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버텨 정규직 됐는데.. 3개월 만에 자진 퇴사

정현수 임주언 기자 2019. 7. 10. 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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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탐사] 허울뿐인 전환, 달라지지 않는 처우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이 사라졌다.” 한국잡월드파트너즈 강사 조운범(39)씨는 정규직으로 전환된 지 3개월 만인 지난 3월 스스로 사표를 낸 심경을 9일 토로했다. 그는 최저임금 수준의 월급,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 대우를 7년간 견뎠고, 2017년 시작된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0) 정책으로 지난해 12월 정규직이 됐다. 강사들은 직접고용을 원했지만 ‘2020년까지 처우 개선을 이루겠다’며 자회사 채용 방식을 고수한 한국잡월드 약속을 조씨는 믿어보기로 했다.

그러나 비정규직 7년을 버티게 해준 ‘기대’가 무너져내리기까지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회사 입사 후 처우 개선을 위한 사측과의 대화는 차일피일 미뤄져만 갔다. 직접고용과 자회사 전환 방식을 두고 협상이 지지부진해 노조가 갈렸고, 함께했던 동료들 사이 갈등도 생긴 상태였다. 조씨의 월급은 비정규직 당시 받았던 200만원 그대로였다.

조씨는 “비정규직 때 허리디스크 수술을 하자 회사는 배려하듯 ‘편히 쉬고, 회복되면 다시 오라’며 퇴사 조치를 했다. 정규직 직원들이 결원 자리를 메우기 위해 들어온 아르바이트생에게 ‘저 사람에겐 인사할 필요 없다’고 했던 말도 들었지만 묵묵히 견뎠다”며 “그동안 정규직이 돼 정당한 대우를 받으려고 노력했고 투쟁도 하면서 안간힘을 썼는데 여기까지가 한계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터널·지하차도를 청소하는 업체에서 일하고 있다. 조씨처럼 퇴사를 고민 중인 김모(33)씨도 “더 버텨봤자 꿈이 없는 것 같다. 자회사 정규직 채용 이후에도 최저임금만 받는 건 여전하고, 복지 역시 별반 나아진 게 없었다”며 “동료들 상당수가 버텨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잡월드 측은 “잡월드파트너즈 근로자들 사이의 이견으로 상생발전협의회가 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며 “급여도 전환 이후 생긴 명절상여금 등을 고려하면 인상된 셈”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공공운수노조 한국잡월드분회에 따르면 조씨처럼 정규직 전환 이후 잡월드파트너즈를 떠난 강사는 지난 7개월간 20여명에 달한다.

공공부문 정규직화 추진 2년 만에 전국 사업장 곳곳에서 비슷한 취지의 불만이 분출되고 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정규직 신분 전환이 허울뿐이라는 주장이다. 애초 이를 우려했던 사업장 여러 곳이 쟁의조정 신청을 내면서 정규직 전환 문제가 노동 갈등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비정규직 고용 안정에 일정 부분 성과를 내며 선도적 역할을 했다는 점은 평가했다. 그러나 갈등 양상이 다양하게 터져나오고 있는 만큼 제도 연착륙을 위한 대안을 모색할 시점이라고 제언했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정규·비정규직 문제는 결과적으론 분배 문제인 만큼 재원이 한정적이라면 갈등은 커질 수밖에 없다”며 “이제는 정부가 대타협의 방안을 고민해야 하는 차례”라고 말했다.

국민일보가 정부 가이드라인 발표 직후인 2017년 8월부터 지난 7일까지 약 2년간 중앙노동위원회와 전국 13개 지방노동위원회에 접수된 노동쟁의 사건을 확인한 결과 총 61건의 사례에서 정규직 전환이 주요 쟁점 중 하나로 등장했다.

전국 단위 사건을 다루는 중노위에는 지난 1년 동안 12건의 사건이 집중됐다. 같은 기간 공공부문 사업장에서 접수된 조정신청 사건이 총 38건임을 감안하면 3건 중 1건(31.6%)꼴로 정규직 전환 갈등이 터져나온 셈이다. 범위를 전북 전주지역 비정규직 환경미화원 사례처럼 민간 위탁 사업체까지 넓히면 갈등 사업장은 훨씬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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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들은 숙원이었던 정규직 전환 정책에 왜 실망감을 나타낼까. 국민일보는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 과정에서 잡음이 나왔던 사업장 근로자들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대체로 노동현장의 갈등은 정규직 전환 추진 시작 단계부터 적용 대상이나 전환 방법을 놓고 다양한 형태로 분출됐다.

현재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은 잡월드 사례처럼 자회사 전환 방식에 대한 시각차에서 비롯됐다. 잡월드파트너즈의 사례는 최근 진행된 공공부문 비정규직 총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들의 염려와 일치한다. 한국가스공사에서 9년째 전기시설을 관리하고 있는 비정규직 근로자 김철수(가명·39)씨의 불만도 다르지 않다. 처음 입사할 때 220만원 정도였던 그의 월급은 9년여 동안 겨우 40만원 정도 올랐다. 2~3년마다 고용 용역업체만 바뀌는 삶이 계속됐다. 문재인정부가 1호 공약으로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들고 나오면서 “곧 직접고용이 되면 정년까지 차별받지 않고 고용불안 없이 일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생겼다.

