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시기'에 늘었다는 에칭가스 수입, 반도체 경기 따라 달랐다

남지원·임지선 기자·도쿄 | 김진우 특파원 2019. 7. 12.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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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일본 ‘북한 밀반출 억지 주장’ 분석해보니

2010·2011·2017년 반도체 호황 때 ‘소재’ 수요 늘어 급증 화학무기용 저순도 불화수소는 알리바바에서도 살 수 있어

일본이 수출규제 빌미로 내세운 ‘특정 시기에 한국의 에칭가스 대량 발주’는 반도체 시장 호황과 설비 증산 때문인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은 갑자기 한국 기업들이 많은 양의 에칭가스(고순도 불화수소)를 수입했고, 이는 북한으로 흘러갔을 것이란 주장을 펴고 있다. 한국의 전략물자 관리체계를 믿지 못한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사실관계를 무리하게 왜곡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특히 전문가들은 화학무기를 만드는 데는 고순도 불화수소가 아니어도 된다며 값비싼 일본산 소재를 북한으로 밀반출할 이유가 없다고 반박했다. 일반 불화수소는 심지어 중국 알리바바 쇼핑몰에서도 판매된다.

11일 한국무역협회가 집계한 통계를 보면, 지난해 반도체 제조에 사용되는 일본산 에칭가스 수입액은 6685만7000달러로 2017년에 비해 54.9%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4일 극우·보수 성향의 산케이신문 계열인 일본 후지뉴스네트워크(FNN)는 한 자민당 간부가 “특정 시기 한국 기업에서 에칭가스 대량 발주가 이뤄졌는데 행방이 묘연해졌다”며 에칭가스가 북한으로 밀반출돼 화학무기 생산에 전용됐을 수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고 보도했다.

실제로 지난해 에칭가스 수입이 이례적으로 급증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는 지난해 반도체 경기가 유례없는 호황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업계는 설명한다. 2017년 시작된 반도체 초호황기가 지난해 정점을 맞으면서 시장을 주도해온 국내 업체들은 앞다퉈 생산을 늘렸다. 지난해 반도체 수출도 전년보다 29.4%나 늘어나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한 반도체 업체 관계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업체들이 평택, 청주는 물론 중국까지 반도체 라인을 증설하는 등 생산량을 늘리면서 소재 수요도 늘어난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다른 업체 관계자도 “메모리뿐 아니라 시스템반도체 쪽에서도 에칭가스 사용량이 증가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스마트폰 확산으로 반도체 경기가 호황기에 접어들었던 2010년과 2011년에도 에칭가스 수입액이 각각 전년보다 42.1%, 72.5% 늘었다.

일본 언론들은 불화수소로 생화학무기인 사린가스를 만들거나 우라늄 농축에 쓸 수 있다는 의혹까지 적극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값싸고 만들기 쉬운 저품질 불화수소를 두고 값비싼 반도체용 고순도 불화수소를 북한으로 밀반출했을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 지적했다.

반도체 제조공정에서 쓰이는 에칭가스는 순도 99.999% 불화수소다. 불순물 제거나 유리 세공 등 일반 공업용 불화수소는 순도가 99.99%나 99.9% 이하로 질이 낮고 구하기도 어렵지 않다. 세계 최대 온라인 상거래 플랫폼인 알리바바에서도 중국 화학회사들이 판매하는 순도 99.99% 급의 불화수소가 t당 1200~2300달러 선에서 유통된다.

최정훈 한양대 화학과 교수는 “순도가 낮은 불화수소보다 수십배 비싼 ‘파이브 나인(99.999%)’급 불화수소를 우라늄 농축이나 화학무기에 쓸 이유가 없다”며 “북한 기술로도 저순도 불화수소는 쉽게 만들 수 있으며 구하기도 어렵지 않다”고 말했다.

오히려 일본이 과거 불화수소를 북한에 밀수출했다가 적발된 일이 있다는 자료를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이 이날 공개했다. 일본 안전보장무역정보센터의 ‘부정 수출사건 개요’ 문건을 보면 1996년 2월 고베항에 입항 중이던 북한 선박이 불화수소산 50㎏을 선적해 북한으로 반출한 것으로 드러났다.

일본은 이날도 정부와 언론이 나서 한국의 전략물자 수출관리에 의구심이 간다는 ‘억지뉴스’를 키웠다. 극우·보수 성향 산케이신문은 “한국 정부가 대량살상무기로 전용 가능한 물자를 시리아와 이란 등 북한의 우호국에 부정 수출했다며 복수의 한국 기업을 행정처분했다”고 이날 1면에 보도했다. 전날 FNN이 보도하고 한국 정부가 반박한 내용을 재차 내세운 것이다. 뉴스·정보 등을 가볍게 다루는 TV ‘와이드쇼’ 프로그램들도 이 내용을 반복해서 다뤘다. ‘신문·방송 보도 → 와이드쇼 → 주간지 등 잡지’ 순서를 따라 사태를 키우는 양상이다.

노가미 고타로(野上浩太郞) 관방부 부(副)장관은 이날 정례 브리핑에서 산케이신문 보도 관련 질문에 “보도는 알고 있지만 개별 사례에 답하는 것은 사안의 성질상 피하고 싶다”고 했다.

남지원·임지선 기자·도쿄 | 김진우 특파원 somni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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