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빌라촌까지 온 '갭투자 쓰나미'.. 신혼부부를 덮치다

최아리 기자 입력 2019. 7. 10. 03:40 수정 2019. 7. 10.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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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셋값보다 싸진 집값.. 강서·양천구 빌라 600채 주인 잠적하기도
전세로 시작한 부부에 직격타.. 법적으로도 뾰족한 수 없어 문제
작년 4월, 회사원 전모(37)씨 부부가 모아둔 돈 5000만원에 은행 대출 1억3000만원을 보태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 전셋집을 얻었다. 올해 4월, 집주인이 전세금을 돌려주지 못해 잠적한 것을 알았다. 중개업소에 알아보니, 최근 주택 거래가 얼어붙으면서 비슷한 물건은 1억4000만원에도 사려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평생 모은 돈을 모두 날리게 되자, 끙끙 앓다 대상포진에 걸렸다. 그래도 휴직계를 내고 변호사·법무사를 찾아다녔다. 번번이 "뾰족한 수가 없다"는 대답이었다. 지난달 태어난 아기는 체중 2.6㎏ 미숙아였다. 전씨는 "아내가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 것 같다"며 "모든 게 나 때문인 것 같아 너무 괴롭다"고 했다. 전씨에게 집을 빌려준 강모(52)씨에겐 이렇게 전세 놓은 집이 서울·경기에 걸쳐 280여채 더 있다.

갭투자 피해자 박애정씨 부부가 서울 강서구 화곡동 자택에서 9일 오후 아이를 보고 있다. 식탁에 놓인 문서는 등기사항전부증명서(왼쪽)와 빌라임대차계약서다. 집주인이 2015년 1억1500만원을 주고 산 집에, 박씨는 3년 뒤 전세금 1억3500만원을 내고 들어왔다. /이태경 기자
한껏 과열됐던 주택 시장에 정부가 초강력 규제를 가한 데 따른 부작용이 집 없는 서민을 덮쳤다. 집값 10~20%에 해당하는 돈만 가지고 전세를 끼고 집을 여러 채 사들인 '갭투자'족(族)이 줄줄이 파산하면서, 전세입자 수백 명씩 한꺼번에 보증금을 떼이는 사례가 서울에서도 벌어지기 시작했다. 최대 피해자는 경제적 약자인 '저가(低價) 주택 세입자'였다. 특히 신혼부부가 많았다.

서울에서 파산한 수백 채 규모 갭투자자는 강씨만이 아니다. 지난달 17일 서울 양천구 신월동 A빌라 입구에는 메모와 편지가 수두룩이 쌓여 있었다. '집수리를 해달라' '전세금을 돌려달라'는 내용이었다. 이곳에 살던 이모(62)씨는 강서구·양천구·구로구 일대에 집 600여채가 있으나 올해 1월부터 연락이 두절됐다.

피해자 주변에선 '좀 비싸게라도 집을 사들여서 눌러 살면 그만 아니냐'고들 한다. 결혼 5년 차인 박애정(34)씨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라고 했다. 그는 작년 2월 만삭의 몸으로 갭투자자 강씨의 화곡동 빌라에 전셋집을 얻었다. 집 살 돈을 조금이라도 아끼려 반지하집에 들어갔다. 아이는 지금 두 살이다. 박씨는 집주인이 잠적한 뒤, 정부 지원 임대주택에 당첨됐다. 입주금 9000여만원만 내면 평생 살 수 있는 임대주택이었지만, 전세 보증금을 돌려받지 않고는 돈을 마련할 방법이 없어 포기했다.



2017년 12월 전모(32)씨는 결혼을 앞둔 남자친구와 구로구 고척동 빌라에 1억8500만원짜리 전셋집을 구했다. 일단 살림을 먼저 합친 뒤 결혼식을 올릴 생각이었다. 올해 2월 전세자금대출을 연장하려고 집주인에게 연락했으나 전화는 꺼져 있었다. 전씨는 "돈에 물리고 나니 퇴근해도 단란하게 함께하기보다 서로 이것저것 방법 알아보느라 휴대전화 들여다보기 바쁘다"고 했다.

갭투자족은 정부를 탓한다. 갭투자자 강씨를 대신해 주택을 처분 중인 이모씨는 "주택 경기가 좋을 때 투자한 건데, 부동산 대책으로 집 사려는 사람은 씨가 마르고 은행도 돈을 빌려주지 않으니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라고 했다.

집주인들의 '출구전략'은 고스란히 세입자들의 피해로 돌아간다. 경남 창원에 192가구를 보유한 김모씨는 지난해 법원에 개인회생 절차를 신청했다. 신청이 받아들여지면 세입자들이 받을 수 있는 보증금은 줄어든다. 동탄신도시 갭투자자 임모씨 소유 아파트 270가구 세입자들은 올해 5월 "임씨가 허위의 가족 간 채무를 만들어 집을 헐값에 경매에 넘기고 있다"며 검찰에 고소했다.

갭투자 상담 업체는 여전히 성업 중이다. 서울 신도림역 앞 컨설팅 업체에 전화를 걸었더니 "요즘 서울 집값이 다시 오름세다. 갭투자 하기 좋은 곳을 추천해주겠다"고 했다. 이 업체는 매주 토요일 참가비 1만원을 받고 투자 세미나를 연다.

정부는 이달 3일에야 '전세금 반환 보증' 가입 조건을 대폭 완화했다. 피해자들은 하나같이 "너무 늦었다"고 했다.

☞갭투자

매매 가격과 전세 가격의 차액(差額·gap)만큼만 투자하고, 나머지 집값은 세입자에게 받은 전세금으로 충당해 집을 사는 행위. 예컨대 집값이 1억원이고 전세금이 8000만원이면, 갭투자자는 집 한 채값 현금으로 5채를 사들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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