하지만 공사 측이 자회사 설립 방식을 들고 나오며 갈등이 시작됐다. 자회사 근무 형태가 지금의 용역업체보다 나은 게 없는 데다 정권이 바뀌면 구조조정될 위험이 크다는 게 비정규직들의 걱정이었다. 김씨는 “정규직과 똑같이 월급을 달라는 게 아니다. 내일 새로 들어오는 사람과 10년째 일한 사람 월급이 같은 게 말이 되느냐”며 “직군에 대한 임금체계를 따로 설계하고, 근속연수에 따라 임금을 올려달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자회사 전환 방식에 반대하고 있는 한국가스공사 비정규직 근로자들은 445일 넘게 출퇴근과 점심시간 피켓 시위를 벌이고 있다.

최근 한국도로공사 요금수납원들이 톨게이트로 올라간 이유도 다르지 않다. 한국도로공사는 요금수납 업무 자체를 자회사로 이관하고, 수납원들을 자회사에서 채용하는 형태로 전환을 마쳤다. 하지만 1500여명의 수납원들은 자회사가 결국 하청고용 구조와 다름없다는 이유로 자회사를 반대했다. 자회사 전환 거부로 이들은 현재 해고된 상태다.

정부가 정규직 전환 방식에서 자회사 설립을 허용한 것은 자회사가 전문적이고 근로조건의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하지만 현장에선 새로 설립된 자회사가 모회사 예산으로 인건비만 지급하는 형태에 대한 불만도 컸다.

분당서울대병원의 경우 간호조무, 미화, 주차, 시설관리를 담당하고 있는 전환 대상자가 1280여명에 달한다. 하지만 병원 측이 원하는 자회사 방식과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원하는 직접고용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윤병일 민주일반연맹 분당서울대병원 분회장은 “자회사로 전환한 다른 공공기관의 사례를 보면 자회사가 독립적으로 이윤을 창출하는 게 아니라 병원(원청)에서 1년 예산 받아 인건비를 지급하는 형태”라며 “모회사와 완전히 분리돼 전문성을 키우는 자회사 개념이 아니라 결국 간접고용이고, 지금의 용역업체와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지난달 국립대병원 노조 차원의 파업을 벌였던 분당서울대병원 비정규직 근로자들은 다음주부터 1인 시위에 나설 계획이다.

분당서울대병원을 포함해 정부 가이드라인상 1단계 전환 대상인 국립대병원에서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 역시 이 때문이다. 병원은 자회사 방식에서 물러서지 않고, 비정규직 근로자들은 자회사 형식의 전환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발하는 상황이다. 교육부에서 병원을 압박하기도 했지만 별다른 변화는 없다.

공무직으로 신분 변화가 된 노동자들도 처우 개선에 대한 실망감을 토로한다. 국립중앙박물관의 9년차 웹디자이너 최유경(가명·38)씨는 계약직으로 입사한 지 2년 된 2012년 무기계약직이 됐고 2017년 가이드라인이 나오면서 공무직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하지만 처우에 대한 차별은 여전했다.

최씨는 “명절상여금을 1년에 80만원 정도 받는데, 기획재정부나 다른 문화체육관광부 소속 기관은 기본급의 120%를 받고 있다”며 “(월급체계는 다르더라도) 처우는 동등해야 한다는 게 저희의 생각”이라고 말했다. 공무직은 월급도 전문직·현장직 모두 경력 차이 없이 최저임금을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게 최씨의 입장이다. 무기계약직이 된 학교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이달 초 최장 규모 총파업을 벌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전문가들은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 발표 당시 예산 지원 계획이 부족했고, 정규직 전환 이후 처우 개선 로드맵이 제시되지 못한 원인이 크다고 봤다. 더불어민주당 강병원 의원실과 민주노총 산하 전국공공운수노조 주최로 열린 토론회에서 엄진령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집행위원은 “32개 자회사, 141개 업무군을 단순 평균하면 전환 후 임금은 평균 10.96% 인상된 것으로 나타났지만 최저임금 상승, 물가상승분이 있어서 실질적 인상으로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권순원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최근 분출된 불만은 자회사를 통한 신분 전환 방식 자체보다 신분 전환 이후 기존 용역회사에 있을 때와 처우 등이 달라지는 게 없는 것이 문제”라며 “국정과제이다보니 떠밀리듯 추진한 사례가 많았고, 처우 개선을 위한 예산 지원은 각 기관과 기획재정부, 국회가 서로 미루기 식으로 책임만 전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노광표 한국노동사회연구소장도 “공공부문은 자회사 전환을 하더라도 일방적 구조조정은 쉽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임금이나 복지 처우가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노동자들의 우려는 크다”고 말했다.

공공운수노조 전국교육공무직본부 정책국장인 배동수 노무사는 “그동안 응축돼 왔던 공공부문 비정규직 문제가 비로소 터져나오기 시작한 것”이라며 “정부가 비정규직 제로화를 선언했지만 각 사업장 유형별로 달라야 할 구체적인 실행 방식이나 반드시 수반됐어야 할 예산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안을 제시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정현수 임주언 기자 jukebox@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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