매 운동은 퇴행적이다. 정치와 외교가 이상 작동할 때 기업과 소비자 피해는 예상하기 어려웠던 곳으로 확산한다는 점만은 확고하다. 숙명여대 경영학과 서용구 교수는 “한일 경제 관계는 떼어낼 수 없는 상황에 있다”며 “정치 논리에 따라 경제 논리를 무시하면 양쪽 모두에게 타격을 주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치밀한 분석과 냉정한 대응이 아쉬운 대목이다.

전영선 산업1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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